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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와 희곡

오유권 원작, 후사(後嗣)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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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사(後嗣)


원작: 오유권 소설, 후사(동서문학, 1988. 08)

각색: 공노사노 김병한

등장인물

장노인
상월댁
윤오
순이
유형사
까치네댁
장년 1, 2, 3

대화 중에 나오는 인물

껀정다리

주요 등장인물 성격

장노인: 오대째 독자로 내려오면서 후사 걱정이 앞서는 가장. 남매 중에서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 윤오의 생사가 중요하다. 아들을 살리려고 딸의 처지는 후순위로 돌린다.

상월댁: 장노인의 아내. 그는 아들도 아들이지만 딸도 아들만큼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딸이 형사에게 끌려가 나쁜 일을 당할까봐 아들을 찾기 위해 직접 나선다.

유형사: 입산한 윤오를 찾는 구실로 윤오 동생 순이에게 흑심을 품은 형사. 그는 윤오를 비롯한 입산한 부역자를 색출하는 임무를 띠고 있지만 유독 곱상한 윤오 동생 순이를 차지하려고 억지를 부린다.

1950년대 전쟁 중

 

장소

영산포읍, 장노인의 집, 영산포의 요정(성일관), 불회사, 뒤께, 밑께, 쑥께, 서릿골, 까치네댁

# 제1막 / 1950년 10월

인민군이 물러가고 경찰이 수복한 남도의 H읍은 살벌하다. H읍의 번화한 밤거리를 소총을 맨 전투경찰이 한 아가씨를 달고 가고 있다. 스무 살이 됐을까 말까 한 예쁘장한 아가씨로 유방이 불룩한 블라우스에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있는데 자못 겁에 질린 표정이다.

& 거리와 요정

무대는 거리와 요정을 같이 보여준다. 거리에는 20대 여성과 그녀를 앞장서서 데리고 가는 전투복장을 한 유형사가 있다.

순이

어디로 데리고 가요? (사이) 뭣을 물어볼라고 그러요? 물어볼 말씀 있으면 여기서 물어보시오.

유형사

겁낼 것 없어. 잠자코 따라만 와.

순이

이 밤중에 가기는 어디를 가요. 여기서 물어보시요.

유형사는 대꾸 없이 전등불이 뽀얀 전봇대 곁의 요정으로 들어간다.

& 같은 공간 / 요정

유형사

와 앉아, 이리.

순이는 마음이 놓인다. 지서로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이 취조를 하거나 구금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요정 마담이 술상을 들여온다.

순이

무슨 말씀이요? 물어보시요.

유형사

(총을 뒷벽에 기대놓고 윗도리를 접어서 무릎 위에 얹는다.) 술부터 쳐.(명령조로)

순이는 술을 따른다.

순이

물어보시오.

유형사

오빠 가 있는 곳 알지?

순이

우리는 몰라요.

유형사

모르긴 왜 몰라.

순이

정말 몰라요. 아저씨들이 진주해오던 날 집을 나가곤 여태 소식이 없어요. 몰라요.

유형사

입산해서 민청위원장 조상길이랑 불여사 절고랑에서 파고 산다는 정보가 들어왔는데 모르긴 왜 몰랏!(겁을 주려고 주목으로 술상을 쾅 치면서)
(사이)
가 찾아와. 찾아오면 살려주께. 너희 오빠만 아니라 너희 아버지 어머니도 편하게 해주께. 너는 말할 것도 없고.

순이

글쎄 찾으면 우리도 좋고 다 좋겠는데 어디 가서 어떻게 찾아요.

유형사

꼭 그러기야?

순이

정말예요. 몰라요.

유형사

그럼 가서 욕을 봐야 알겠나?

순이

사름들에 휩싸여 가버린 오빠를 어떻게 찾으란 말이요?

순이는 내심 겁이 난다. 자신도 인공깃발 아래서 노래를 배우고 궐기대회에도 참가했던 일이 있어서 오금이 저린다. 사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듯이 자기도 ‘부역’이라고 죄목을 갖다 씌우면 안 걸려들 수가 없는 처지다.

유형사

정말 몰라?

유형사는 말은 거칠게 하면서 얼굴에는 웃음 빛을 띤다. 그 웃음에 순이는 마음을 좀 놓는다.

순이

정말예요. 알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서 찾아올께요.

유형사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이리 와서 술 한 잔 더 치고 뭘 좀 먹어.

