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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와 희곡

오유권 원작, 농우부고장(農牛訃告狀) 제4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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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막

소는 주인이 딱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무심한 눈을 껌벅거리며 일한다. 땀흘려 일하고도 제값을 받지 못하는 소를보며 또갑이는 측은한 생각이 든다. 이 순진무구한 소 본연의 역할을 빼앗은 경운기가 더없이 원망스럽다.

& 탑골 주막

또갑이가 동생 또을이를 기다린다. 술상에는 막걸리 두잔이 있다. 종지기에 김치가 안주로 담겨있다. 또을이가 들어선다.

또갑이

다른 짐 하나나 실었디야?

또을이

가다가 벼 두 섬 얻어 실었습니다. 형님은 누 벼요?

또갑이

용산댁네 것이다. 급하게 돈 쓸데가 있다고 내자고 않냐.

또을이

이렇게 짐이 없고 일이 없으면 앞으로 어떻게 히지라우.

또갑이

긍께 말이다. 배운 도둑이 이것 뿐인디. 쭈욱 한 잔 들거라.
(사이)
오다가 동환이 놈하고 만나서 싸웠다.

또을이

그놈하고만 싸우면 뭣할 것이요.

또갑이

지도 교통순경을 만나서 물어봤는디 짐을 실어도 된닥하드락 않냐.

또을이

그럼 왜 형님한테는 못 싣는다고 했다우?

또갑이

다른 사람인갑더라.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아짐!

주막 아낙

또갑이

나 물어볼 말이 있소.

주막 아낙

무슨 말이요?

또갑이

오늘 경운기가 여그서 교통순경 만나서 뭣이락 했지라우?

주막 아낙

술 한잔 대접합디다.

또갑이

무슨 말 않습디여?

주막 아낙

나는 못 들었어라우.

또갑이

집이가 경운기 주인한테 내 말 했지라우?

주막 아낙

무슨 말을 해라우.

또갑이

앞서 닭놓고 술대접했다고 했지라우?

주막 아낙

또갑이

했지라우?

주막 아낙

또갑이

옛기 여보슈! 아무리 술 파는 아낙네라고 그렇게 입이 싸서 쓰겄소.

주막 아낙

경운기 주인은 담배 사서 넣어줍디다.

또갑이

그래라우이.

무대: 어두워진다.

& 화산 양반네 밭 / 봄

밭갈이가 시작됐다. 소로 밭갈이를 했던 사람들이 경운기가 나오고부터는 경운기로 부탁한다. 그도 그럴것이 삯이 절반 밖에 안 든다.

경운기

딸딸딸딸…(음향)

동환이 조카

속이 떨리요.

동환이

해장이 날 때가 됐는디, 안 나온다.

동환이 조카

어서 식전에 다 끝냅시다.

화산 양반이 며느리를 뒷세우고 등장한다. 며느리는 머리에 인 새참을 내려 보자기를 벗긴다. 동환이와 동환이 조카는 발동을 끄고 밭둑으로 나온다.

화산 양반

그새 이렇게 갈았는가. 늦었네. 앉소들.

된장에 끓인 시래기국에 막걸리가 틉틉하다.

동환이

(국물을 들이키며) 구수하니 좋소야.

화산 양반

밥이랑 놓소이. 갈수록 세상은 살기 좋은 세상이네 그랴! 소 사람이 갈면 며칠씩 걸리는 걸 하루아침에 다 가는 것 보면.

동환이

이래서 기계를 사들인 것인디, 또갑이 그놈이 한사코 못 부리게 하요 그랴.

화산 양반

그것들이 지 조부 때부터 오장이 바른 내림이 아니지. (사이) 담배들 태우소.

동환이

붙입시다.

화산 양반

글페는 영호리 밭을 갈아야 한디, 기계 사정이 어떤가?

동환이

사흘 뒤에까지 맡었어라우.

화산 양반

한참 갈아주소

동환이는 일이 많아 감당하기 어렵다. 밭갈이는 장짐 나르는 것에 비해 약했다. 기계에 무리가 많은데 수입도 장짐에 절반 밖에 안된다. 그래서 장날이면 장짐 나르기는 빠지지 않는다. 반면에 토갑이네는 소 밭갈이마저 일이 없다. 장짐 나르기도, 밭갈이도 경운기가 다 차지하는 것이다. 게다가 마을 주인들에게 욕까지 먹는 신세다. 저렴한 경운기 사용을 방해한다고.

& 또갑이 집

또갑이가 또을이와 함께 상의한다.

또갑이

이대로 말겄냐. 니가 용학 양반하고 중만이 좀 오락 해라.

