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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와 희곡

모노드라마: 기수 이모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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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드라마: 기수 이모의 독백

무대 설정

방앗간 기계와 함께 놓인 기수 이모네 방이 무대를 차지한다. 먼지가 부유하는 공기 속에서 기계방아가 윙윙 돌아가는 소리가 배경음처럼 깔린다. 방 한쪽에는 허름한 이부자리와 덕수와 함께 먹은 흔적이 남아 있는 술잔과 접시들이 있다. 기수 이모는 무대 중앙에서 혼자 이야기를 풀어간다.


1장: 방아 돌아가는 밤


(기계 소리가 멀리서 들리며 무대 중앙의 기수 이모가 등장한다. 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앗간 안쪽의 작은 방으로 들어온다. 조용히 덮고 있던 술잔을 바라보며 한숨을 쉰다.)

기수 이모:

“하루가 참 길다. 기계방아를 처음 돌릴 때는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지. 오늘도 새벽까지 방아를 돌리고, 먼지 속에서 일하느라 온몸이 뻐근하다. 그래도… 그래도 이상하게 마음은 가볍다. 참 이상하지."

(술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며 먼 곳을 응시한다.)

“덕수… 덕수 그 사람. 하룻밤 내 방에 머물다 갔다. 그 사람 어쩌면 이렇게 고집스러우면서도 나를 흔들어 놓을까. 처음엔 그저 빚을 받으려고 끌어들였는데… 오늘은… 오늘은 정말 이상했다."


2장: 저녁 식사


(기수 이모는 천천히 술잔을 내려놓고 방 한쪽으로 이동한다. 그녀는 덕수와 함께 했던 저녁 시간을 떠올리며 이야기한다. 작은 상이 무대 한쪽에 놓인다.)

기수 이모:

“덕수가 와서 방앗간 일을 도와줬다. 그 먼지 속에서 땀에 젖은 그를 보면서, 난 밥이라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빚 독촉하려고 부른 사람이었는데, 마음이 그렇게 되질 않았어."

(그녀는 상에 앉아 덕수에게 음식을 권하던 기억을 재현한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덕수와 나눈 대화를 흉내 낸다.)

“‘덕수 씨, 한잔 하세요.’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그 사람,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하더라. ‘이런 대접까지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잔을 기울이더라고. 마치, 뭔가를 털어내려는 사람처럼."

(잠시 침묵한다. 손끝으로 잔을 스치며 깊은 생각에 빠진다.)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안쓰러웠을까. 그 사람이 떠올릴 때마다 난 참을 수가 없어진다. 그 사람 어깨가 너무 무거워 보였어. 그래서… 그래서 오늘은 조금만 내 마음을 허락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3장: 함께한 밤


(기수 이모는 술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방 한쪽의 이부자리를 바라본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지고 조용한 회상에 잠긴다.)

기수 이모:

“그 사람, 오늘 여기서 잤다. 아니, 내가 붙잡았다. ‘이 늦은 밤에 어디 가려고요? 그냥 쉬고 가세요.’ 그랬더니, 덕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천천히 걸어 다닌다. 손끝으로 벽을 스치며 당시의 감정을 떠올리는 듯하다.)

“그 사람의 체온이 이 방에 남아 있는 것 같아. 그가 나와 마주 앉아 잔을 기울이던 모습, 방 한쪽에 누워 잠든 모습. 그 모든 게 내게 얼마나 따뜻했는지 몰라. 남편을 잃고 아들도 떠나고, 나는 참으로 오랫동안 혼자였는데… 이 순간만큼은 혼자가 아니라고 느꼈다."

(기계방아 소리가 멀리서 들리지만 그녀의 목소리로 덮인다.)

“덕수도 아마 느꼈을 거야. 이 방의 공기가 달라졌다는 걸. 내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걸.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아."


4장: 이별의 아침


(기수 이모는 다시 방 중앙에 앉아 이불을 접는다. 그녀의 손길이 느리지만 조심스럽다. 그리고 이불을 천천히 내려놓고 혼잣말을 시작한다.)

기수 이모:

“아침이 되자마자 덕수는 떠났다. 문 밖에서 그의 아버지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 ‘니 여편네가 돌아왔다.’ 순간, 내 심장이 철렁했어. 그러면서도, 그렇겠지 싶었어. 그는 다시 그의 자리로 돌아가겠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과 이부자리를 정리하며 덧붙인다.)

“나도 내 자리로 돌아가야지. 방앗간, 이 먼지 속에서 살아가는 게 내 자리니까. 하지만, 하룻밤 동안 내가 그 사람과 나눈 말과 눈빛, 그리고 그 짧은 온기는… 아마도 내가 오래오래 기억할 거야."

(그녀는 잔을 들고 다시 기계방아로 다가가며 말을 마친다.)

“덕수, 당신은 내가 가진 전부를 가져갈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말은 하지 않을 거야. 나는 여기 남아 방아를 돌릴 거고, 당신은 당신의 삶으로 돌아가겠지. 오늘 밤은 그렇게 끝났어."

(기계방아 소리가 점점 커지고, 무대는 어두워진다.)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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