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드라마: 앵두나무집의 마지막 밤
(무대 중앙에 앵두나무가 서 있고, 그 아래 작은 나무 의자가 있다. 나이든 노인이 의자에 천천히 걸터앉아 깊은 한숨을 쉰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머리를 숙인 채 말을 시작한다.)
노인:
(아주 낮은 목소리로)
300년이야… (고개를 젖히며 하늘을 바라본다) 우리 가족이 이 땅을 지켜온 게 300년이 넘었지. 이 앵두나무도, 여기 냇가도, 저 멀리 보이는 산까지도 다 우리의 것이었는데. 그런데… 이 전쟁이, 이 세상의 이치가, 다 날려버리는구나.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한숨을 쉬며 천천히 앵두나무를 쓰다듬는다.)
노인:
이 앵두나무 아래에서 손주 녀석들 뛰어놀던 모습이 어제 일 같은데… 그 앵두를 따 먹던 그 애들, 그 웃음소리… 이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떠나야 하니까… 이 터전을, 이 모든 걸 뒤로 하고 가야 하니까.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멍하니 앵두나무를 바라본다. 다시 고개를 들고 관객을 향해 말을 건넨다.)
노인:
사람들이 그러더군. 밤사람이 찾아온다, 산사람이 찾아온다… 누구 편이냐고 물어보더라. 편이라…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냐? 난 그저 손주 녀석들만은 지켜야 했어. 밤사람에게 쌀을 바치고, 경찰에게는 협조를 약속했지. 그랬기에 이렇게 살아남았어… 이 꼴로 살아남았다고.
(조용히 웃으며 슬픈 눈빛으로 앵두나무를 바라본다.)
노인:
내 아들과 며느리… 두 사람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끌려갔었지. 아들은 경찰에, 며느린 산사람들에게… 목숨을 건져 겨우 돌아왔지만… 내가 그들의 눈을 볼 수가 없었어. 무엇을 위로해야 할지… 아니, 내가 무슨 자격으로 위로를 할 수 있겠나. 아비 노릇, 시아버지 노릇 제대로 하지 못한 내가…
(고개를 숙이며 슬픈 목소리로 혼잣말하듯)
노인:
우리가 무얼 잘못했길래… 이 고향 땅이 이렇게 피로 물들어야 하는지. 앵두나무야, 넌 알고 있겠지. 우리가 왜 이렇게 떠나야 하는지… 이 땅을, 이 나무를 버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그저 정처 없이 떠돌아야 하는 거겠지.
(잠시 침묵 후, 한숨을 내쉰다. 천천히 무대 한쪽을 향해 손을 뻗으며 관객을 향해 고개를 든다.)
노인:
손주들… 그 애들이 나 때문에, 나의 결단 때문에 이렇게 뿌리째 뽑히는 걸 두고 볼 순 없어.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지라도…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저 그 애들이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찾게 해주는 거겠지. 내겐 그거면 충분해.
(다시 고개를 떨구고 앵두나무 아래에 무릎을 꿇는다. 두 손을 앵두나무 아래에 올려놓고 천천히 속삭인다.)
노인:
앵두나무야, 여기 네가 남아 있어다오. 이 땅에 우리 가족의 피와 눈물이 스며있으니… 언젠가 후손들이 다시 돌아와 네 아래에 앉을 때, 내가 남긴 이 이야기를 전해주렴. 우리가 얼마나 애써 이 땅을 지켜왔는지… 떠나야 했지만 다시 돌아올 거라고.
(노인은 고개를 들어 앵두나무를 한참 바라보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그리고 무대 뒤쪽으로 걸어가며 마지막으로 관객을 향해 한 마디 던진다.)
노인:
잘 있거라, 내 앵두나무. 그리고 우리 터전… 언젠가 다시 돌아올 그날을 기다려다오.
(노인이 무대를 떠나고, 앵두나무에 서서히 조명이 꺼지며 막이 내린다.)
(막)
'시나리오와 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노드라마: 오유권 원작, 호식(虎食) (45) | 2024.11.22 |
---|---|
모노드라마: 오유권 원작, 소문 (50) | 2024.11.21 |
오유권 원작 '가난한 형제' 대본 요약 (45) | 2024.11.19 |
오유권 원작 '새로 난 주막' 대본 요약 (46) | 2024.11.18 |
오유권 원작 '월광' 대본 요약 (41) | 2024.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