유형사는 순이 손을 끌어다 옆으로 앉힌다.

순이

(술을 따르면서) 좋아요. 잡수세요.

유형사

먹어 좀.

순이가 순순히 응해오지 않자 유형사는 접시에 있는 불고기를 한 젓가락 집어서 순이 입에 들이댄다.

유형사

아 해.

순이

싫어요.

유형사

아~.

순이

싫어요. 안 먹어요.

유형사

그동안 많이 시달렸을 거니까 먹어, 어서.

순이는 끝까지 거절하면 안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순이

두세요. 내가 먹으께요.

무대: 어두워진다.

& 장노인의 집 / 안방

상월댁은 설대로 담배통을 끌어당긴다. 장노인은 상월댁의 담배를 끌어가는 모습을 불만족스럽게 쳐다본다.

상월댁

늦은 밤에 뭣하러 데려갔으께라우? 데려다 뭣하께라우?

장노인

저녁에 담배는…
(담배통을 끌어다가 등 뒤로 감추면서) 모르제 죽일라고 데려갔는지 살릴라고 데려갔는지…

상월댁

오메, 오메! 애점잖은 가시내 데려다 징역이라도 보내면 어쩌께라우이.

장노인

말 좀 물어볼 것 있다고 데리고 안 가던가.

상월댁

집에서 그만큼 물어보고 조졌으면 말지. 무슨 말을 더 물어볼라고 데리고 갔으께라우.
(사이)
날마다 찾아와서 물어보는 것도 부족해서 가시내까지 데려가께라우.

장노인

상월댁

어디 있는지 기별이라도 오면 좋겄는디. (사이) 많잖은 자식들, 하나는 산으로 들어가서 죽은지 산지를 모르고 가시내는 밤중에 붙들려 가서 오지를 않고… 집안 꼴 잘돼요.

상월댁은 기어코 담배통을 뺏어다 담배를 채워 물고 연기를 뿜는다. 장노인도 상월댁의 담배 피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장노인

그나마 윤오 이 애는 마지막 물 떠놀 놈이 아닌가?

상월댁

누가 아니래요.

장노인

윤오가 어찌되면 물 떠놀 손은 고사하고 집안 문 닫네.

상월댁

장노인

내민 돌이 정 맞는다고 내가 그렇게 말렸는디… (사이) 그리고 난세일수록 입조심, 말조심하라고 그렇게 일렀는디…

상월댁

금메 말이요. 남 말 말고 근사하라고 했는디도, 지가 나서가지고는…

장노인

어디가 있는 줄 알면 자수라도 시켜서 살려야 쓰겄는디…(한숨)

상월댁

어디 가야 찾을 수 있으께라우.(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담배 연기로 방이 뿌옇게 흐린 상태로 한숨들만 쉬고 있다. 상월댁은 순이 들어오는 인기척이 나는가 살핀다. 장 노인은 옆으로 길게 누운채 줄담배를 피는 상월댁이 못마땅하다는 듯 ‘쩝쩝’ 거린다.

장노인

그놈의 담배…

상월댁

잠 안 오니께 그러요. 담배하고나 벗하제 누구 벗할 사람 있소.

장노인

불 끄고 눠. 눠 있으면 잠이 절로 올 것인께.

상월댁

저렇게 인정머리가 없고 잠밖에 몰라.

장노인도 걱정이 태산이다. 특히 윤오가 어떻게 되면 대가 끊어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막힌다. 지서에 불려간 딸은 기껏해야 구류 좀 살다 나오면 그만이지만, 아들은 지금 죽느냐 사느냐 갈림길에서 허덕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기막히다.

장노인(누운채)

있는 곳을 알면 당장이라도 찾아 나서겄는디…

상월댁

정 뭣하면 내가라도 산에 가서 윤오를 찾아올라우.

장노인

(빈정대며) 시주하고 있네. 자네가 무슨 재주로 그 소굴에를 들어가.

상월댁

짚신 감발하고 거지 행세하고 들어가지 어째라우.

장노인

거지가 뭣 얻어묵을 것이 있다고 산으로 들어왔느냐고 하면 뭣이라 하게?

상월댁

난리 속에 항간에서는 얻어묵을 것이 없어서 산으로 열매 따 묵으러 들어왔다고 하제 어째라우.

장노인

가리사니 없는 소리 말고, 담배나 끄소.

상월댁

아니라우. 내가 꼭 찾으러 갈라우.

