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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와 희곡

모노드라마: 달빛 속의 진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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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드라마: 달빛 속의 진노인


배경


무대는 단출하게 구성된다. 움막처럼 보이는 초라한 방 한 칸과 작은 창문이 보인다. 무대 중앙에는 대나무로 만든 허름한 등 없는 의자가 놓여 있고, 달빛처럼 은은한 조명이 무대를 감싼다. 무대 뒤편에는 보리밭과 대송나무가 그려진 배경화면이 있다.


등장인물


진노인 (독백의 화자)


서막


(무대가 어두워진 상태에서 은은한 달빛이 서서히 비추기 시작한다. 진노인이 무대 중앙의 의자에 앉아 곰방대를 들고 있다.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꺼낸다.)

진노인:

(한숨을 내쉬며)
"아이고, 이 팔자가 웬 꼴이냐… 나이 육십에, 이 꼬락서니로 사는 게 사람이 할 짓인가."
(곰방대를 입에 물며, 손을 떨다가 담배를 피우는 흉내를 낸다.)
"내가 원래는 영산포읍내에서 지물상을 했었지. 잘 나가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육이오 폭격 한 방에 집도, 재산도 다 날려먹고… 아들놈은 인공에 붙어 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나는 이렇게, 움집에서 며느리랑 손주들이랑 거지꼴로 사는 신세가 되었구나."

(머리를 잡으며 잠시 침묵.)
"며느리? 아이고, 그 애도 고생이 많다. 낮에는 장을 나가서 생강, 미역, 멸치 같은 걸 팔러 다니고, 밤에는 손주들 밥 챙기고 나까지 챙기느라… 그 힘든 꼴을 내가 다 본다니까."
(잠시 미소를 지으며)
"손주들 말이야. 아홉 살짜리 놈, 일곱 살짜리 계집아이. 아직은 나무도 못 모아 오는 애들이라 며느리한테 혼나기 일쑤지. 그 꼴을 보면 내가 나서야지 싶다니까."

(곰방대를 내려놓고 의자에 기대며 고개를 젖힌다. 한숨을 쉰다.)


며느리에 대한 생각


(조명이 움집 내부처럼 은은하게 변한다. 진노인이 의자에 앉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진노인:

"며느리가 요즘 부쩍 밤늦게 돌아온다. 뭐, 곡성장을 갔다 늦는 거겠지 하고 말았는데…"
(머뭇거리며)
"지난번에는… 달빛이 환하던 날, 밖에서 오줌동이에 소피를 누는 소리에 잠을 깼다. 하긴, 그런 소리도 못 들을 정도로 푹 자는 게 나았을 텐데… 내가 잠귀가 밝아서 그런지, 그 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리던지."
(작게 웃으며)
"아이구, 내가 뭐라고 이런 걸 신경 쓰는지 모르겠다. 밤마다 잠을 설친다니, 이 꼴도 참…"

(고개를 떨구며 잠시 침묵. 고개를 들며 주변을 둘러본다.)

진노인:

"그런데 요즘은 말이야, 며느리가 밖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더 늦어졌다. 내가 왜 이렇게 신경을 쓰는 걸까? 혹시… 남편 생각에 울적해진 건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달빛이 비치는 창을 바라보며)
"달빛이 이렇게 밝은데… 남편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달빛 아래에서


(조명이 달빛으로 바뀐다. 진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무대를 걸어 다니며 혼잣말을 이어간다.)

진노인:

"달빛이 너무 밝으니까 잠이 안 온다. 밖에 나가보면 보리밭이 달빛에 부서지고, 대송나무 아래는 희끄무레하게 빛나고 있다. 그런데…"
(걸음을 멈추며)
"며느리가 대송나무 아래에서… 누군가와 함께 있는 걸 봤다."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쥔다.)
"그 사내, 양서방이라고 했던가. 그놈이랑 며느리가 달빛 아래서…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군."

(잠시 침묵, 고개를 떨구며)
"처음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놈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더라. 며느리가 외로워서… 그럴 수도 있겠지. 나라도 며느리를 이해해야 하지 않겠나."

(다시 걸음을 옮기며 조용히 혼잣말을 이어간다.)
"하지만, 내가 이해한다고 해서 이 마음이 편안해지는 건 아니더구나. 아이고, 이게 사람 마음인가 보다."


아들의 귀환


(조명이 더욱 어두워지고, 진노인이 읍내길을 걷는 듯한 장면이 연출된다. 조명은 달빛처럼 무대를 희미하게 비춘다.)

진노인:

"어제도 며느리가 늦더니, 오늘은 아예 돌아오지 않겠단 듯했다. 그래서 나는 달빛 따라 읍내길로 나섰지. 그런데…"
(놀란 표정으로)
"그 길에서… 이두, 내 아들을 만났다. 산에서 내려와 형기를 마치고 돌아온 길이라고 하더라."

(잠시 멈춰 서서 고개를 떨군다.)
"아들이 나를 보며 그러더군. ‘아버지, 저게 누구냐’ 하고. 달빛 아래서 며느리와 양서방이 서 있는 걸 본 거지.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했겠나."
(떨리는 목소리로)
"‘너 없는 대신 나를 섬긴 사람들이다.’ 그렇게 말했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결말


(조명이 점차 어두워지며 진노인은 천천히 의자에 다시 앉는다. 곰방대를 들어 담배를 피우는 흉내를 내며 고개를 젖힌다.)

진노인:

"달빛은 모든 걸 품어준다더니… 정말 그렇구나. 내 아픔도, 며느리의 고독도, 이두의 잘못도, 양서방의 손길도… 다 품어주는구나."
(달빛을 올려다보며)
"그래, 이젠 됐다. 며느리와 양서방이 함께 살게 된다면… 그게 나쁜 일은 아니지 않겠나. 아들도 돌아왔으니… 이제 난, 그저 이 달빛 아래에서 이 늙은 몸을 쉬면 되는 게야."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며 베토벤의 월광이 흐른다. 진노인이 곰방대를 손에 든 채 고개를 떨군다. 막이 내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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