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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와 희곡

오유권 원작, 후사(後嗣) 제1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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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사(後嗣)

원작: 오유권 소설, 후사(동서문학, 1988. 08)

각색: 공노사노 김병한

등장인물

장노인
상월댁
윤오
순이
유형사
까치네댁
꺽정다리

대화 중에 나오는 인물

주요 등장인물 성격

장노인: 오대째 독자로 내려오면서 후사 걱정이 앞서는 가장. 남매 중에서 가문의 두를 이을 아들 윤오의 생사가 중요하다.

상월댁: 장노인의 아내. 그는 아들도 아들이지만 딸도 아들만큼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딸이 형사에게 끌려가 나쁜 일을 당할까봐 아들을 찾기 위해 직접 나선다.

유형사: 입산한 윤오를 찾는 구실로 윤오 동생 순이에게 흑심을 품은 형사. 그는 윤오를 비롯한 입산한 부역자를 색출하는 임무를 띠고 있지만 유독 곱상한 윤오 동생 순이를 차지하려고 꾀를 부린다.

1950년대 전쟁 중

 

장소

영산포읍, 장노인의 집, 영산포의 요정(성일관), 불회사, 뒤께, 밑께, 쑥께, 서릿골, 까치네댁

# 제1막 / 1950년 10월

인민군이 물러가고 경찰이 수복한 남도의 H읍은 살벌하다. H읍의 번화한 밤거리를 소총을 맨 전투경찰이 한 아가씨를 달고 가고 있다. 스무 살이 됐을까 말까 한 예쁘장한 아가씨로 유방이 불룩한 블라우스에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있는데 자못 겁에 질린 표정이다.

& 거리와 요정

무대는 거리와 요정을 같이 보여준다. 거리에는 20대 여성과 그녀를 앞장서서 데리고 가는 전투복장을 한 유형사가 있다.

순이

어디로 데리고 가요? (사이) 뭣을 물어볼라고 그러요? 물어볼 말씀 있으면 여기서 물어보시오.

유형사

겁낼 것 없어. 잠자코 따라만 와.

순이

이 밤중에 가기는 어디를 가요. 여기서 물어보시요.

유형사는 대꾸 없이 전등불이 뽀얀 전봇대 곁의 요정으로 들어간다.

& 같은 공간 / 요정

유형사

와 앉아, 이리.

순이는 마음이 놓인다. 지서로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이 취조를 하거나 구금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요정 마담이 술상을 들여온다.

순이

무슨 말씀이요? 물어보시요.

유형사

(총을 뒷벽에 기대놓고 윗도리를 접어서 무릎 위에 얹는다.) 술부터 쳐.(명령조로)

순이는 술을 따른다.

순이

물어보시오.

유형사

오빠 가 있는 곳 알지?

순이

우리는 몰라요.

유형사

모르긴 왜 몰라.

순이

정말 몰라요. 아저씨들이 진주해오던 날 집을 나가곤 여태 소식이 없어요. 몰라요.

유형사

입산해서 민청위원장 조상길이랑 불여사 절고랑에서 파고 산다는 정보가 들어왔는데 모르긴 왜 몰랏!(겁을 주려고 주목으로 술상을 쾅 치면서)
(사이)
가 찾아와. 찾아오면 살려주께. 너희 오빠만 아니라 너희 아버지 어머니도 편하게 해주께. 너는 말할 것도 없고.

순이

글쎄 찾으면 우리도 좋고 다 좋겠는데 어디 가서 어떻게 찾아요.

유형사

꼭 그러기야?

순이

정말예요. 몰라요.

유형사

그럼 가서 욕을 봐야 알겠나?

순이

사름들에 휩싸여 가버린 오빠를 어떻게 찾으란 말이요?

순이는 내심 겁이 난다. 자신도 인공깃발 아래서 노래를 배우고 궐기대회에도 참가했던 일이 있어서 오금이 저린다. 사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듯이 자기도 ‘부역’이라고 죄목을 갖다 씌우면 안 걸려들 수가 없는 처지다.

유형사

정말 몰라?

유형사는 말은 거칠게 하면서 얼굴에는 웃음 빛을 띤다. 그 웃음에 순이는 마음을 좀 놓는다.

순이

정말예요. 알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서 찾아올께요.

유형사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이리 와서 술 한 잔 더 치고 뭘 좀 먹어.

유형사는 순이 손을 끌어다 옆으로 앉힌다.