이렇게 자식들 걱정에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인기척이 난다. 순이 신발 소리가 난다.

순이(소리만)

엄니!

상월댁

어따, 오메! 내 새끼 오네.

순이가 들어선다. 옷이 엉망이다.

상월댁

어디 가서 뭣하고 인자 오냐?

장노인

무슨 말 물어보디야?

순이

나 어처구니없는 꼴 다 봤소예.

상월댁

어처구니없는 꼴은 무슨 어처구니없는 꼴이야? 그래 어디로 데리고 가디야? 무슨 말을 물어보디야?

순이

요정으로 데리고 갑디다.

상월댁

우리는 지서로 데리고 간지 알었다.
(숨을 가쁘게 내 쉬고)
그만만 해도 더 낫다. 요정으로 데리고 가서 어쩌디야? 무슨 말을 물어보디야?

순이

평상 집에서 묻던 말이디다. 오빠가 있는 곳을 알지야고. 빨리 가 찾아오라고 합디다.

상월댁

그래야. 그런 것을 나는 서로 데려다 가둔지 알고 늙었다 늙었어.

순이

서는 문 앞에도 안 갔소.

상월댁

그 말 물어볼람서 물라고 밤늦게 요정으로 끌고 갔을꺼나. 그래 뭣이라고 대답했냐?

순이

지금은 오빠가 있는 곳을 모르고 알면 가서 찾아오라고 했소.

상월댁

평상 그 말이 그 말들이구나.

장노인

그런께 가나오나 윤오를 찾아오는 길밖에 약이 없단께. 집안이 편하고 식구가 살 길은 윤오를 찾아오는 길밖에 없어.

상월댁

그 말 물어볼라고 요정으로 데리고 가야. 이상한 사람도 다 있다이.

순이

나한테 고기를 막 먹여주고 술도 치라고…

상월댁

(놀라 눈이 동그래지면서) 불량한 인사가 너를 희롱할라고 요정으로 데리고 갔던 것 아니냐.

장노인

그래 어쨌냐? 고기랑 먹고 술도 쳐주고 했냐?

순이

예, 술도 쳐주고 다 들어줬어라우.

장노인

잘했다. 그래야 해야. 그래야 우리에게 해가 안 돌아와야. 난세에는 뭐니뭐니해도 지혜란다.

상월댁

움맘마! 저 영감 말하는 것 봐야. 잘했다니? 그래야 한다니?
(사이)
가시내를 접대부를 만들라고 그러요. 술집 색시를 만들라고 그러요?(말이 올라간다.)

장노인

이 사람아, 그것이 아니여. 그 사람들한테 잘 보여야 우리가 해를 덜 입어. 윤오가 산에서 붙잡히는 한이 있드래도 그러고. 나와서 자수를 해도 그러고.

상월댁

윤오, 윤오. 당신은 윤오밖에 모듭디다이. 그럴라면 차라리 가시내를 팔아다 윤오를 사시요.

장노인

아! 저 생각머리 없는 사람 보소. 생각하면 윤오만이 아니여. 순이도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여. 죄목을 붙여서 가두면 꼼짝 못해. 다른 가시내들 가 욕보고 나오는 것 못 봤는가.

상월댁

장노인

남자들이 술을 묵으면 가다가다 그런 때도 있는 것인께. 그런 때는 눈 딱 감고 말시늉이라도 해주는 것이 좋은 것이여. 누구는 자식 귀한지 몰라서 그러는가.

상월댁

당신 말대로 하면 아들 살릴라다 딸 신세 놓치겄소. 놔두시오. 내가 윤오를 찾으러 나설라우. 당신 말마따나 우리 식구가 사는 길은 윤오를 찾는 길밖에 없겠소. 그래야 후사를 이어서 선영 공대를 하고 순이도 그런 놈한테 불려가서 또 다시 요정에 안 가겄소.

장노인

어디 가서 어떻게 찾을란가?

상월댁

전에 이 마을서 살던 까치네가 들으매 그 고랑 쑥으로 이사 가서 산답디다. 아는 사인께 윤오가 오다가다 혹 거기나 안 들르곤 하는지 모르겄소. 그 집에 가서 자리를 잡고 염탐해볼라우. 그보다 더한 것도 찾는디 지가 닷새 한하고 뭉개면 찾제 못 찾을랍디여.

장노인

그러소. 그럼 가보소. 오다가다 연락꾼으로 오해받는디 조심해야 해.

