본문 바로가기

시나리오와 희곡

모노드라마: 달빛 속의 며느리

반응형

모노드라마: 달빛 속의 며느리

오유권 원작 월광

배경


무대는 단출하게 구성된다. 초라한 움막의 내부와 외부가 모두 보이는 무대이다. 한쪽에는 작은 창문이 달려 있고, 낡은 보따리와 아이들 옷가지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무대 중앙에는 며느리가 앉아 있을 나무 의자와 낮은 상이 있다. 은은한 달빛이 무대를 비추고 있다.


등장인물

며느리 (독백의 화자)


서막


(무대가 어두워진 상태에서 서서히 달빛이 비친다. 며느리가 중앙의 나무 의자에 앉아 있다. 고개를 숙이고 손에는 바느질감이 들려 있다. 잠시 멈췄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관객을 바라보며 말을 꺼낸다.)

며느리:

(작은 한숨을 내쉬며)
"나는 누구인가요? 남편 없는 여인, 두 아이를 끼고 살아가는 홀어미… 아니면 이 집안을 부양하는 가장? 아, 그런 이름이 무슨 소용일까요. 내 이름조차 흐릿해진 지 오래입니다. 지금은 그냥… '며느리'일뿐이죠."

(손에 든 바느질감을 내려놓고 고개를 젖힌다.)
"내 나이 서른, 이렇게 살 줄은 몰랐습니다. 남편 이두가 떠난 날부터 내 삶은 고달픈 가시밭길이 되었죠. 그이가… 산에 들고는 소식조차 끊겼으니, 과부인지 아내인지 구분도 안 됩니다."


고단한 삶


(무대 조명이 살짝 밝아지며 움막의 내부를 비춘다. 며느리가 자리를 옮겨 아이들 옷을 접는 동작을 한다. 말을 이어간다.)

며느리:

"아이 둘과 시아버님을 데리고 살림을 이어간다는 게 쉬운 일일까요? 낮이면 장에 나가 보따리를 메고 돌아다녀야 합니다. 새우, 멸치, 미역 같은 걸 팔러 송정리며 광주며, 멀리 곡성까지 가야 하죠. 이틀, 사흘씩 집을 비우는 일도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찢어집니다. 아이들은 밥이나 먹었을까, 시아버님은 허기를 참으며 계실까…"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한숨을 쉰다.)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내가 못난 걸까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 가난과 고달픔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말이에요."

(아이들을 꾸짖던 일을 떠올리며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어느 날은 큰애한테 소리를 질렀죠. ‘이 썩을 놈아, 나무도 못 쪼아오면 뭘 하냐!’ 하고 말이에요. 애가 뭐가 죄가 있겠어요? 죄라면… 이런 삶을 물려준 우리 어른들 몫이지."


양서방


(조명이 어두워졌다가 다시 달빛으로 바뀐다. 며느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위를 천천히 걷는다. 한쪽에서 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달빛을 바라보는 듯한 동작을 한다.)

며느리:

(달빛을 올려다보며)
"어느 날, 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장짐을 진 양서방을 만났죠. 체장사라는 그 사람, 처음에는 그저 스쳐 가는 장돌뱅이일 뿐이었어요. 그런데 어느새 자꾸 마음이 가더군요."

(작은 웃음을 지으며)
"그 사람이랑 있으면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 같아요. 산짐승처럼 살아온 내 삶에… 작은 불씨라도 피우고 싶더군요."

(한 걸음을 내디디며 고개를 떨군다.)
"그렇지만… 이게 옳은 일일까요? 남편이 없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내가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걸까요? 시아버님께는… 아이들에게는… 이게 죄가 되진 않을까요?"


달빛 아래의 비밀


(조명이 다시 밝아진다. 며느리는 대송나무 아래에서 양서방과 만나는 장면을 떠올린다. 몸을 약간 웅크리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혼잣말을 이어간다.)

며느리:

"대송나무 아래에서… 그 사람과 함께 서 있었어요. 말없이 달빛만 바라보던 그 순간, 내 마음이 얼마나 흔들렸는지 모릅니다."
(잠시 멈춰 눈을 감고, 소리 내어 말하듯이)
"‘달이 밝기도 하네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 사람이 웃으며 답하더군요. ‘보름인가 봅니다.’ 그 작은 대화가… 왜 이렇게 내 가슴을 무겁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고개를 떨구며 속삭이듯)
"아버님이 그 장면을 보셨을까요? 아니, 보셨겠지. 내가 밖에서 너무 늦게 들어갔으니… 아버님이 모를 리가 없겠죠. 그날 밤, 아버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 침묵이 나를 더 괴롭게 만들었어요."


시아버지의 용서


(조명이 어두워지고, 며느리는 다시 움막으로 돌아와 앉는다.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천천히 말을 꺼낸다.)

며느리:

"그날 밤, 나는 결심했어요. 양서방과 더는 만나지 말아야겠다고. 하지만 아버님이 그 사람을 붙잡아 세우셨더군요. 그리고 뭐라고 하셨는지 아세요?"

(고개를 들어 관객을 바라보며)
"‘대장부가 품은 여자를 그냥 돌아서면 안 된다. 집으로 가라.’ 그렇게 말씀하셨대요. 아니, 그게 용서일까요? 아니면 포기일까요?"

(고개를 떨구고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고개를 든다.)
"나는 지금도 모르겠어요. 아버님이 정말로 나를 이해해 주신 건지, 아니면 그저 이 모든 걸 체념하신 건지."


결말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며느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중앙으로 걸어가 달빛 아래에 선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지막 말을 남긴다.)

며느리:

"달빛은 참 무심하죠. 아버님도, 나도, 양서방도, 이 모든 것을 그저 품고 비출 뿐이에요. 하지만… 이제 나는 달빛 아래에서 이 가슴 무거운 죄책감과 함께 살아가야겠죠. 나를 용서한 건 달빛인가, 아니면… 아버님인가요?"

(조명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베토벤의 월광이 흐르며 막이 내린다.)


끝.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