순이

(술을 따르면서) 좋아요. 잡수세요.

유형사

먹어 좀.

순이가 순순히 응해오지 않자 유형사는 접시에 있는 불고기를 한 젓가락 집어서 순이 입에 들이댄다.

유형사

아 해.

순이

싫어요.

유형사

아~.

순이

싫어요. 안 먹어요.

유형사

그동안 많이 시달렸을 거니까 먹어, 어서.

순이는 끝까지 거절하면 안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순이

두세요. 내가 먹으께요.

무대: 어두워진다.

& 장노인의 집 / 안방

상월댁은 설대로 담배통을 끌어당긴다. 장노인은 상월댁의 담배를 끌어가는 모습을 불만족스럽게 쳐다본다.

상월댁

늦은 밤에 뭣하러 데려갔으께라우? 데려다 뭣하께라우?

장노인

저녁에 담배는…
(담배통을 끌어다가 등 뒤로 감추면서) 모르제 죽일라고 데려갔는지 살릴라고 데려갔는지…

상월댁

오메, 오메! 애점잖은 가시내 데려다 징역이라도 보내면 어쩌께라우이.

장노인

말 좀 물어볼 것 있다고 데리고 안 가던가.

상월댁

집에서 그만큼 물어보고 조졌으면 말지. 무슨 말을 더 물어볼라고 데리고 갔으께라우.
(사이)
날마다 찾아와서 물어보는 것도 부족해서 가시내까지 데려가께라우.

장노인

상월댁

어디 있는지 기별이라도 오면 좋겄는디. (사이) 많잖은 자식들, 하나는 산으로 들어가서 죽은지 산지를 모르고 가시내는 밤중에 붙들려 가서 오지를 않고… 집안 꼴 잘돼요.

상월댁은 기어코 담배통을 뺏어다 담배를 채워 물고 연기를 뿜는다. 장노인도 상월댁의 담배 피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장노인

그나마 윤오 이 애는 마지막 물 떠놀 놈이 아닌가?

상월댁

누가 아니래요.

장노인

윤오가 어찌되면 물 떠놀 손은 고사하고 집안 문 닫네.

상월댁

장노인

내민 돌이 정 맞는다고 내가 그렇게 말렸는디… (사이) 그리고 난세일수록 입조심, 말조심하라고 그렇게 일렀는디…

상월댁

금메 말이요. 남 말 말고 근사하라고 했는디도, 지가 나서가지고는…

장노인

어디가 있는 줄 알면 자수라도 시켜서 살려야 쓰겄는디…(한숨)

상월댁

어디 가야 찾을 수 있으께라우.(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담배 연기로 방이 뿌옇게 흐린 상태로 한숨들만 쉬고 있다. 상월댁은 순이 들어오는 인기척이 나는가 살핀다. 장 노인은 옆으로 길게 누운채 줄담배를 피는 상월댁이 못마땅하다는 듯 ‘쩝쩝’ 거린다.

장노인

그놈의 담배…

상월댁

잠 안 오니께 그러요. 담배하고나 벗하제 누구 벗할 사람 있소.

장노인

불 끄고 눠. 눠 있으면 잠이 절로 올 것인께.

상월댁

저렇게 인정머리가 없고 잠밖에 몰라.

장노인도 걱정이 태산이다. 특히 윤오가 어떻게 되면 대가 끊어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막힌다. 지서에 불려간 딸은 기껏해야 구류 좀 살다 나오면 그만이지만, 아들은 지금 죽느냐 사느냐 갈림길에서 허덕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기막히다.

장노인(누운채)

있는 곳을 알면 당장이라도 찾아 나서겄는디…

상월댁

정 뭣하면 내가라도 산에 가서 윤오를 찾아올라우.

장노인

(빈정대며) 시주하고 있네. 자네가 무슨 재주로 그 소굴에를 들어가.

상월댁

짚신 감발하고 거지 행세하고 들어가지 어째라우.

장노인

거지가 뭣 얻어묵을 것이 있다고 산으로 들어왔느냐고 하면 뭣이라 하게?

상월댁

난리 속에 항간에서는 얻어묵을 것이 없어서 산으로 열매 따 묵으러 들어왔다고 하제 어째라우.

장노인

가리사니 없는 소리 말고, 담배나 끄소.

상월댁

아니라우. 내가 꼭 찾으러 갈라우.

이렇게 자식들 걱정에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인기척이 난다. 순이 신발 소리가 난다.

순이(소리만)

엄니!

