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드라마: 뚝보의 독백
화자: 박선달네 머슴, 뚝보
(무대 중앙에 뚝보가 등장한다. 겨울의 황량한 애송이골을 배경으로, 지게를 한쪽에 내려놓고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있다. 천천히 관객을 향해 고개를 든다. 말투는 담담하지만, 속내가 깊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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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보
사람들은 나를 뚝보라 부릅디다.
무뚝뚝하다 해서 붙인 이름이겠지만,
내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본 사람은 없지요.
그래, 나는 박선달네 머슴.
십 년 넘게 이 집을 보며 살았소.
땅을 일구고, 나무를 패고,
소에게 죽을 끓여주는 게 내 일이었지요.
이 애송이골에서 나는
단순히 사는 게 아니라,
그저 버티며 살아왔던 거요.
그런데,
이 동네 외짝네들,
유복자네, 동강댁, 문평댁을 만나면서
가끔은 가슴이 따뜻해지곤 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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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방대를 내려놓고 먼 산을 바라본다. 목소리는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유복자네.
큰외짝.
그 여인은 나를 종종 흘겨보면서도,
속으론 다정했소.
"담배나 한 대 내놔."
그렇게 말하면,
툴툴거리면서도 담배를 내놓곤 했지요.
그 담배 한 대에 묻은 따뜻함이,
가끔은 날 위로해줬소.
동강댁.
가운데외짝.
말은 적어도 속 깊은 사람이지요.
"뚝보 양반,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까요?"
그녀의 조용한 목소리를 들을 때면,
나도 이따금 내 삶을 돌아보게 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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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보는 잠시 멈춘다. 표정이 복잡해지며, 천천히 문평댁을 떠올린다. 목소리에 약간의 미소가 스친다.)
그리고…
문평댁.
작은외짝.
그녀는 늘 밝고 활발했소.
내게도 거리낌 없이 다가와서
"뚝보 양반, 오늘 나무 많이 하셨소잉?"
하고 말을 붙이곤 했지요.
그녀의 웃음은 참 희한하게 사람 마음을 흔들었소.
어쩌면…
그녀가 내게 가끔 특별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오.
하지만 난 그저 머슴이고,
머슴이 가진 마음은
말로 내뱉지 않는 게 더 나을 때도 있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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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보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둘러본다. 무대는 애송이골의 쓸쓸한 겨울 풍경으로 채워진다.)
이제 탈상이 끝났소.
세 외짝네도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날 준비를 하는 것 같소.
큰외짝은 아마도 유복자 하나만으로도
평생을 살아갈 힘이 있을 거요.
가운데외짝은 친정이 있으니
거기서 다시 새 삶을 꾸릴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작은외짝…
문평댁은 어디로 갈까요?
그녀는 가끔 내게 말했소.
"뚝보 양반, 그냥 같이 살면 안 되겠소?"
하지만 나는 그저 웃으며 넘겼소.
다른 외짝에 비해 문평댁이 안쓰럽기는 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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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보가 지게를 짊어진다. 목소리는 더 단단해지지만, 미묘한 감정이 배어 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떠나기로 했소.
박 선달댁과 이 애송이골을 떠나,
영산강 저편으로 가기로 했소.
거기서 새로운 일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꾸릴 생각이오.
문평댁이 내게 말을 건네던 날,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알았소.
그녀는 혼자서는 길을 찾기 어렵다는 걸.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기로 한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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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뒤로 영산강이 흐르는 풍경이 나타난다. 갈대밭 사이로 강물이 반짝이고, 뚝보는 천천히 무대 끝으로 걸어간다. 그의 뒷모습이 고요히 사라지며, 배경에 문평댁과 유복자네가 나루터에서 이별을 나누는 모습이 비친다. 문평댁은 천천히 나룻배에 오른다.)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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