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드라마: 어린 남매, 여자 아이의 독백
(무대는 텅 빈 어둠 속, 소녀의 목소리가 잔잔히 흐른다. 그녀는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온다. 손에는 낡은 보자기, 그 안에 족보가 있다. 소녀는 잠시 멈춰 서서 관객을 바라본다.)
여자 아이
난 올해 열둘. 내 이름이 뭐냐고? 그냥 여자 아이라고 불러도 돼요.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준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요.
(고개를 숙이며)
우리 아빠랑 엄마는 나와 내 동생, 길주를 외할머니 집으로 보내셨어요. 이거 하나만 잊지 말라면서요.
(보자기를 들어 올린다.)
이 안에 있는 족보. 우리 집안의 이름과 뿌리가 적힌 족보. "혹시 우리가 돌아오지 않으면, 이걸로 너희 일가를 찾아가라."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한숨을 쉰다.)
근데… 외가도 무사하지 못했어요. 무정한 전쟁은 모두를 엉망으로 만들었어요.
(손을 꼭 쥐며)
길주는 겨우 아홉 살이에요. 걷는 것도 힘들고, 배고프면 짜증만 내요. 그래도 기특한 동생이에요. 내가 하라는 대로 다 따라요.
(미소를 지으려 하지만 떨리는 입술을 멈추지 못한다.)
나는 동생을 보호해야 해요. 엄마가 그랬으니까요. "길주야, 괜찮아. 곧 집에 도착할 거야." 난 이렇게 말해야만 해요. 내가 무너지면, 길주는 어떻게 하겠어요?
(주위를 둘러보며)
어제 짐바리꾼 아저씨가 고맙게도 우리를 20리나 태워줬어요. 고갯길을 넘을 때, 우리도 밀었어요. 아저씨는 착한 분이었죠. 하지만, 이 고갯길을 지나면 또 누굴 만날지 몰라요.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른다.)
어젯밤엔 정말… 정말 무서웠어요. 초가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죠.
"쥔 양반, 하룻밤만 재워주세요."
그런데 돌아온 건 차가운 대답뿐이었어요. "잘 데 없다."
(고개를 들어 관객을 바라보며)
그래서 외양간에서 잤어요. 거적때기를 깔고 길주를 품에 안았어요. 그리고… 품속에 남겨둔 누룽지를 꺼냈죠.
"아, 해봐."
길주는 내가 아침에 얻은 누룽지를 남겨뒀다는 걸 알고 깜짝 놀라더라고요. 하지만 난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혹시라도 배고플까 봐…
(손을 뻗어 허공을 쓰다듬는다.)
길주가 묻더라고요. "누나도 좀 먹어."
그런데 난 괜찮았어요. 아니, 괜찮은 척했어요. 길주가 힘을 내야 하니까요.
(다시 주저앉아 관객을 바라본다.)
이 길이 끝나면, 정말 집에 도착할까요? 엄마랑 아빠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아니면… 길주가 말했던 것처럼… 그분들도 우리 외가처럼 사라졌을까요?
(한숨을 내쉰다.)
아니요. 그런 생각하면 안 돼요. 이 족보가 있잖아요. 이 족보가 우리를 지켜줄 거예요. 우리를 다시 우리 집으로 데려다줄 거예요.
(관객을 바라보며 담담히)
길주는 오늘도 내 뒤를 따라올 거예요. 배고프다고 칭얼대고, 발이 아프다고 투정하겠죠. 하지만 난 그 애를 안심시킬 거예요. "곧 도착할 거야."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보자기를 다시 감싸 쥔다.)
난 열둘이에요. 그리고 난 여자 아이예요. 누군가 나를 기억해준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쇼팽의 녹턴이 다시 흐른다. 여자 아이는 무대를 천천히 떠난다.)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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