상월댁

어따, 오메! 내 새끼 오네.

순이가 들어선다. 옷이 엉망이다.

상월댁

어디 가서 뭣하고 인자 오냐?

장노인

무슨 말 물어보디야?

순이

나 어처구니없는 꼴 다 봤소예.

상월댁

어처구니없는 꼴은 무슨 어처구니없는 꼴이야? 그래 어디로 데리고 가디야? 무슨 말을 물어보디야?

순이

요정으로 데리고 갑디다.

상월댁

우리는 지서로 데리고 간지 알었다.
(숨을 가쁘게 내 쉬고)
그만만 해도 더 낫다. 요정으로 데리고 가서 어쩌디야? 무슨 말을 물어보디야?

순이

평상 집에서 묻던 말이디다. 오빠가 있는 곳을 알지야고. 빨리 가 찾아오라고 합디다.

상월댁

그래야. 그런 것을 나는 서로 데려다 가둔지 알고 늙었다 늙었어.

순이

서는 문 앞에도 안 갔소.

상월댁

그 말 물어볼람서 물라고 밤늦게 요정으로 끌고 갔을꺼나. 그래 뭣이라고 대답했냐?

순이

지금은 오빠가 있는 곳을 모르고 알면 가서 찾아오라고 했소.

상월댁

평상 그 말이 그 말들이구나.

장노인

그런께 가나오나 윤오를 찾아오는 길밖에 약이 없단께. 집안이 편하고 식구가 살 길은 윤오를 찾아오는 길밖에 없어.

상월댁

그 말 물어볼라고 요정으로 데리고 가야. 이상한 사람도 다 있다이.

순이

나한테 고기를 막 먹여주고 술도 치라고…

상월댁

(놀라 눈이 동그래지면서) 불량한 인사가 너를 희롱할라고 요정으로 데리고 갔던 것 아니냐.

장노인

그래 어쨌냐? 고기랑 먹고 술도 쳐주고 했냐?

순이

예, 술도 쳐주고 다 들어줬어라우.

장노인

잘했다. 그래야 해야. 그래야 우리에게 해가 안 돌아와야. 난세에는 뭐니뭐니해도 지혜란다.

상월댁

움맘마! 저 영감 말하는 것 봐야. 잘했다니? 그래야 한다니?
(사이)
가시내를 접대부를 만들라고 그러요. 술집 색시를 만들라고 그러요?(말이 올라간다.)

장노인

이 사람아, 그것이 아니여. 그 사람들한테 잘 보여야 우리가 해를 덜 입어. 윤오가 산에서 붙잡히는 한이 있드래도 그러고. 나와서 자수를 해도 그러고.

상월댁

윤오, 윤오. 당신은 윤오밖에 모듭디다이. 그럴라면 차라리 가시내를 팔아다 윤오를 사시요.

장노인

아! 저 생각머리 없는 사람 보소. 생각하면 윤오만이 아니여. 순이도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여. 죄목을 붙여서 가두면 꼼짝 못해. 다른 가시내들 가 욕보고 나오는 것 못 봤는가.

상월댁

장노인

남자들이 술을 묵으면 가다가다 그런 때도 있는 것인께. 그런 때는 눈 딱 감고 말시늉이라도 해주는 것이 좋은 것이여. 누구는 자식 귀한지 몰라서 그러는가.

상월댁

당신 말대로 하면 아들 살릴라다 딸 신세 놓치겄소. 놔두시오. 내가 윤오를 찾으러 나설라우. 당신 말마따나 우리 식구가 사는 길은 윤오를 찾는 길밖에 없겠소. 그래야 후사를 이어서 선영 공대를 하고 순이도 그런 놈한테 불려가서 또 다시 요정에 안 가겄소.

장노인

어디 가서 어떻게 찾을란가?

상월댁

전에 이 마을서 살던 까치네가 들으매 그 고랑 쑥으로 이사 가서 산답디다. 아는 사인께 윤오가 오다가다 혹 거기나 안 들르곤 하는지 모르겄소. 그 집에 가서 자리를 잡고 염탐해볼라우. 그보다 더한 것도 찾는디 지가 닷새 한하고 뭉개면 찾제 못 찾을랍디여.

장노인

그러소. 그럼 가보소. 오다가다 연락꾼으로 오해받는디 조심해야 해.

상월댁

그런 염려 말고 당신은 딸이나 잘 간수하시오. 지서에서 오면 잘 말해서 보내시오.

무대: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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