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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와 희곡

오유권 원작, 후사(後嗣) 제3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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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막

서릿골 까치네댁에서 이틀을 보낸 상월댁은 집안일이 궁금하다. 영감이나 딸 가운데서 누구 하나가 붙잡혀 가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마을에 딴 일은 없는지가 궁금하다. 돌아가고 싶은데 윤오가 아직 안 나타난 것이다.

& 까치네댁 집 / 골방

상월댁은 누워서 천장만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겨있다. 까치네댁이 옥수수 한 바가지를 쪄 가지고 들어선다.

까치네댁

심심하신디 일어나서 이것 좀 들어보십시오.

상월댁(일어나면서)

뭘라고 귀찮게 가져오요. 우리 아그도 들락거림서 귀찮게 하는디.

까치네댁

별말씀을 다 하시오. 그런 것이 다 한 마을서 살던 정의지 뭣이라우.

상월댁

이 아이가 안 오요이.

까치네댁

글쎄. 올 만한 때가 되었는디 안 오요. 다른 때 같으면 진작 왔겄는디.

상월댁

어서 와서 보아야 잊겄는디.

상월댁이 옥수수를 알알이 뜯으면서 몇 알을 입에 넣고 씹는다.

상월댁

산사람들 왔다 갔다 하고 시상 귀찮겄소.

까치네댁

어디 산사람들뿐이라우. 경찰도 들어오지.

상월댁

글쎄 얼마나 성가시요. 들어와도 보통 일로 안 들어올 것인디.

까치네댁

그래도 지금은 더 낫소. 전에 같으면 못 살겄습디다. 낮에는 경찰이 와서 파고 살고 밤에는 산사람들이 와서 들끓고 못 살겄습니다. 밥도 밥도 어지간히 삶아내고. 지금 마을에는 닭 한 마리가 안 남았소. 어떤 때는 돼지도 한 마리 잡은 일이 있어라우.
(사이)
그렇게 해먹여 보내야 조용히들 가지 글 안 하면 한쪽에서는 빨갱이라고 닦아세우고 또 한쪽에서는 반동이라고 끌어갈락 하지 못 살 세상답게 살았소. 그런께 낮에는 태극기, 밤에는 인공기, 도통 두 시상을 살었어라우.

상월댁

오메오메! 그래라우잉.

까치네댁

말도 마시오.

상월댁

그런 시상을 살고도 옥수수까지 쪄 와겠소. 아이갸아!

까치네댁

하도 험한 시상을 살고 나께 사람이 더 귀하고 반갑습디다.

상월댁

시상에…

밖에서 인기척이 난다. 이어서 까치네댁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만

아주머니.

까치네댁

오는 것이요.

까치네댁이 쿵 문을 여는 것과 함께 상월댁은 벽으로 몸을 숨킨다.

까치네댁

어서 오시오. 어머니 오셨소.

윤오(깜짝 놀라며)

예?

윤오가 들어서며 벽에 기댄 어머니를 본다.

윤오

뭣 하러 왔소?

상월댁

니 찾으러 왔지 뭣 하러 와야. 가자, 집에.

윤오

언제 와겠소?

상월댁

그저께 왔다. 가자. 당장.

상월댁이 일어서서 갈 차비를 차리려 한다.

윤오

가만히 계십시오. 좀, 숨을 돌리고 나서 이러든가 저러든가 합시다.

까치네댁

그러시오. 때 되었은께 아주 점심들 잡숫고 나서시오.

까치네댁은 윤오와 상월댁을 잡아 앉힌다.

까치네댁

에시오. 옥수수 먹으시오.

까치네댁은 옥수수 바가지를 당겨 윤오 앞으로 놓는다.

윤오

그새 집에는 무고하시오?

상월댁

니가 이렇게 나와 있는디 무고하겄냐. 점심이고 뭐고 어서 가자. 집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겄다.

윤오

그새 어떻게 지내셨소?

상월댁

경황없이 지냈지 어째야. 하루빨리 나와서 자수하고 식구들 얼굴이랑 보고 하지 늙은 어미, 아비는 들볶여 죽으라고 너만 혼자 여기서 자빠졌냐.

윤오

들볶이기는 누구한테 들볶여라우?