상월댁

그런 염려 말고 당신은 딸이나 잘 간수하시오. 지서에서 오면 잘 말해서 보내시오.

무대: 어두워진다.

# 제2막

꽁꽁 마음을 다진 상월댁은 마침내 불여사 고랑으로 윤오를 찾아 나섰다. 헌 광주리에 빨래비누 스무 장을 떼어서 행상을 가장했다. 아들을 찾고 딸 신세를 안 그르치려고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나선다. 어느 누가 됐건 이 늙정이를 생매장하랴 하는 자위심도 없지 않았다.

읍에서 유치 쪽을 향해 국도를 따라 세 마장 정도 가자 신작로 가에 떡집이 있고 거기서 다시 한 마장을 이어 나가자 왼편에 황톳길이 길게 나 있다. 그 갈림길에 과자가게가 있다. 상월댁은 일수가 좋으면 간 즉시 아들을 만날지도 모른다 싶어, 가게에 들어가 비누 한 장을 과자와 바꾸어가지고 황톳길로 들어섰다.

& 쑥께로 가는 길

상월댁은 뒤께, 밑께를 지나 쑥께를 향한다. 길 옆에는 산두밭이 있다.

 

상월댁(혼잣말로)

야야! 이 산두, 잘 되었는 것 봐라.

그 사이 산사람들로 보이는 장년 세 명이 무대에 등장한다. 걸어오는 상월댁을 막고 그중 한 명이 죽창을 들이댄다.

장년 1

뭐하러 어디를 가요?

상월댁(예사롭게)

장사하러 나온 사람이요. 아무 일 아닌께 어서들 가시요.

장년 2

이 난리 속에 장사는 무슨 장사요. 경찰 연락 취하러 댕기는 것 아니요?

상월댁

말 같잖은 소리 하지도 마시요. 하고 많은 사람 다 두고 누가 이런 늙정이를 연락꾼으로 쓰겄소.

장년 1

장산 또 무슨 장사요?

상월댁

비누 팔러 나왔소.

장년 1

어디소 왔소?

상월댁

읍에서 왔소. 아따! 다른 일 아닌께 걱정 말고 가시란 말이오들.

장년 3

어디 가서든지 우리 보았단 말 마시오. 알았소?

상월댁

걱정 말고 가시라 말이오들.

무대: 어두워진다.

& 까치댁네 집

상월댁은 사립문을 밀치고 들어간다.

상월댁

비누 사시오.

아무 반응이 없다. 상월댁 집 여기저기를 훑어본다.

상월댁

비누 사시오. 이 집에 아무도 없소?

뒤안에서 까치네댁이 싸릿대 한 아름을 안고 나온다.

까치네댁

우리는 비누 있소. 안 살라우.
(상월댁을 쳐다 보다가)
아니! 순이 어메 아니요?(반긴다.)

상월댁

예. 심심해서 바람 쐬러 나왔소. 잘 사시오?

까치네댁

장사하러 다니실 양반도 아닌디 웬일이시오? 올라가십시다.

상월댁은 손가락을 세워서 입에 갖다 댄다. 까치네댁은 주위를 둘러 보고 마루에 올라선다. 상월댁도 따라서 마루에 앉는다.

상월댁

여기 와서는 살기가 어쩌시오? 더 나으시오 어쩌시오?

까치네댁

없는 사람이 어디로 가나 같지 별다를 것 있을랍디여. 그새 편안하시요들?

상월댁

시국이 이 모양인디 편안한 사람이 어디 있겄소. 그래 바람도 쐬기 겸 이렇게 나왔소.

상월댁은 입을 갖다 까치댁의 턱 가까이 들이대면서 나직이 묻는다.

상월댁(낮은 목소리로)

우리 윤오 못 봤오?

까치네댁이 주위를 둘러보고 상월댁 손을 꽉 오그려 쥐고 골방으로 데리고 간다.

상월댁

왔습디여?

까치네댁

가끔 와라우. 어제도 와서 찰밥 지어 먹이고 담배 한 갑 줘 보냈소.

상월댁

오메, 오메, 그래라우! 너무너무 아슴찮소. 얼굴이랑은 어쩝디여?

까치네댁

산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좋겄소만 그래도 본 얼굴은 지니고 있습디다.

상월댁

오메에! 그럼 여기 모다 몇 번이나 왔습디여?

