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막
꽁꽁 마음을 다진 상월댁은 마침내 불여사 고랑으로 윤오를 찾아 나섰다. 헌 광주리에 빨래비누 스무 장을 떼어서 행상을 가장했다. 아들을 찾고 딸 신세를 안 그르치려고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나선다. 어느 누가 됐건 이 늙정이를 생매장하랴 하는 자위심도 없지 않았다.
읍에서 유치 쪽을 향해 국도를 따라 세 마장 정도 가자 신작로 가에 떡집이 있고 거기서 다시 한 마장을 이어 나가자 왼편에 황톳길이 길게 나 있다. 그 갈림길에 과자가게가 있다. 상월댁은 일수가 좋으면 간 즉시 아들을 만날지도 모른다 싶어, 가게에 들어가 비누 한 장을 과자와 바꾸어가지고 황톳길로 들어섰다.
& 쑥께로 가는 길
상월댁은 뒤께, 밑께를 지나 쑥께를 향한다. 길 옆에는 산두밭이 있다.
상월댁(혼잣말로)
야야! 이 산두, 잘 되었는 것 봐라.
그 사이 산사람들로 보이는 장년 세 명이 무대에 등장한다. 걸어오는 상월댁을 막고 그중 한 명이 죽창을 들이댄다.
장년 1
뭐하러 어디를 가요?
상월댁(예사롭게)
장사하러 나온 사람이요. 아무 일 아닌께 어서들 가시요.
장년 2
이 난리 속에 장사는 무슨 장사요. 경찰 연락 취하러 댕기는 것 아니요?
상월댁
말 같잖은 소리 하지도 마시요. 하고 많은 사람 다 두고 누가 이런 늙정이를 연락꾼으로 쓰겄소.
장년 1
장산 또 무슨 장사요?
상월댁
비누 팔러 나왔소.
장년 1
어디소 왔소?
상월댁
읍에서 왔소. 아따! 다른 일 아닌께 걱정 말고 가시란 말이오들.
장년 3
어디 가서든지 우리 보았단 말 마시오. 알았소?
상월댁
걱정 말고 가시라 말이오들.
무대: 어두워진다.
& 까치댁네 집
상월댁은 사립문을 밀치고 들어간다.
상월댁
비누 사시오.
아무 반응이 없다. 상월댁 집 여기저기를 훑어본다.
상월댁
비누 사시오. 이 집에 아무도 없소?
뒤안에서 까치네댁이 싸릿대 한 아름을 안고 나온다.
까치네댁
우리는 비누 있소. 안 살라우.
(상월댁을 쳐다 보다가)
아니! 순이 어메 아니요?(반긴다.)
상월댁
예. 심심해서 바람 쐬러 나왔소. 잘 사시오?
까치네댁
장사하러 다니실 양반도 아닌디 웬일이시오? 올라가십시다.
상월댁은 손가락을 세워서 입에 갖다 댄다. 까치네댁은 주위를 둘러 보고 마루에 올라선다. 상월댁도 따라서 마루에 앉는다.
상월댁
여기 와서는 살기가 어쩌시오? 더 나으시오 어쩌시오?
까치네댁
없는 사람이 어디로 가나 같지 별다를 것 있을랍디여. 그새 편안하시요들?
상월댁
시국이 이 모양인디 편안한 사람이 어디 있겄소. 그래 바람도 쐬기 겸 이렇게 나왔소.
상월댁은 입을 갖다 까치댁의 턱 가까이 들이대면서 나직이 묻는다.
상월댁(낮은 목소리로)
우리 윤오 못 봤오?
까치네댁이 주위를 둘러보고 상월댁 손을 꽉 오그려 쥐고 골방으로 데리고 간다.
상월댁
왔습디여?
까치네댁
가끔 와라우. 어제도 와서 찰밥 지어 먹이고 담배 한 갑 줘 보냈소.
상월댁
오메, 오메, 그래라우! 너무너무 아슴찮소. 얼굴이랑은 어쩝디여?
까치네댁
산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좋겄소만 그래도 본 얼굴은 지니고 있습디다.
상월댁
오메에! 그럼 여기 모다 몇 번이나 왔습디여?
까치네댁
확실하게는 모르겄소만 대여섯 번 왔을 것이요. 한참 먹을 나이에 이 산 저 산 쏘다니다 보면 얼마나 허기질 것이오. 그래 뭘 주면 게눈 감추듯 먹고 쫒기듯 가곤 했지라우.