상월댁

이 아이 속없는 소리하는 것 봐라이.
(어이 없어 하며 손가락으로 윤오를 가리키며) 지서에서 너를 안 잡으러 다니겄냐! 응? 너를 안 찾아오라겄어? 사흘이 머다고 형사가 찾아오고 니 동생도 불려가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겄다. 너만 찾아오라고 해싼께, 가자, 어서. (사이) 자수를 하고 집안 식구들 살리든가 죽이든가 해라.

윤오

그랬으면 쓰겄소만 지금은 나갈 수가 없어라우. 낮에가 나가다 붙잡히면 끽소리도 못하고 죽소.

상월댁

그럼 같이 있다가 밤에라고 가자. 같이 가야지 나 혼자 가면 너희 아부지 낙심하실 것이다. 지서에서도 더 야단할 것이고.

윤오

밤에는 감시가 더 심한디요. 혼자는 어디를 한 발작도 못 나가게 해라우. 꼭 잡매 다니게 해라우. 그란께 오늘은 어머니 혼자 그냥 돌아가십시오. 사흥 뒤에 사업을 나갈 것 같으께, 사업을 가서 그때 내가 몰래 빠져나가리다.

상월댁

사업이 뭣이라냐.

윤오

나가서 보는 일이 있어라우. 민가에 내려가서 보는 일이 있소. 사흘 뒤에 그 일이 있을 것 같으께 그때 나가서 빠져나가리다. 아무한테도 말 말고 어머니나 혼자 알고 가 계십시오.

상월댁

꼭 와야 한다.

윤오

믿고 계십시오. 그때 나가서 자수할란께.

상월댁

그리 어찌해야 식구가 살지 못 살겄다.

까치네댁

그러건 저러건 점심이나들 잡수고 나서십쇼. 나 곧 밥 지을란께.

껀정다리(소리만)

뭘 하오. 빨리 나오시오

& 장노인의 집 / 안방

장노인은 혼자 빈방을 지키고 있다. 아들은 입산, 딸은 유형사를 따라 가고 상월댁은 불여사 골짝으로 가고 없다. 오대가 잇달아 독자로 내려온 가문 생각에 새삼 한탄스럽다.

장노인(혼잣말)

친혈육은 고사하고 먼 육촌 하나라도 있으면 여북 좋을까. (사이) 걱정해줄 사람은 놔두고 말벗 하나가 없으니…

순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아부지.

장노인

어서 오너라.

순이

(기운 찬 목소리로) 기다리셨죠?

장노인

암, 혼자 안 기다렸겄냐. 가서 어쨌냐? 지서로 갔냐, 딴 디로 갔냐? 또 무슨 말 물어보디야?

순이

앞서처럼 관으로 가자고 합디다.

장노인

그만하기 다행이다. 나는 또 지서로 데려다 어쩌지 않나 하고 혼잣속으로 늙었다. 뭣이락 하디야?

순이

어머니가 오빠를 찾으러 간 것이 정말이고 언제 온다디야고 합디다.

장노인

그래서?

순이

정말이고 오빠는 와봐야 알지 지금 알겠으냐고 했소.

장노인

딴말은 안 물어보디야?

순이

안 물어봅디다. 술만 쳐주고 안주 좀 같이 집다가 왔소.

장노인

잘했다. 그뿐이냐?

순이

오! 깜빡 잊을 뻔 했네.

순이(빙긋이 웃음을 지며)

자기한테 시집올 생각없냐고라우. 이래 봬도 말짱한 새 총각이라고 자기한테 오라고 해라우.

장노인(무슨 횡재인가 싶어)

(웃으면서) 가다가 솔깃한 말도 들어보겄다이.
(사이)
그래 뭣이락 했냐? 가겠다고 했냐?

순이

오메메! 우스운 말씀을 다하시네. 그런 것을 내 맘대로 하겄소. 집에서 알아서 하시지.

장노인(순이에게 바싹 다가 앉으며)

그래 뭐라디야?

순이

집에서 승낙하면 오겠느냐고 합디다.

장노인

그래 뭣이라고 했냐?

순이

웃고 말았지 내가 뭣이라고 더 말했겄소.

장노인

그래.
(사이)
그 말이 농담은 아닌 것 같디야?

순이

모르겄소. 농담이었는지 진담이었는지. 만일 진담이었다고 치면 고리 시집을 보내실라우?

장노인

보낼 만도 하지 어째야.

순이

피이! 뭣이 좋아서라우.

장노인

아니다. 이 시국에 경찰이면 최고 아니냐.

무대: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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