까치네댁

확실하게는 모르겄소만 대여섯 번 왔을 것이요. 한참 먹을 나이에 이 산 저 산 쏘다니다 보면 얼마나 허기질 것이오. 그래 뭘 주면 게눈 감추듯 먹고 쫒기듯 가곤 했지라우.

상월댁

그래 지금 어디가 있다고 합디여?

까치네댁

그런 사람이 그런 것을 가르쳐주고 다니겄소… 말을 안 한께 모르기는 해도 이 근처 어디가 있은께 가끔 오는갑지라우.

상월댁

오메! 어디서 뭣하는지 우리 아들 어서 좀 봤으면 쓰겄네.

윤오는 입산한 사람들 따라 서릿골로 도망왔다. 거기서 부대가 편성되어 남부지구 제3기동대 보급반에 배치됐다. 낮에는 아지트나 동굴 속에서 지내고 밤이 되면 야음을 타서 이른바 보급사업을 나다닌다.

까치네댁

모르겄소. 내일이라도 모레라도 또 나올는지.

상월댁

그럼 쓰겄소예. 오면 나를 꼭 좀 만나게 해주시오. 지서에서 날마다 찾아오라고 난리란 말이요. 딸을 다 잡어가고 못 살겄소. 못 살어.

까치네댁

그럼 거처는 사납지만 여기서 이틀이고 사흘이고 있는 데까지 계십시오. 오면 만나게 해드리리다.

상월댁은 비누 석 장을 까치네댁에게 건넨다.

상월댁

너무너무 고맙소. 이래서 다 한 고향 사람이 좋다는 것 아니요.

까치네댁

별말씀을 다하시오. 그래서 타관에 나오면 내 땅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고들 하지 않습디여.
(사이)
그런디 공산당 놈들은 한 겨레를 못 잡아 묵어서 난리를 일으켜 가지고 뭇 백성을 이 고생을 시키요 그랴.

상월댁

난세 난세. 말도 마시요. 아들 하나 딸 하나 있는 것 가지고 이렇게 속을 썩이고 살랍디여.

무대 어두워진다.

& 장노인의 집

유형사가 장노인을 힐책하고 있고 장노인 옆에는 순이가 있다.

유형사

그래 아들을 어디다 숨겨놨소? 아들 내놓으시오.

장노인

숨겨두기는 어디다 숨겨둬라우. 찾으러 갔다니께.

유형사

누가 어디로 찾으러 갔소?

장노인

할멈이 갔소. 불여사 고랑으로 갔소.

유형사

정말이요?

장노인

거짓말할 일이 따로 있제 그런 말을 다 거짓말하겄소. 찾아오면 데리고 가 자수시키리다. 밤도 늦고 했은께 이만 돌아가 쉬시오.

순이

어저씨. 그렇게 하십시오. 울 어머니가 어저께 가셨은께 찾아오면 꼭 데리고 가서 자수시키리다. 염려 말고 돌아가십시오.

유형사(허공을 보며)

그 말을 누가 믿어?

장노인

제 말을 믿으십시오. 찾아오면 꼭 데리고 가리다.

유형사(트집조로)

집이 어디다 숨겨두고 거짓말하는 것 아니야?

장노인

숨기기는 어디다 숨겨요. 아직 오지도 않은 사람을.

유형사

다 알아. 내놔, 내놔, 장윤오 내놔.

장노인

다 알기는 뭣을 알어라우. 백지 애먼 소리 말고 곱게 가시오잉.

유형사

윤오 안 내놓으면 못 가겄소. 내놓으시오. 빨리. 어제도 오고 그저께도 왔답디다. 다 듣고 알고 왔소.

장노인

어허!
(펄쩍 뛰며) 우리 윤오가 오기는 언제 와라우. 누가 그랍디여? 누가 봤답디여? 사람 잡을 소리 다 듣겄네이.

유형사

엄살떨지 말고 내놔요. 응! 끝까지 그러면 영감, 딸 할 것 없이 모조리 잡어갈란께. 딸까지(강조)

장노인

잡어가면 가도 하는 수 없소. 어디서 그런 억지를 꾸면서 숨겨놨다느니 집에 왔다느니 하요. 없은께 못 내놓겠소.

유형사

정말이요?

장노인

정말이요. 어디서 그런 경우 없는 억지를 쓰요. 누가 왔답디여? 누가 봤답디여?
(사이)
우리는 없은께 못 내놓겄소. 잡아갈라면 다 잡아가시오. 어허이! 세상 오래 산께 별꼴을 다 보네.