상월댁
그래 지금 어디가 있다고 합디여?
까치네댁
그런 사람이 그런 것을 가르쳐주고 다니겄소… 말을 안 한께 모르기는 해도 이 근처 어디가 있은께 가끔 오는갑지라우.
상월댁
오메! 어디서 뭣하는지 우리 아들 어서 좀 봤으면 쓰겄네.
윤오는 입산한 사람들 따라 서릿골로 도망왔다. 거기서 부대가 편성되어 남부지구 제3기동대 보급반에 배치됐다. 낮에는 아지트나 동굴 속에서 지내고 밤이 되면 야음을 타서 이른바 보급사업을 나다닌다.
까치네댁
모르겄소. 내일이라도 모레라도 또 나올는지.
상월댁
그럼 쓰겄소예. 오면 나를 꼭 좀 만나게 해주시오. 지서에서 날마다 찾아오라고 난리란 말이요. 딸을 다 잡어가고 못 살겄소. 못 살어.
까치네댁
그럼 거처는 사납지만 여기서 이틀이고 사흘이고 있는 데까지 계십시오. 오면 만나게 해드리리다.
상월댁은 비누 석 장을 까치네댁에게 건넨다.
상월댁
너무너무 고맙소. 이래서 다 한 고향 사람이 좋다는 것 아니요.
까치네댁
별말씀을 다하시오. 그래서 타관에 나오면 내 땅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고들 하지 않습디여.
(사이)
그런디 공산당 놈들은 한 겨레를 못 잡아 묵어서 난리를 일으켜 가지고 뭇 백성을 이 고생을 시키요 그랴.
상월댁
난세 난세. 말도 마시요. 아들 하나 딸 하나 있는 것 가지고 이렇게 속을 썩이고 살랍디여.
무대 어두워진다.
& 장노인의 집
유형사가 장노인을 힐책하고 있고 장노인 옆에는 순이가 있다.
유형사
그래 아들을 어디다 숨겨놨소? 아들 내놓으시오.
장노인
숨겨두기는 어디다 숨겨둬라우. 찾으러 갔다니께.
유형사
누가 어디로 찾으러 갔소?
장노인
할멈이 갔소. 불여사 고랑으로 갔소.
유형사
정말이요?
장노인
거짓말할 일이 따로 있제 그런 말을 다 거짓말하겄소. 찾아오면 데리고 가 자수시키리다. 밤도 늦고 했은께 이만 돌아가 쉬시오.
순이
어저씨. 그렇게 하십시오. 울 어머니가 어저께 가셨은께 찾아오면 꼭 데리고 가서 자수시키리다. 염려 말고 돌아가십시오.
유형사(허공을 보며)
그 말을 누가 믿어?
장노인
제 말을 믿으십시오. 찾아오면 꼭 데리고 가리다.
유형사(트집조로)
집이 어디다 숨겨두고 거짓말하는 것 아니야?
장노인
숨기기는 어디다 숨겨요. 아직 오지도 않은 사람을.
유형사
다 알아. 내놔, 내놔, 장윤오 내놔.
장노인
다 알기는 뭣을 알어라우. 백지 애먼 소리 말고 곱게 가시오잉.
유형사
윤오 안 내놓으면 못 가겄소. 내놓으시오. 빨리. 어제도 오고 그저께도 왔답디다. 다 듣고 알고 왔소.
장노인
어허!
(펄쩍 뛰며) 우리 윤오가 오기는 언제 와라우. 누가 그랍디여? 누가 봤답디여? 사람 잡을 소리 다 듣겄네이.
유형사
엄살떨지 말고 내놔요. 응! 끝까지 그러면 영감, 딸 할 것 없이 모조리 잡어갈란께. 딸까지(강조)
장노인
잡어가면 가도 하는 수 없소. 어디서 그런 억지를 꾸면서 숨겨놨다느니 집에 왔다느니 하요. 없은께 못 내놓겠소.
유형사
정말이요?
장노인
정말이요. 어디서 그런 경우 없는 억지를 쓰요. 누가 왔답디여? 누가 봤답디여?
(사이)
우리는 없은께 못 내놓겄소. 잡아갈라면 다 잡아가시오. 어허이! 세상 오래 산께 별꼴을 다 보네.
유형사
영감이 큰소리만 통통 치고 있네. 아주 배짱이야.
장노인
배짱은 무슨 배짱. 아무리 난세이긴 하지만 사람이 경우가 있는 것이지.
