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난 주막, 돈재의 독백
(어두운 무대, 돈재 혼자서 무대를 가로지르며 관객을 향해 말한다.)
돈재
그래, 나 돈재다. 군대 중사까지 했던 놈이다. 은성무공훈장도 받았다. 죽다 살아난 놈이란 말이다. 전쟁에서 목숨 걸고 싸운 내가 돌아와서 뭐 하고 있냐? 품팔이다. 품팔이! 어쩌다 일 있으면 벌고, 없으면 굶는다. 그동안 자존심 하나는 끝내줬지. “돈재!” 하고 부르면 다들 알던 놈인데, 지금은 누가 알아준단 말이냐.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이 술장사였다. 영산포 들머리고개 삼거리, 거긴 오가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하거든. 장사만 잘 되면? 굶는 건 끝이다! 그래서 생각했지. 젊고 이쁜 과부 하나 얻어서 주막을 열면 되겠구나. 문제는 마누라 소쿨례였어.
(잠시 멈춰 담배를 붙이는 시늉을 한다.)
돈재
처음엔 농담처럼 꺼냈지. “마누라, 작은마누라 하나 얻어주라.” 그랬더니 뭐라더라? “뭘 얻어줘! 묵어도 같이 묵고 굶어도 같이 굶어야제!” 그래, 그게 당연하지. 그런데 봐라. 먹고살 길이 없으니까, 농담이 농담이 아니게 되는 법이지.
(조금 걷다가 관객 쪽으로 다가간다.)
돈재
그러다가 마누라 고향 친구 선애 얘기가 나왔다. 결혼 석 달 만에 남편 잃고 친정에 있다는 친구라더군. 내가 그 말을 듣고 눈이 반짝였다. 내심 생각했지. ‘야, 이거다. 선애만 잘 설득하면 된다.’ 소쿨례가 먼저 나섰으니 더 좋았지.
소쿨례가 친정에 가더니만, 친구 선애를 데리고 왔더라. 선애를 차음 봤을 때부터 일이 풀리는 듯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선애는 이뻤다. 말랑말랑한 손끝, 살결, 그 눈매... 난 처음부터 좋았어.
(갑자기 화를 내듯 몸을 돌린다.)
돈재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다. 처음엔 닷새에 한 번이라 했던 약속된 잠자리가 나중엔 삼일에 한 번으로 바뀌더라. 선애가 원했다고? 아니 내가 좋았어. 그래, 선애도 은근히 좋아했다. 그런데 소쿨례는 그게 아니었나 보더라고.
(웃음을 터뜨리듯 비웃는다.)
돈재
웃긴 건 소쿨례가 먼저 선애를 데려온 주제에, 정작 주막에 나와서 일을 하지 않더라고. 물론 약속한 일이긴 히지만, 주막 차린 지 석 달이 되도록 코빼기도 안 보이니 솔직히 자존심 상했지. 내가 뭐라고 했더라? “너 주막 나오면 침이라도 뱉을 줄 아냐!” 그랬더니 아무 말도 못 하더라고.
(몸을 기울이며 더 거칠게 말을 이어간다.)
돈재
사람 마음이란 게, 처음엔 잘 살려고 시작했지만 결국엔 욕심으로 이어지는 법이지. 솔직히 선애가 소쿨례보다 좋았다. 그리고 선애도 날 원했어. 소쿨례가 주막에 안나온 것을 불평한 것... 그냥 핑계였던 거야. 내 속셈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비웃는다.)
돈재
그런데 봐라, 마지막이 참 기가 막히지 않나? 그날 소쿨례가 주막에 나왔는데, 내가 아니더라고. 선애도 아니고, 노인네 내외가 주인이었다지 뭐냐? 하하! 우리가 다 서울로 떠났다고 말했더라고. 노인이.
(고개를 숙였다가 관객을 향해 고개를 든다.)
돈재
그래, 소쿨례하고는 끝났다. 선애와 나는 새로 시작하는 거다.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퇴장하며 중얼거린다.)
돈재
내 삶은 새로 시작된 거다. 어디로 떠난 지는 알락하지 마라. 어디든 상관없다. 선애와 함께라면...
(무대 어두워지며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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