또을이

무슨 의논할라우.

또갑이

소를 갖다 팔아버리든가 서에 들가서 한계를 명백히 가려 달라고 할란다.

또을이 나가고 또갑이는 아이들을 시켜 술 두되를 사오게 한다.

무대: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진다.(시간이 지남)

용학 양반과 중만이 들어온다.

또갑이

앉읍시다.

용학 양반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겄는가?

중만이

구르마 끄는 우리만이 아니라 쟁기질꾼들도 다 소를 못 부리겄다고 않소.

용학 양반

이녁 논이나 갈라면 모를까 소 키울 것 있겄는가…

중만이

두동이네도 소를 팔든가 머슴을 내보내든가 해야 쓰겄닥 하네요.

용학 양반

그래 같이 서에 가서 한계를 좀 가려달라고 하세.

또갑이

그러고저러고 할 것 없이 첨에 항의서 낸 대로 실력 행사를 합시다.

용학 양반

어떻게?

또갑이

마소를 끌고 가서 탑골 국도 앞을 가로막고 경운기가 못 나가게 합시다. 지놈이 마소를 깔아 뭉게고 나가지는 못할 것 아니요.

중만이

짐 많은 장날이면 꼭꼭 나가서 모조리 가로채니 이것이나 저것이나 해먹겄어.

또갑이

그런께 마소를 동원해서 데모를 벌이자 마시.(중만이를 향해) 이래도 못살고 저래도 못살 바에야 데모라도 해서 우리들 의사를 보이는 것이 안 낫겄는가.

중만이

그럼 쟁기질하는 소도 나오라고 해서 한 며칠 못 나가게 해불까?...

무대: 어두워진다.

& 양수다리 / 길 / 탑골 앞 길

구호

경운기의 횡포를 가로막자.
농촌 유일의 봉사자였던 마소의 공적에 보답하라.

또갑이를 비롯 구르마꾼 중만이 용학 양반 소들이 앞서고 또을이 말도 뒤에 섰다. 쟁기질 소들도 세 마리가 행동을 같이 한다. 무대는 소 형상의 박스가 길을 가로 막는다. 그 무리 저쪽으로 경운기가 ‘딸딸딸딸’ 거리고 오고 있다.

또갑이

이라! 쩟쩟.

중만이

요놈의 새끼!

또갑이

옆으로들 길게 섭시다.

데모 일동은 옆으로 줄을 정비한다. 사이가 뜬 경우는 또을이가 나서서 오와 열을 맞춘다. 경운기가 그 대열 앞에 멈춰선다.

마소들의 울음 소리(음향)가 울린다.

동환이

…(멍하니 쳐다 본다)

마을 주민 1

웬일이라우?

또갑이

건방지게 높은 데 있지 말고 내려와.

동환이

또갑이

못 내려오겄냐?

동환이

또갑이

못 내려와?

동환이

또갑이

내려와, 이 새끼야!(거칠게)

또갑이가 동환이 손을 잡아서 끌어내린다. 동환이는 버티다가 내려선다.

또갑이

너 이 새끼 경운기 부릴라면 이 마소 다 벌어먹여라.

동환이

허허이!

중만이

웃기는! 이 새끼!

한창 실랑이질을 한다.

‘부웅’하고 사이드카 두 대가 날아온다. 박 순경과 양 순경이다.

박 순경

무슨 일이야?

또갑이

옆구리 구호를 보시요.

또갑이가 박 순경에게 구호를 보라고 한다. 동환이는 양 순경한테 간다. 그리고 귓속말을 한다. 양 순경이 박 순경을 데리고 구석으로 가서 의논을 한다. 박 순경이 고개를 끄덕인다.

양 순경

고삐를 풀고 길 비켜주시오. 경운기는 국가에서 장려하고 있어서 다각도로 활용하게 되어 있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또갑이가 주막집 헛간으로 간다. 다른 사람들은 경찰 눈치만 보고 우왕좌왕한다. 동환이는 ‘거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둘러본다.

또갑이 도끼를 들고 자기 소 앞으로 온다. 그리고 도끼로 소의 머리를 친다.

또갑이

이 미련한 놈의 소야. 어서 뒈져라!

또갑이 다시 한번 사정없이 소머리를 친다. 소가 풀썩 앞발을 꿇고 옆으로 나가 쓰러진다. 눈을 뒤집고 버르적거리자 옆에 있던 마을 사람들과 데모꾼들이 우우하니 몰려든다.

양 순경

가시오, 가.

양 순경과 박 순경이 사람들을 밀어낸다. 그리고 또갑이를 데리고 간다.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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