유형사

영감이 큰소리만 통통 치고 있네. 아주 배짱이야.

장노인

배짱은 무슨 배짱. 아무리 난세이긴 하지만 사람이 경우가 있는 것이지.

유형사

갑시다. 그럼.

유형사가 장노인을 연행하려고 장노인을 향한다. 이때 순이가 나선다.

순이

안 돼요. 늙은 아부지를 데리고 가기는 어디로 데리고 가요. 차라리 내가 가서 죽든가 살든가 하지.

순이가 앞장서서 나선다. 장노인 황망히 몇 걸음 따라 나간다.

장노인

아야,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다이. 무슨 조건을 들어서 무슨 벌을 씌울지 모른께, 고분고분 말을 잘 들어라이. 비위를 맞춰 줘. 그래야 우리가 해를 덜 본다.
(사이)
그래야 너도 좋고 니 오빠도 너그럽게 봐줘.
(사이)
찾으러 갔은께 니 오빠가 내일이라도 모레라도 올지 알겄냐. 알었지?

장노인은 나가는 순이 등을 토닥인다. 순이는 유형사 앞서 고샅길을 나선다. 유형사는 마지못한 듯 순이를 따라간다.

무대: 어두워진다.

& 거리

순이가 앞서 걷고 유형사가 뒤따른다. 유형사가 순이 가까이 다가간다.

유형사

잠깐…

순이가 걸음을 멈춘다.

유형사

서로 가는 게 좋겠어? 관으로 가는 게 좋겠어?

순이

그건 아저씨 알아서 할 일이지 나한테 물을 것 뭐 있어요.

유형사

가 그럼. 이쪽 길루.

순이가 왼쪽 길로 걸어 나서자 유형사가 순이 곁으로 다가붙어서 왼손으로 허리를 감싼다. 순이는 유형사 손을 뿌리치지 않는다.

& 같은 장소 / 요정 성일관

유형사

먼저 올라가.

순이가 먼저 방에 들어가고 유형사는 뒤따라 들어간다. 뒤이어 술상이 들어온다. 동동주에 조기구이, 불고기, 생굴에다 낙지무침이 차려진 상이다.

유형사

그럼 또 한잔 해볼까…

순이

유형사

술 쳐.

순이는 주전자를 들어 술을 따른다.

유형사

오빠 찾으러 간 게 정말이야?

순이

정말예요. 걸 거짓말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어머니가 비누장사를 가장해가지고 가셨어요.

유형사

어디루?

순이

불여사 고랑으로 가셨어요. 전에 우리 마을서 살던 사람이 그리 이살 가 설거든요. 그 사람을 믿고 염탐해보려고 갔어요.

유형사가 술을 한 모금 마신다.

유형사

에! 시원하다. 순이도 좀 들어.

순이

먹으께요.

유형사

그래 오빨 찾아올 것 같애?

순이

건 와봐야 알지 모르죠.

유형사

언제 오기루 돼 있나?

순이

이삼 일 후면 어머니가 오시지 않을까 해요.

유형사

찾아오기만 하면 만사가 땡이다. 첫째론 오빠가 살고 순이네가 안정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한 소득이 있어. 아, 어렵게 생각 말고 들라고. 굴, 낙지 모다 좋은 것들이야. 어서 좀 들어.

순이

더한 소득이 뭔데요?

유형사

그놈들 정보야. 정보를 정확히 알아내면 그놈들 아지트를 쳐부수고 일격에 섬멸할 수가 있거든. 그러면 대성공 아니야. 순이네도 큰 포상을 받고 말이야.

순이

오빨 꼭 찾아왔음 좋겄네요.

유형사

글쎄 말이야.

유형사는 남은 술을 마신다.

유형사

순이가 올해 몇이야?

순이

유형사

몇이야? 올해.

순이

열아홉이에요. 왜요?

유형사

좋은 나이군. 어때? (사이) 나한테 시집올 생각 없나? 이래 봬도 말짱한 새총각이야.

유형사는 고교를 졸업하고 4년 전에 경찰에 들어왔다. 그는 험한 전란 속에서도 아직 여자 옆에는 가보지 않았다. 그런데 순이한테는 진심으로 마음이 쏠린 것이다. 유형사는 취조 대신 술상 앞에서 프로포즈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유형사

말해봐’

순이

그걸 내 맘대로 하나요.

유형사

집에서 승낙하면 오겄냐?

순이

말씀해보세요.

