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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와 희곡

오유권 원작, 농민과 시민 제1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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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과 시민

원작: 오유권 소설, 농민과 시민(신동아, 1975. 12)

각색: 공노사노 김병한

등장인물

경천
민태
민태 어머니
이장
안경잡이
양복쟁이
놀러온 강남부인회 회원들
놀러온 젊은 남자와 여자
동네 아이들
동네 청년들: 삼동이, 기수, 인곤이, 병삼이 등

대화 중에 나오는 인물

주요 등장인물 성격

경천: 두루미마을 토박이 청년. 도시 피서객들의 무모한 행위를 행동으로 거부하면서 갈등이 빚어진다. 친구 민태와 품앗이 물품기를 하면서 가뭄을 이겨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건전한 농촌 청년이다.

민태: 충실하게 농사에 전념하는 청년. 친구 경천이보다 융통성이 많다. 역시 도시민들의 무모한 피서놀이에는 반감이 있지만 내놓고 거부하지는 않는다.

이장: 마을 어른으로 솔선수범하는 모범적인 이장. 그는 경천의 의견을 받아들여 도시민들의 피서가 방만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

1960년대 후반 가뭄이 심한 시기로 추정됨

장소

두루미마을, 백사장

# 제1막

S시에서 서쪽으로 약 십 리쯤 나오면 맑은 소남강이 완만하게 굽이쳐 흐르는 왼편에 백사장이 하얗게 뻗어 있고, 그 백사장을 따라 푸른 노송이 무성한 그늘을 이루고 있다. 이 맑고 얕은 소남강을 가운데 끼고 백사장 맞은편에는 파란 들이 천리같이 틔어 있고 그 동편에 두루미 마을이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 가운데 들 / 민태 논 / 두레질

경천과 민태는 품앗이 물대기를 한다. 오늘은 민태 논이다. 가뭄이 심해 논은 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경천과 민태는 두렛줄을 양손에 잡고 물을 품는다. 번갈아 구호를 외치면서 물을 품는다.

경천

어레 구십아홉

민태

어레 오백

경천

담배 한 대 태우세.

민태

천 두레 한하고 품세. 이것 좀 하고 쉬어.

경천과 민태는 두레줄을 놓고 논둑으로 나온다.

경천

세월이 좀먹는가. 천천히 품세. 이 뙤약볕에 천 두레 채우겄는가?

민태

그런 말 마소. 농사가 천하지대본이라네.

경천

농사가 천하지대본이면 농군은 천하지대민이어햐 하는데 농민같이 못 먹고 못 입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두 청년은 ‘파고다’ 담배를 한 개비씩을 태워 문다. 두 사람은 연기를 뿜어 내면서 하늘을 본다. 경천은 소남강 건너편 백사장을 본다. 민태는 소남강 맑고 얕은 물에 노는 물고기를 본다.

경천

치! 시원한 나무 그늘 밑에서 잠이나 한잠 잤으면 좋겄네. 보고도 못 먹는 떡이라더니 우리가 그 쪼 났네.

민태

이 사람아 한가한 소리 마소. 저 나무 그늘 임자는 따로 있네.

경천

나무 그늘 임자가 따로 있다니?

민태

놀러 나오는 피서객들이 임자제 어째.

경천

치!

민태

오늘도 얼마 안 있으면 몇 사람 비치제면.

두 사람 잠시 생각에 잠긴다. 아직 관광지로 개발되지 않아 식당이나 음료수 가게는 없는 곳이다. 놀러오는 사람들이 음식 등을 싸가지고 와서 노는 곳이다.

경천

우리도 언제 그런 세상을 하루나 살어보께.

민태

우리는 백 년을 살아도 그런 세상 하루를 못 살 것이네. 일 년 내 가도 고기 한 근 사먹기가 어려운디 어디가 그러고 살겠는가.

경천

그러고 보면 농민같이 불쌍한 것이 없어. 나라에서 중농정책을 쓴다고 해도 가난한 사람은 평생 가난해이.

민태

그래, 가난은 나라도 못 구제한다고 않던가. 근년에는 해마다 영농자금을 수십억, 수백억씩 뿌려도 한강에 돌 던지기 아니던가.

경천

쉰 김에 막걸리 한잔씩 하세. 이런 된 일을 하면서 맥주, 사이다는 못 먹어도 막걸리까지 굶고 하겄는가.

민태

그러세. 부황 날 꿈꾸지 말고 한 잔씩 하세.

민태가 밥 바구니를 연다. 앙상한 꽁보리밥이 한 그릇 담겨 있고 옆에 김치보시기와 술잔, 수저가 들어 있다. 반찬은 신 열무김치와 된장에 풋고추 뿐이다. 민태는 막걸리 병을 흔들어 사기잔에 채운다. 두 사람은 막걸리를 마신다.

경천

어, 시원하다.

민태

술 맛 좋다.

경천

한 잔 더 따르세.

민태는 경천에게 술을 따른다. 경천도 민태 잔에 술을 따른다. 두 사람은 막걸리를 마시고 다시 일을 하기 위해 일어선다. 경천은 도랑 오른편에 서고 민태는 왼편에 서서 두렛줄을 잡는다.

민태

앞줄을 좀 늦추소.

경천

이만하면 되겄네.

민태

허리를 쭉 펴.

경천

새로 하나.

민태

새로 둘.

경천

새로 셋.

민태

새로 넷.

