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드라마: 돌방구네, 여신도회장의 독백
(무대는 어둠 속. 한 줄기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며 여신도회장이 등장한다. 그녀는 단정한 옷차림으로 조용히 무대 중앙에 선다.)
여신도회장:
"천주교회에 다니는 교우들이야 많지만, 돌방구네 같은 이는 다시없을 겁니다.
아, 돌방구네? 읍내에서 제일 말 많고 바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신앙은요?
글쎄, 신앙이라기보단 배급받을 강냉이와 밀가루가 더 중요했던 사람이랄까요." (살짝 웃으며)
(무대가 서서히 밝아지고, 돌방구네의 집이 배경으로 나타난다. 여신도회장은 무대 구석으로 걸어가며 이어 말한다.)
"사람들은 돌방구네를 두고 게으르다 했지만, 제가 보기엔 부지런한 면도 있었어요.
어디, 이 동네 저 동네 소문 퍼뜨리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었으니까요." (잠시 멈춰서 관객을 바라보며)
"그녀의 집에 가보면요. 상방은 정리도 안 되어 있고, 아이들은 놀기만 좋아하고... 그 와중에도 교리문답 책은 손에서 놓질 않았죠. 왜냐고요?
영세받으면 배급량이 두 배로 늘어난다고 하니까요."
(무대 조명이 돌방구네와 셋째 아들이 있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돌방구네가 교리문답을 따라 외우는 장면이 펼쳐진다. 여신도회장은 조용히 옆에서 관찰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 집엔 공부 잘하는 셋째 아들이 하나 있었어요. 국민학교 3학년인데, 엄마 돌방구네를 도와 교리문답을 읽어주곤 했죠."
(돌방구네가 "성체성사는 무엇이뇨?" 하고 묻고, 아들이 대답하면 그녀가 따라 외운다.)
"저렇게 열심히 외우는 모습을 보면요, 참 신앙심 깊은 사람 같아 보이죠?
하지만 돌방구네는 늘 영세를 받기 위해서라며 자기 합리화를 했어요. '진실하게 믿어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속내는 강냉이 가루가 두 말이라니까요." (피식 웃는다.)
(무대는 다시 어두워졌다가 성당 입구가 등장한다. 돌방구네가 여신도회장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펼쳐진다. 여신도회장은 무대 한쪽으로 비켜서서 관객에게 말한다.)
"그런데 말입니다. 문제가 생겼어요.
돌방구네가 부활절에 영세를 받으려면, 집안에 있는 남편의 상방을 치워야 한다는 거였죠.
아, 상방이요? 죽은 남편의 제사상과 위패를 모셔둔 방을 말합니다. 천주교에선 제사를 허용하지 않으니까요."
(돌방구네가 여신도회장에게 '제사를 안 지내면 우리 남편이 서운해하지 않겠소?'라고 묻는 장면을 지켜보며)
"그때 제가 뭐라고 했더라... 아, 그렇죠.
'죽은 임자도 교회 제사로 더 큰 은혜를 받을 겁니다'라고 했죠. 그런데요, 돌방구네 표정이 참 난감해 보이더군요."
(무대가 돌방구네 집으로 바뀌고, 돌방구네가 상방을 치우는 장면이 보인다. 여신도회장은 무대 중앙으로 걸어와 목소리를 낮춘다.)
"그날 밤, 돌방구네는 남편의 상방을 치웠습니다. 위패며 곰방대, 신발까지 모조리 태워버렸죠.
'이게 다 자식들 살리려고 하는 일이니, 서운해하지 마라'며 혼잣말을 했어요.
하지만... 그 후로 돌방구네는 아프기 시작했답니다. 상방을 없앤 벌인지, 학질이 도진 건지."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무대는 병원으로 전환되고, 돌방구네가 의사에게 진찰받는 장면이 펼쳐진다. 여신도회장은 조용히 이 장면을 지켜보며 말한다.)
"병원에 갔더니 학질이라며 주사를 맞고 약을 받았어요.
'괜찮아질 거다'라는 의사 말에도, 돌방구네는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아 보였어요.
그날 밤 꿈에 남편을 봤다고 하더군요.
'담배를 못 피운 지 여드레째다'며 상방을 없앤 걸 원망했다나요?" (한숨을 내쉬며)
"그런데, 그 꿈이 점점 그녀의 병을 더 키운 것 같았어요."
(무대는 다시 돌방구네의 집으로 바뀌고, 딸들이 무당을 데려오는 장면이 펼쳐진다. 여신도회장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이고, 그 딸들이요. 결국 무당을 불러 살풀이까지 했답니다.
징 소리가 울리고, 굿판이 벌어졌어요. 그제야 돌방구네가 조금씩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죠."
(무당의 굿 장면을 잠시 바라보다가 관객을 향해 돌아선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살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면, 남편의 상방을 없앤 죄책감을 덜고 싶었던 걸까요?"
(무대가 천주교회 입구로 바뀌고, 돌방구네가 교리문답을 들고 성당으로 가는 장면이 보인다. 여신도회장은 무대 중앙으로 나와 말한다.)
"며칠 뒤, 돌방구네는 다시 성당으로 나섰습니다.
완전한 영세교우는 되지 못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배급을 받으러 성당을 오갔습니다.
배급을 받는 동안만이라도, 그녀는 천주교 신자였던 겁니다."
(부활절 새벽 종소리가 울린다. 여신도회장은 잠시 침묵하다 마지막 말을 던진다.)
"돌방구네는 여전히 신앙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사람입니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애달프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 그럴지도 모르죠. 돌방구네처럼."
(조명이 서서히 꺼지고, 여신도회장이 무대를 떠난다. 부활절 종소리가 한동안 울리다가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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