유형사

아무튼 오빠만 찾아. 오빠만 찾으면 만사가 땡인께.

순이

빌겠어요.

무대: 어두워진다.

# 제3막

서릿골 까치네댁에서 이틀을 보낸 상월댁은 집안일이 궁금하다. 영감이나 딸 가운데서 누구 하나가 붙잡혀 가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마을에 딴 일은 없는지가 궁금하다. 돌아가고 싶은데 윤오가 아직 안 나타난 것이다.

& 까치네댁 집 / 골방

상월댁은 누워서 천장만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겨있다. 까치네댁이 옥수수 한 바가지를 쪄 가지고 들어선다.

까치네댁

심심하신디 일어나서 이것 좀 들어보십시오.

상월댁(일어나면서)

뭘라고 귀찮게 가져오요. 우리 아그도 들락거림서 귀찮게 하는디.

까치네댁

별말씀을 다 하시오. 그런 것이 다 한 마을서 살던 정의지 뭣이라우.

상월댁

이 아이가 안 오요이.

까치네댁

글쎄. 올 만한 때가 되었는디 안 오요. 다른 때 같으면 진작 왔겄는디.

상월댁

어서 와서 보아야 잊겄는디.

상월댁이 옥수수를 알알이 뜯으면서 몇 알을 입에 넣고 씹는다.

상월댁

산사람들 왔다 갔다 하고 시상 귀찮겄소.

까치네댁

어디 산사람들뿐이라우. 경찰도 들어오지.

상월댁

글쎄 얼마나 성가시요. 들어와도 보통 일로 안 들어올 것인디.

까치네댁

그래도 지금은 더 낫소. 전에 같으면 못 살겄습디다. 낮에는 경찰이 와서 파고 살고 밤에는 산사람들이 와서 들끓고 못 살겄습니다. 밥도 밥도 어지간히 삶아내고. 지금 마을에는 닭 한 마리가 안 남았소. 어떤 때는 돼지도 한 마리 잡은 일이 있어라우.
(사이)
그렇게 해먹여 보내야 조용히들 가지 글 안 하면 한쪽에서는 빨갱이라고 닦아세우고 또 한쪽에서는 반동이라고 끌어갈락 하지 못 살 세상답게 살았소. 그런께 낮에는 태극기, 밤에는 인공기, 도통 두 시상을 살었어라우.

상월댁

오메오메! 그래라우잉.

까치네댁

말도 마시오.

상월댁

그런 시상을 살고도 옥수수까지 쪄 와겠소. 아이갸아!

까치네댁

하도 험한 시상을 살고 나께 사람이 더 귀하고 반갑습디다.

상월댁

시상에…

밖에서 인기척이 난다. 이어서 까치네댁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만

아주머니.

까치네댁

오는 것이요.

까치네댁이 쿵 문을 여는 것과 함께 상월댁은 벽으로 몸을 숨킨다.

까치네댁

어서 오시오. 어머니 오셨소.

윤오(깜짝 놀라며)

예?

윤오가 들어서며 벽에 기댄 어머니를 본다.

윤오

뭣 하러 왔소?

상월댁

니 찾으러 왔지 뭣 하러 와야. 가자, 집에.

윤오

언제 와겠소?

상월댁

그저께 왔다. 가자. 당장.

상월댁이 일어서서 갈 차비를 차리려 한다.

윤오

가만히 계십시오. 좀, 숨을 돌리고 나서 이러든가 저러든가 합시다.

까치네댁

그러시오. 때 되었은께 아주 점심들 잡숫고 나서시오.

까치네댁은 윤오와 상월댁을 잡아 앉힌다.

까치네댁

에시오. 옥수수 먹으시오.

까치네댁은 옥수수 바가지를 당겨 윤오 앞으로 놓는다.

윤오

그새 집에는 무고하시오?

상월댁

니가 이렇게 나와 있는디 무고하겄냐. 점심이고 뭐고 어서 가자. 집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겄다.

윤오

그새 어떻게 지내셨소?

상월댁

경황없이 지냈지 어째야. 하루빨리 나와서 자수하고 식구들 얼굴이랑 보고 하지 늙은 어미, 아비는 들볶여 죽으라고 너만 혼자 여기서 자빠졌냐.

윤오

들볶이기는 누구한테 들볶여라우?

