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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와 희곡

모노드라마: 문평댁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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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드라마: 문평댁의 독백

화자: 문평댁


(무대 중앙에 문평댁이 서 있다. 주변에는 겨울의 애송이골 풍경이 펼쳐져 있다. 그녀는 고운 저고리 위에 헐거운 외투를 걸치고, 천천히 객석을 바라보며 말을 시작한다. 표정은 담담하지만, 깊은 회한과 희망이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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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평댁

내 이름이 문평댁이라지요.
뭐, 사실 이름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내가 살던 동네 이름으로만 나를 부르곤 했소.
이제 남편도 없고, 친정도 없으니
이 이름마저 내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어요.

유복자네 성님, 동강댁 성님과 함께 이 애송이골에서
우린 서로를 위로하며 지내왔어요.
세 명의 홀어미, 뚝보에게 외짝이라 불리는 우리.
참, 외롭고 쓸쓸한 이름이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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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평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손끝으로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투에 약간의 웃음을 섞는다.)

큰성님 유복자네는 아이가 하나 있소.
유복자.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부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지요.
큰성님은 늘 강한 척하지만,
그 아이가 그녀를 지탱해주는 것 같아요.

가운데성님 동강댁은 친정이 무난하니
어디든 돌아갈 곳이 있다지만…
그 마음 한쪽은 늘 흔들리고 있다는 걸,
나는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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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평댁은 잠시 멈추고 먼 곳을 바라본다. 시선이 갈대밭 너머 강물에 머문다.)

그리고 나, 문평댁.
나는 누구에게 기댈 곳조차 없소.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의지할 친척도 마땅치 않으니,
이 애송이골이 내 마지막 안식처였던 셈이지요.

처음엔, 이곳에서 혼자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소.
성님들과 웃고 떠들며 고사리나 씻고,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줄 알았지요.
그런데… 마음이 자꾸만 허전하고 추워지는 건 어쩔 수 없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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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평댁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그녀의 시선은 뚝보가 사라진 강 건너편을 향한다. 목소리엔 미묘한 감정이 묻어난다.)

뚝보 양반.
박선달댁 머슴으로 십 년 넘게 살던 그 사람.
늘 무뚝뚝한 표정으로 곰방대를 물고,
우리 외짝네들을 놀리던 그 양반.

"작은외짝. 뭐가 그렇게 바쁜가?"
그가 나를 그렇게 부를 때면,
부끄럽기도 했지만,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했소.

어느날부터
뚝보 양반에게 의지하고 싶어지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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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평댁은 손끝으로 치마를 잡아 올리고, 객석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간다. 말투는 점점 더 확신에 차지만 부드럽다.)

그런데 어느 날,
뚝보 양반이 나를 찾았소. 애송이골을 떠나기로 했다 하지 않소.
"세밑 전에 떠난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맘이 급해집디다.
다짐을 했소. 따라 가기로.


---

(문평댁은 천천히 무대 끝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강 너머를 향하고 있다.)

나는 유복자네 성님과 함께 나루터에 갔소.
유복자네 성님은 끝까지 내 손을 잡고,
"문평댁, 가서 잘 살아보소."
하고 말했지요.

유복자네 성님은 맘도 넓어요.
자신도 마음에 둔 뚝보 양반이었는데.

강물 너머 갈대밭 속에서
뚝보 양반이 내게 손을 흔드는 모습이
유복자네 성님은 애써 외면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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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평댁은 배경에 비친 영산강 풍경을 바라본다. 달빛 아래 반짝이는 물결과 갈대밭이 스크린으로 비쳐진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객석을 바라보며, 담담하지만 따뜻하게 말을 맺는다.)

나, 문평댁.
강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는 그 사람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려 합니다.

유복자네 성님, 동강댁 성님…
두 분도 부디 잘 사시길.
우리 모두,
서로의 길을 찾아가면서…
행복을 조금씩 붙잡아가길 바랍니다.

(문평댁은 천천히 무대 뒤로 걸어가며, 갈대밭 너머로 모습을 감춘다. 배경 음악이 흐르고, 막이 내린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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