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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와 희곡

모노드라마: 오유권 원작, 호식(虎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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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드라마: 호식(虎食)

화자: 꺽쇠

(무대 중앙, 꺽쇠가 칼을 갈고 있다. 칼날이 숫돌에 닿을 때마다 날카로운 소리가 무대를 채운다. 조명이 서서히 밝아지며 꺽쇠가 관객을 향해 고개를 든다.)


꺽쇠

(칼 가는 동작을 멈추고 관객을 바라보며.)
내 손에 이 칼을 쥔 지 벌써 몇 해냐…
소 잡고, 개 잡고… 이게 내 팔자란 거, 부정할 수 없지.
내 아버지 대부터 이 일이 대물림된 거니까.

(칼을 내려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관객에게 다가가며.)

내 아버지?
내겐 얼굴도 이름도 생소한 분이요.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
“네 애비는 호랑이 밥이 됐다.”
아버지가 호식(虎食)을 당했다지.
그게 어머니 말로는 내일 딱 사십 년 전이란다.

(잠시 침묵하며 칼을 들어 올린다. 칼날을 응시하며 독백하듯.)

이 칼…
내가 물려받은 건 이 칼뿐이었소.
이 칼이 내 손에 들린 순간부터 내 팔자도 정해진 거요.
이제는 그저 내 아들만큼은…
이 길을 걷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오.

(칼을 내려놓고 천천히 뒤로 걸어간다. 조명은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며 장면 전환. 꺽쇠가 지게를 지고 느티나무 고개를 올라가고 있다. 잠시 숨을 고르며 관객을 바라본다.)


---

꺽쇠

이 고개를 넘으면 아버지 제삿날에 올릴 제물이 준비된다.
고기 두 근, 북어 두 마리, 밤 한 움큼, 대추 몇 개…
이 정도면 됐다 싶었소.

(잠시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본다.)

근데 웬일이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이 지경까지 왔구먼.
(주변을 둘러보며) 저기, 다복솔 아래로 비를 피해야겠다.

(조명이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진다. 꺽쇠와 노인이 나란히 서서 비를 피하고 있다. 관객을 향해 이야기하듯.)

이 노인, 참 우습더구먼.
갓이 헐렁해선 걸을 때마다 우쭐거리질 않나,
내 지게에 대롱거리는 북어 두 마리 보며 웃질 않나.
내 속으론 이 노인에게도 뭔 사연이 있겠지 싶었소.

(비가 그치고 두 사람이 주막에 들어선다. 꺽쇠는 화롯가에 앉아 막걸리를 마신다. 술잔을 들어올리며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

꺽쇠

여기 앉아 막걸리 한 잔 들이키니, 그간 쌓인 피로가 스르르 녹아내리더이다.
근데 저 노인…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발에 무언가를 문지르더니,
이놈의 ‘이’를 잡는 거 아니겠소?

(손으로 코를 막으며 고개를 돌리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그 냄새… 참 형언할 수 없었소.
그래도 뭐, 나도 백정인데, 어찌 남을 탓하겠소?

(노인을 화롯가로 불러 앉히고 술 한 잔을 건네는 제스처를 취한다.)

“노인 양반, 여기 한 잔 드이시지요.”
그리곤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소.
이 노인, 내 고향이니 뭐니 하며 사십 년 전에 떠나온 얘길 꺼내는데…
어쩐지 내 가슴이 묘하게 울리더이다.


---

꺽쇠

(잠시 무대 뒤편으로 걸어가며 독백.)

사십 년 전, 고개 너머 큰 느티나무 밑…
그곳에서 내가 태어났다는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소.
그때 그 머슴이 혹시… 내 아버지인가?
그 노인이 내 아버지인가?

(고개를 저으며 술잔을 다시 들고 마신다. 관객을 향해 고개를 들며 말한다.)

근데, 내가 그런 생각은 왜 하겠소?
이미 늦은 일이오.
나는 그냥, 내 몫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야 할 뿐이오.

(조명을 점점 어둡게 만들며 독백.)

호식이든 뭐든,
이제는 내가 묻고 싶지도 않소.
그냥 내일 제삿날, 아버지께 고기 한 점 올리고 술 한 잔 따르며…
그걸로 내 할 일을 끝낼 거요.

(천천히 무대 뒤로 걸어가며 마지막 말을 남긴다.)

그런데도 말이오…
사람이란 게 참, 희한하게…
속 깊은 데선 뭔가 자꾸만 울리더이다.

(조명이 완전히 어두워진다. 음악이 흐르며 공연 종료.)

음악: Ludovico Einaudi - Nuvole Bianche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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