상월댁

이 아이 속없는 소리하는 것 봐라이.
(어이 없어 하며 손가락으로 윤오를 가리키며) 지서에서 너를 안 잡으러 다니겄냐! 응? 너를 안 찾아오라겄어? 사흘이 머다고 형사가 찾아오고 니 동생도 불려가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겄다. 너만 찾아오라고 해싼께, 가자, 어서. (사이) 자수를 하고 집안 식구들 살리든가 죽이든가 해라.

윤오

그랬으면 쓰겄소만 지금은 나갈 수가 없어라우. 낮에가 나가다 붙잡히면 끽소리도 못하고 죽소.

상월댁

그럼 같이 있다가 밤에라고 가자. 같이 가야지 나 혼자 가면 너희 아부지 낙심하실 것이다. 지서에서도 더 야단할 것이고.

윤오

밤에는 감시가 더 심한디요. 혼자는 어디를 한 발작도 못 나가게 해라우. 꼭 잡매 다니게 해라우. 그란께 오늘은 어머니 혼자 그냥 돌아가십시오. 사흥 뒤에 사업을 나갈 것 같으께, 사업을 가서 그때 내가 몰래 빠져나가리다.

상월댁

사업이 뭣이라냐.

윤오

나가서 보는 일이 있어라우. 민가에 내려가서 보는 일이 있소. 사흘 뒤에 그 일이 있을 것 같으께 그때 나가서 빠져나가리다. 아무한테도 말 말고 어머니나 혼자 알고 가 계십시오.

상월댁

꼭 와야 한다.

윤오

믿고 계십시오. 그때 나가서 자수할란께.

상월댁

그리 어찌해야 식구가 살지 못 살겄다.

까치네댁

그러건 저러건 점심이나들 잡수고 나서십쇼. 나 곧 밥 지을란께.

껀정다리(소리만)

뭘 하오. 빨리 나오시오

& 장노인의 집 / 안방

장노인은 혼자 빈방을 지키고 있다. 아들은 입산, 딸은 유형사를 따라 가고 상월댁은 불여사 골짝으로 가고 없다. 오대가 잇달아 독자로 내려온 가문 생각에 새삼 한탄스럽다.

장노인(혼잣말)

친혈육은 고사하고 먼 육촌 하나라도 있으면 여북 좋을까. (사이) 걱정해줄 사람은 놔두고 말벗 하나가 없으니…

순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아부지.

장노인

어서 오너라.

순이

(기운 찬 목소리로) 기다리셨죠?

장노인

암, 혼자 안 기다렸겄냐. 가서 어쨌냐? 지서로 갔냐, 딴 디로 갔냐? 또 무슨 말 물어보디야?

순이

앞서처럼 관으로 가자고 합디다.

장노인

그만하기 다행이다. 나는 또 지서로 데려다 어쩌지 않나 하고 혼잣속으로 늙었다. 뭣이락 하디야?

순이

어머니가 오빠를 찾으러 간 것이 정말이고 언제 온다디야고 합디다.

장노인

그래서?

순이

정말이고 오빠는 와봐야 알지 지금 알겠으냐고 했소.

장노인

딴말은 안 물어보디야?

순이

안 물어봅디다. 술만 쳐주고 안주 좀 같이 집다가 왔소.

장노인

잘했다. 그뿐이냐?

순이

오! 깜빡 잊을 뻔 했네.

순이(빙긋이 웃음을 지며)

자기한테 시집올 생각없냐고라우. 이래 봬도 말짱한 새 총각이라고 자기한테 오라고 해라우.

장노인(무슨 횡재인가 싶어)

(웃으면서) 가다가 솔깃한 말도 들어보겄다이.
(사이)
그래 뭣이락 했냐? 가겠다고 했냐?

순이

오메메! 우스운 말씀을 다하시네. 그런 것을 내 맘대로 하겄소. 집에서 알아서 하시지.

장노인(순이에게 바싹 다가 앉으며)

그래 뭐라디야?

순이

집에서 승낙하면 오겠느냐고 합디다.

장노인

그래 뭣이라고 했냐?

순이

웃고 말았지 내가 뭣이라고 더 말했겄소.

장노인

그래.
(사이)
그 말이 농담은 아닌 것 같디야?

순이

모르겄소. 농담이었는지 진담이었는지. 만일 진담이었다고 치면 고리 시집을 보내실라우?

장노인

보낼 만도 하지 어째야.

순이

피이! 뭣이 좋아서라우.

장노인

아니다. 이 시국에 경찰이면 최고 아니냐.

무대: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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