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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와 희곡

모노드라마: 기계방아 도는 마을, 태실이 할아버지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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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드라마: 기계방아 도는 마을, 태실이 할아버지 독백


화자: 태실이 할아버지
무대: 허름한 시골집 마당. 배경으로 기계방아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먼지가 아지랑이처럼 떠다니는 모습이 연출된다.


1막: 먼지 속에서


(태실이 할아버지가 초가집 마당 한가운데 서 있다. 먼지를 털어내며 씁쓸한 표정으로 담배를 꺼내든다.)

태실이 할아버지

“저놈의 방아 소리… (귀를 막는다) 시끄럽고 지겨운 소리가 밤낮으로 귀를 때리는구먼. 방앗간에서 날아온 먼지가 온 동네를 덮었어. 저기 봐, 내 지붕 위에 널어둔 고추도 온통 잿빛이야.

(고추를 한 움큼 들고 내려다보며) 일 년 내내 피땀 흘려 농사지은 고추가 먼지투성이가 됐지. 이런 것들로 무슨 김장을 하겠냐고. (한숨)

옛날에는 이 마을이 참 좋았어. 뒷산 대나무숲에서 새소리가 들렸고, 냇물은 맑았지. 그런데 지금은 뭘 봐도 회색빛뿐이야. 대체 왜 이렇게 돼버린 거냐고.

(눈을 감으며) 마을 사람들이 기계방아를 좋아해. ‘편하다’, ‘좋다’ 하면서 찬양하더군. 씨아 틀고 절구질하던 고생을 덜어줬다며 기수네 이모를 고맙다 하던데… 고맙다니? 저놈의 방아가 마을을 망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야.”

(담배를 피우다 재를 털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방앗간 소리가 점점 커진다.)


2막: 자연을 잃다


(할아버지는 먼지를 막으려는 듯 소매로 입을 가리고 무대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나간다.)

“내가 젊었을 때는 산과 들이 얼마나 푸르렀던지. 그때는 산에서 난 대나무로 바구니를 짜고, 냇물에서 맑은 물로 빨래를 했지. 그런데 전쟁 뒤로 뭐가 남았나?

(목소리가 커지며) 숲은 다 잘려나가고, 대나무숲은 불타버렸어. 거기에 기계방아까지 들어와서 이 마을을 회색으로 물들이고 있다고!

사람들은 뭐라고 하지? 기계가 인간의 삶을 편하게 한다고? 그래, 편하지. 절구 찧는 고생도 없고, 물레 돌리는 수고도 없지. 하지만 그 대가가 뭔 줄 알아? 자연이 죽고, 사람의 마음도 죽는 거야. 먼지가 코로 들어오고, 방앗간 소리가 머릿속까지 파고들면 사람이 어떻게 살겠냐고.”

(두 주먹을 쥐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난 못 참겠어. 나만이라도 이 마을을 지켜야지. 자연을 잃으면 사람도 끝이니까.”


3막: 희생의 대가


(할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는 듯하다가 다시 멈춰 선다. 문지방에 걸터앉아 손주들이 노는 모습을 본다.)

“우리 손주들… 태실이랑 저 어린 녀석은 뭘 먹고 크겠냐. 저 먼지 속에서 놀고 웃고, 나중에 크면 뭐가 남겠어.

(담담한 어조로) 나는 그저 아들놈이든 며느리든, 내 가족들이라도 잘 살길 바랐어. 그런데 방앗간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다 엉망이 됐지. 며느리는 돈 욕심에 집을 나갔고, 아들은 방앗간 빚 갚는다고 기계 밑에서 일하다가 사람 꼴을 잃어버렸어.

(고개를 떨구며) 방앗간 먼지가 사람 목숨을 끊는다는 걸 누구도 말하지 않아. 방앗간은 돈을 벌어다 준다, 편하다, 고맙다… 하지만 난 아니야. 저놈의 기계방아가 마을 사람들 숨통을 조이고 있다는 걸 다들 모른단 말이야.”

(다시 주먹을 쥐고 일어서며 결연한 표정을 짓는다.)


4막: 결단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무대 앞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간다. 방앗간 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는 소리를 향해 외친다.)

“기수네 이모! 들으라고! 저놈의 방앗간을 당장 멈추란 말이야! 돈? 좋아! 편리함? 그거 좋지. 하지만 그게 사람 목숨보다 더 중요하냐? 저 먼지가 우리 아이들 숨통을 끊고, 마을을 죽이고 있다고!

(잠시 침묵. 고개를 젖히며 한숨을 내쉰다.)

내가 혼자서라도 막아낼 거야. 이 마을에 남은 자연을 지키고, 내 손주들이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있게 해야지. 사람들은 날 미쳤다고 할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나는 끝까지 싸울 거야.”

(기계방아 소리가 점점 커지다 갑자기 멈춘다. 그와 함께 무대가 어두워진다.)


엔딩 음악

태실이의 맑은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며, 할아버지의 마지막 독백이 울린다.
“마을을 살리는 건 돈이 아니야. 깨끗한 공기와 푸른 자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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