유형사
갑시다. 그럼.
유형사가 장노인을 연행하려고 장노인을 향한다. 이때 순이가 나선다.
순이
안 돼요. 늙은 아부지를 데리고 가기는 어디로 데리고 가요. 차라리 내가 가서 죽든가 살든가 하지.
순이가 앞장서서 나선다. 장노인 황망히 몇 걸음 따라 나간다.
장노인
아야,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다이. 무슨 조건을 들어서 무슨 벌을 씌울지 모른께, 고분고분 말을 잘 들어라이. 비위를 맞춰 줘. 그래야 우리가 해를 덜 본다.
(사이)
그래야 너도 좋고 니 오빠도 너그럽게 봐줘.
(사이)
찾으러 갔은께 니 오빠가 내일이라도 모레라도 올지 알겄냐. 알었지?
장노인은 나가는 순이 등을 토닥인다. 순이는 유형사 앞서 고샅길을 나선다. 유형사는 마지못한 듯 순이를 따라간다.
무대: 어두워진다.
& 거리
순이가 앞서 걷고 유형사가 뒤따른다. 유형사가 순이 가까이 다가간다.
유형사
잠깐…
순이가 걸음을 멈춘다.
유형사
서로 가는 게 좋겠어? 관으로 가는 게 좋겠어?
순이
그건 아저씨 알아서 할 일이지 나한테 물을 것 뭐 있어요.
유형사
가 그럼. 이쪽 길루.
순이가 왼쪽 길로 걸어 나서자 유형사가 순이 곁으로 다가붙어서 왼손으로 허리를 감싼다. 순이는 유형사 손을 뿌리치지 않는다.
& 같은 장소 / 요정 성일관
유형사
먼저 올라가.
순이가 먼저 방에 들어가고 유형사는 뒤따라 들어간다. 뒤이어 술상이 들어온다. 동동주에 조기구이, 불고기, 생굴에다 낙지무침이 차려진 상이다.
유형사
그럼 또 한잔 해볼까…
순이
…
유형사
술 쳐.
순이는 주전자를 들어 술을 따른다.
유형사
오빠 찾으러 간 게 정말이야?
순이
정말예요. 걸 거짓말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어머니가 비누장사를 가장해가지고 가셨어요.
유형사
어디루?
순이
불여사 고랑으로 가셨어요. 전에 우리 마을서 살던 사람이 그리 이살 가 설거든요. 그 사람을 믿고 염탐해보려고 갔어요.
유형사가 술을 한 모금 마신다.
유형사
에! 시원하다. 순이도 좀 들어.
순이
먹으께요.
유형사
그래 오빨 찾아올 것 같애?
순이
건 와봐야 알지 모르죠.
유형사
언제 오기루 돼 있나?
순이
이삼 일 후면 어머니가 오시지 않을까 해요.
유형사
찾아오기만 하면 만사가 땡이다. 첫째론 오빠가 살고 순이네가 안정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한 소득이 있어. 아, 어렵게 생각 말고 들라고. 굴, 낙지 모다 좋은 것들이야. 어서 좀 들어.
순이
더한 소득이 뭔데요?
유형사
그놈들 정보야. 정보를 정확히 알아내면 그놈들 아지트를 쳐부수고 일격에 섬멸할 수가 있거든. 그러면 대성공 아니야. 순이네도 큰 포상을 받고 말이야.
순이
오빨 꼭 찾아왔음 좋겄네요.
유형사
글쎄 말이야.
유형사는 남은 술을 마신다.
유형사
순이가 올해 몇이야?
순이
…
유형사
몇이야? 올해.
순이
열아홉이에요. 왜요?
유형사
좋은 나이군. 어때? (사이) 나한테 시집올 생각 없나? 이래 봬도 말짱한 새총각이야.
유형사는 고교를 졸업하고 4년 전에 경찰에 들어왔다. 그는 험한 전란 속에서도 아직 여자 옆에는 가보지 않았다. 그런데 순이한테는 진심으로 마음이 쏠린 것이다. 유형사는 취조 대신 술상 앞에서 프로포즈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유형사
말해봐’
순이
그걸 내 맘대로 하나요.
유형사
집에서 승낙하면 오겄냐?
순이
말씀해보세요.
유형사
아무튼 오빠만 찾아. 오빠만 찾으면 만사가 땡인께.
순이
빌겠어요.
무대: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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