두레 장단에 맞춰 두레질이 계속된다. 무대가 어두워진다. (사이) 다시 밝아지면서 이십대 남녀가 백사장에 등장한다. 등산화를 신은 남자와 등산모를 쓰고 기타를 맨 여자가 뒤따른다.

 

민태

비쳤네.

경천

한낮에 무슨 염병할라고 쌍쌍이들 다닐까.

민태

남 안 보는 데서 뭣 할라고 그러는 것 아닌가.

경천

환장할 일이시.

백사장에서 두 남녀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로 들어간다. 두 남녀 무대에서 사라지고 경천과 민태는 두 남녀가 노는 모습을 흘깃흘깃 보면서 두레질을 한다.

경천

야, 눈꼴사납구나!

민태

이 사람아, 빈 두레질 마소. 물이 반도 안 들어가네.

경천

저것 좀 보소.

민태

어서 두레질이나 해. 아무리 봐도 자네 것 안 될 것이께.

경천

당장 쫒아가서…

민태

쫓아가서 어째?

경천

콱 안…

여자가 개구리헤엄에 이어 송장헤엄을 친다. 남자가 송장헤엄을 치는 위로 겹친다. 그 모습을 보는 경천은 화가 꼭지까지 치민다.(무대에서 보이지는 않는다.)

경천

저 보소, 저!

민태

보면 뭣한단가. 물이나 품으라 마시.

경천

미치네 미쳐!
(사이)
보고만 못 있겠네. 술 한자 더 하세.

민태

이 사람이 공연히 그래쌌네.

경천

저런 것 보고 일손이 잡히겠는가. 한잔 하세.

경천이가 두렛줄을 놓고 논둑으로 간다. 혼자 술을 따라 꿀떡꿀떡 마신다. 경천은 잔에 술을 따라 민태에게 권한다.

경천

자, 한 잔.

민태

이러다 물 못 품게 생겼네.

경천

못 품으면 말제 어째. 다 같은 청춘인디 어떤 놈은 저러고 놀고 우리는 땡볕에서 물만 품고 있겄는가.

민태

자네도 저런 복을 차고 나제 그랬는가.

경천

그런 말 마소. 저런 놈들 쌀밥 먹여주는 것은 다 우리지. 우리 아니여봐, 저것들이 어디서 쌀밥 먹고 저러고 놀겄는가. 콱 그저…

두 남녀는 물장구를 치고 논다. 이쪽에서 일하는 모습에는 전혀 신경을 안쓰고 껴안았다 풀었다 하면서 눈꼴사납게 논다. 경천은 완전히 무시당한다는 생각에 더욱 불쾌하다. 가뭄에 뙤약볕에서 물을 품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저 지랄을 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민다.

경천

쫓아가서 저놈의 새끼들 산통을 깨뜨려줄까.

민태

아서, 뭘라고 남 노는디 그래.

경천

자네는 속에 불덩이 안 치미는가.

민태

나래서 그런 생각 없겄는가만 물 한 두레라도 더 품제 뭘라고 가서 시비해.

경천은 끝내 분이 치미는 듯 술을 거푸 한 사발 더 들이키고 일어선다.

경천

이놈들아, 저만큼 나가 놀아라.

경천은 손을 갖다 입에 대고 큰 소리로 고함을 친다.

경천

상놈의 새끼들아. 저리 가서 놀아야. 일하는 사람 옆에서 개지랄 말고.
(사이)
썅! 쫓아가면 패 죽일란께. 어서 나가.

두 남녀가 물에서 나와 노송 아래서 준비해온 먹을거리를 내놓고 먹는다. 경천과 민태도 다시 일을 하기 위해 두레쪽으로 간다.

경천

이러니 누가 일하고 있을락 하겠는가.

민태

천복으로 알고 살제 어째.

두 친구는 두레질을 다시 시작한다.

민태

이 물을 품어서.

경천

어레 하나.

민태

대풍년이 들면은.

경천

어레 둘.

민태

햇곡식 잡아다.

경천

어레 셋.

민태

조상께 봉양하고.

경천

어레 넷.

민태

부모께 효도하여.

경천

어레 다섯.

민태는 두레질을 하면서 마을 쪽을 보곤 한다. 무대는 어두워졌다가 밝아진다.

& 같은 장소 / 점심 때 가까이

경천과 민태는 쉬고 있다. 민태는 배가 고팠다.

민태

나는 샛것을 먹었어도 그새 배가 탁 고푸네.

경천

점심 내올라면 아직도 한참 있어야 쓰겄는디.

민태

그래도 나는 배가 고파. 어째 강 건너 가서 사이다나 한 병 얻어먹을까?

경천

저것들한테 가서 사이다를 얻어먹어?...

경천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민태를 향해 눈을 흘긴다.

민태

어쨌단가.

경천

자네는 쓸개가 있는 사람인가 없는 사람인가.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저런 것들 노는 데 가서 얻어먹어?

민태

있는 놈들 것 좀 얻어먹으면 어쨌단가

경천

이 사람아, 호랑이 열두 번 물어가도 제정신 가지고 사소. 저러고 노는 것도 볼 수 없는 디 거기 가서 얻어 묵어?

민태

허! 혼자 흥분해가지고 야단이시. 저희 돈 가지고 와서 저희들 노는디 뭘 그래 싼가.

경천

우리는 뙤약볕에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디 날마다 저러고들 와서 노니 보겄는가. 저녁에 돌아가면 이장한테 말해서 저놈의 노송나무를 다 베어버리라고 해야겠네. 우리 마을 노송나무는 다 베어버리게 해야겠어.

무대: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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