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드라마: 모밀밭에서
(무대 중앙. 남편 역의 배우가 등장한다. 허름한 농사꾼 옷을 입고 있고, 괭이를 짚은 채 무거운 표정으로 무대를 서성인다. 배경은 무등산이 보이는 영산강 들판이다. 희미한 새소리가 들리지만, 긴장감을 주는 폭격음이 멀리서 희미하게 들린다.)
(남편이 괭이를 땅에 세운 채 관객을 바라본다. 목소리는 침착하지만 묵직하다.)
남편
"이게 내 땅이오. 대대손손 물려받은, 우리 조상들의 땀이 배어 있는 땅이지. 여기서 벼를 심고, 모밀을 심고, 다시 뽑아내고… 이 땅이 우리 삶을 이어줬소. 나는 이 흙냄새를 맡으며 자랐소. 그런데…"
(그는 고개를 떨군다. 손으로 괭이자루를 쓰다듬으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런데…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게 참 어렵소. 전쟁이라니. 이게 뭔지… 농사꾼인 우리가 왜 이렇게 불안에 떨며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소."
(그는 다시 고개를 들고 먼 곳을 바라본다. 무등산이 있는 쪽을 가리키며 관객에게 말한다.)
"저기 무등산이 보이시오? 구름 한 점 걸려 있는 저 산이 우리 삶에 평화를 가져다줄 것 같지만… 평화는커녕 불안만 가득하오. 하늘에 쌕쌕이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소. 난 그래도 괜찮은데… 우리 아내는, 우리 애들은… 얼마나 무서울까?"
(그는 손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표정이 잠시 누그러지며 미소를 띤다.)
"우리 아내 말이오. 참 곱고, 참 좋은 사람이오. 우리 집안의 기둥이요. 늘 애들을 걱정하면서도 꿋꿋하게 나를 도와주는 그런 사람이오. 어제도 그랬소. 우리가 없는 사이, 우리 애들끼리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더군. 인구는 여섯 살이고, 인자는 네 살이지. 둘이 얼마나 다정한지 몰라. 그런 걸 보면… 참 행복했소."
(그는 웃으며 괭이를 들어 땅에 대보는 시늉을 한다. 하지만 곧 다시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런데… 행복이란 게 참 짧더이다. 이런 세상에서 오래갈 리가 없소."
(폭격 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는 괭이를 내려놓고 허공을 올려다보며 움찔한다.)
"저놈의 쌕쌕이가 또 날아다니는구먼. 아무리 그래도 밭에까지 폭격을 하겠소? 그래도 마음은 불안하오. 아내도 그랬소. 오늘 아침에 나와 밭을 매다가도 애들 걱정만 하더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폭음이 들리자마자 집으로 뛰어가더이다. 내가 말렸지만, 말을 들을 리가 있소?"
(그는 괭이를 다시 짚고 밭을 쓸어보는 시늉을 한다. 하지만 손이 떨리고, 괭이를 내려놓는다.)
"그렇게 뛰어나가더니…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소. 나는 괭이질도 제대로 못하고 호미로 손이나 찍으면서 애타게 기다렸소. 그러다 아내가 집에 다녀와서 말하더이다. 애들은 무사하다고. 그 말에 한시름 놓았지만…"
(그는 관객을 똑바로 바라본다. 목소리가 낮아지고, 감정이 서려 있다.)
"아내는 참 다급했소. 맨발로 뛰쳐나갔다가 발이 온통 상처투성이였소. 나 보고는 걱정 말라고 하더이다. 그런데… 그런데…"
(폭격 소리가 갑자기 크게 울린다. 그는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고개를 떨군다. 잠시 후 손을 내리고, 어딘가 허공을 바라본다.)
"아내가… 아내가 내 앞에서 쓰러졌소. 쌕쌕이에서 쏟아지는 총탄에 아내가 피투성이가 되었소. 나만 나 두고 그렇게…"
(그는 무릎을 꿇고 괭이에 머리를 기대며 흐느낀다. 눈물을 닦으면서도 다시 고개를 들고 말을 이어간다.)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소. 아내가 내 품에 안겨 고개를 떨구었을 때… 무등산은 여전히 고요하게 내려만 보더이다."
(그는 한 손으로 괭이를 잡고 일어선다. 표정은 결의에 차 있다. 무대 중앙으로 걸어나와 관객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말한다.)
"나는 이 땅을 지키겠소. 아내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겠소. 아무리 가난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내 아이들만은 살려야 하오. 이 땅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살아남는 것뿐이오. 이 아이들이라도 살아남아, 우리처럼 살지 않게 해 주겠소. 그것만이… 그것만이 내가 아내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약속이오."
(그는 괭이를 어깨에 메고 천천히 무대 뒤로 걸어간다. 무대에 어두운 조명이 드리워지고, 멀리서 쌕쌕이 소리가 희미하게 사라진다. 무등산 위로 구름이 한 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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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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