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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와 희곡

모노드라마: 오유권 원작,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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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드라마: 소문

화자: 나주댁

(무대 중앙. 나주댁이 툇마루에 앉아 누룩을 추리고 있다. 조명이 켜지며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관객을 향한다. 차분하지만 깊은 울분이 담긴 목소리.)


나주댁


내가 이럴라고 살았을까… (한숨)
스무 살에 남편을 잃고, 혼자 딸 선애 하나 키우느라 내 인생 다 바쳤소.
허드렛일도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하고, 꾸정물 나는 옷은 꿈에도 입히지 않았소.
혼자 키워온 내 딸… 내 선애…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내 아이.
그런데… 그런 애한테 지금 무슨 누명이 씌워졌는지 아시오?

(잠시 관객을 응시하며 침묵. 가슴을 억누르는 듯 숨을 고르며 말을 이어간다.)

어젯밤 떠벌네 그년이 동네 모임에서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아시오?
우리 선애가 안골 반장네 머슴이랑 무슨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그놈의 혓바닥! 뭘 봤다고 그렇게들 떠들고 다닌대요?

(자리에서 일어서며 천천히 무대를 걸어 다닌다. 관객을 둘러보며 강하게 말한다.)

그게 뭔 줄 아시오? 납세고지서요.
머슴이 납세고지서를 선애한테 건네준 걸 그년이 봤다는 거요.
처음엔 우리 선애가 그걸 받지도 않으려 했어요.
그걸 억지로 떠맡긴 걸 보고선, 뭘 꾸몄네, 내통했네 하면서 소문을 퍼뜨린 거요!

(손을 들어 가슴을 두드리며 깊은 울음을 꾹 참는 모습.)

이 동네 사람들, 참 못됐소.
내 딸, 애지중지 키운 내 딸한테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다니…
그 소문이 어디까지 갔는 줄 아시오?
혼삿말까지 나왔던 시냇골 사돈네 귀에까지 들어갔다오.

(고개를 들고 한 손을 들어올려 단호하게 말한다.)

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소. 떠벌네 그년을 찾아갔지.
“판례 엄니, 우리 선애가 뭘 받았다고 했소?” 하고 물었소.
그런데 그놈의 시치미. “내가 그런 말 한 적 없다” 하질 않나.
그러면서도 끝까지 내 딸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발버둥 치더란 말이오.

(걸음을 멈추고 관객을 바라보며 비통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얼마나 억울했는지 아시오?
눈물겹게 키운 내 딸…
혼삿말까지 나왔던 내 딸이 동네 입방아에 오르내리다니.
그러면서도 남들은,
“나주댁이 깨끗하면 가만히 있을 일이지, 왜 떠들고 다니냐”고 해요.
그래요. 내가 떠들었소. 내 딸을 변호하려고, 억울함을 풀려고…

(갑자기 소리를 낮추며 관객에게 다가간다. 낮고 절박한 목소리.)

근데 그게 더 화근이었소.
사돈네는, “동네 사람들 입을 막으려고 술판을 벌였다” 하더이다.
이게 다 떠벌네 그년 때문인데, 나주댁 잘못이라고들 하더이다.

(잠시 침묵. 무대 한가운데에 선 채 고개를 숙이고 말을 잇는다.)

머슴이 섬에서 돌아와 떠벌네한테 물었답디다.
“내가 고지서밖에 뭘 줬다고 그런 말을 퍼뜨렸소?”
떠벌네 그년, 뭐라고 했는지 아시오?
“내가 잘못 말했는갑소.”

(고개를 천천히 들며 관객을 똑바로 응시한다.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

잘못 말한 걸로 끝날 일이었소?
내 딸의 명예가, 내 평생 살아온 삶이, 그놈의 혓바닥 하나로 이렇게 무너졌소.
소문이란 게 참 우습소. 시작은 한마디 말이었지만, 끝은 이 마을을 휩쓸었소.
내 딸 혼사는 깨졌고, 우리 집엔 이제 웃음기가 없소.

(천천히 뒤돌아 걸어가며 마지막으로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그 소문… 여러분도 들어보셨겠지요.
하지만 기억하시오. 소문은 항상 그 자리에선 멈추지 않는 법.
언젠가 그 소문이 누구의 집 대문을 두드릴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오.

(무대 조명이 어두워진다. 나주댁은 고개를 숙인 채 무대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간다.)


(소문이 웅얼거리는 음향이 배경으로 흐르며 공연 종료.)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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