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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와 희곡

모노드라마: 오유권 원작, 혈(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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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드라마: 혈(穴)

화자: 엄시우

(무대 중앙, 엄시우가 무덤가에 홀로 서 있다. 검은 양복을 입고 묘를 바라보며 침묵한다. 조명이 점차 밝아지며 그가 관객을 향해 고개를 든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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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시우

사람이 평생 짊어져야 할 무게가 있다면…
나는 내 조상의 무게를 짊어진 사람이오.
우리 집안은 오대독자.
나는 그 종손이외다.
아버지의 묘를 지키는 것이 내 몫이고, 내 사명이었소.

(묘를 천천히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을 이어간다.)

내 아버지… 엄상렬.
면장을 지내며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았던 분.
하지만 그 아버지의 마지막 잠자리가 남의 땅 위라면…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천천히 관객을 향해 걸어오며)

그러나 대를 잇기 위해 이 자리를 잡은 거요.
풍수를 불러 2개월을 헤맸소.
결국 황풍수가 이곳을 명당이라 했소.
땅의 기운을 받아 자손이 번창할 자리라 했소.

(손을 허리춤에 얹으며)

하지만, 문제는… 이곳이 최씨네 선산이라는 거였소.
알면서도 우리는 묻기로 했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집안의 대가 끊길 것 같았으니까.

(잠시 멈추고 고개를 숙인다. 긴 한숨 후, 목소리가 낮아진다.)

묘를 쓰는 날, 난 다 알고 있었소.
최씨네가 들고 일어날 걸.
그리고 정말 그랬소.

(분노에 차올라 소리를 지르는 최씨네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듯 제스처를 취한다.)

“당장 파내라!”
“남의 선영을 짓밟아 놓고 무슨 면목으로 살아갈 셈이냐!”
그 소리에 내 귀가 멍멍했소.
내 외숙과 처당숙이 나섰지만, 그들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소.

(손으로 관객을 가리키며 말한다.)

당신 같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겄소?
난 그저 조용히…
모두를 설득하려 했소.
“이왕 이렇게 된 일, 사정 좀 봐주시오.”

(고개를 돌리며 독백하듯.)

결국 계약서를 썼소.
삼 개월 뒤에 이장하겠다는 약속으로.
최씨네는 그것에 응했지만, 그들의 눈엔 분노가 가득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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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진다. 엄시우가 집 안방에서 시우 아내와 대화 중인 모습이다. 그는 아내의 말에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관객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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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시우

우리 아내…
내가 부족한 걸 잘 알지요.
“그렇게 약해서 어찌 종손 노릇을 하겄소?”
“남의 체면 따지다가 우리 집안 다 망칠 텐데.”

(손으로 머리를 쓸어내리며)

그래도 난 아내의 말을 들을 수 없었소.
다투고 싶지 않았소.
이 일을 조용히 마무리하고 싶었으니까.

(관객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한다.)

하지만 내가 잠든 사이, 아내는 움직였소.
내 허락도 없이… 최씨네 묏을 팠다오.
장수산으로 몰래 옮겨버렸다지 뭐요.

(잠시 침묵. 고개를 숙이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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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시우

다음 날 아침.
최씨네가 우리 집을 찾아왔소.
칼을 들고, 몽둥이를 들고.
내 멱살을 잡고 묻더이다.
“너희가 우리 조상의 묘를 팠냐?”

(큰 소리로 말하며 관객을 향해 손을 내뻗는다.)

난 아니라고 했소!
난 몰랐다 했소!
사실 난 모르는 일이었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오.

(천천히 걸으며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내의 일이 드러났을 때, 난 너무도 난감했소.
최씨네가 우리를 고소했지요.
재판정에서 아내는 모든 걸 털어놓았소.
“이 묏을 지켜야 우리 집안에 자손이 생길 것 같아서…”
그렇게 울먹이며 말했소.

(관객을 응시하며)

그 말을 듣던 재판관이 물었소.
“남편과 의논했냐”고.
아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지요.
“남편도 몰랐소. 나 혼자 결정한 일이오.”라고 하더이다.

(잠시 멈추고 깊은 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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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시우

결국 재판은 무죄로 끝났소.
최씨네도 더 이상 우리를 몰아세우지 않았소.
아내 등에 업힌 아이가 방긋 웃으며…
모든 걸 말없이 끝내버렸소.

(관객을 향해 손을 뻗으며)

하지만…
난 아직도 이 일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소.
묏자리 하나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어그러질 수 있다니.
내가... 더 나은 방법을 찾았어야 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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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이 점차 어두워지며 그는 묘를 돌아보며 마지막 말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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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시우

묏자리는 중요하다지요.
하지만, 사람의 자리는 더 중요하지 않겄소?

(그는 묘를 쓰다듬고 무대를 천천히 떠난다. 조명은 완전히 꺼지고,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가 흐르며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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