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드라마: '가난한 형제', 인수의 회상
프롤로그
(무대 중앙에 서 있는 인수의 영혼. 흐릿한 조명 속에 그의 얼굴은 고뇌로 가득하다. 무대에는 낡은 지게와 삽이 놓여 있다.)
인수:
내 이름은 인수다. 꼭두말집의 장남이었고, 아내와 갓난아이가 있는 가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없다. 나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잠시 침묵, 고개를 숙인 채 지게를 어루만진다.)
죽으면 고통도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다.
그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들어줄 사람은 없을지라도, 나는 내 이야기를 남겨야 한다.
가난
(조명이 바뀌며 꼭두말집 내부가 배경에 흐릿하게 나타난다. 인수는 무대 한가운데 쭈그리고 앉아 바닥을 긁적인다.)
인수:
가난은 늘 우리 집안의 주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평수, 그리고 내가 책임져야 할 식구였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냈다. 하지만, 쌀독이 텅 비어가는 소리를 매일 들어야 했다. 그래 맞아, 비어가는 소리가 들렸어. 아내는 젖이 나오지 않아 갓난아이가 울기조차 벅차 했다.
(손을 움켜쥐고 잠시 멈춘다.)
평수는 어린 동생이었지만 구걸이라도 나가겠다고 나섰다.
나는 형이라는 자격도, 가장이라는 이름도 부끄러웠다.
그 어린 놈이 내 대신 빌어먹으러 다니는 걸 보는 게 죽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무게
(배경에 영산강 둑이 나타난다. 인수는 무거운 지게를 지고 비틀거리며 걷는다.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본다.)
인수:
둑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노임을 받을 수 있을까, 오늘은 일거리가 있을까…
하지만 그날도 공사는 중단되었고, 감독은 노임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섰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평수가 나에게 말했다. 형님, 제가 다른 일이라도 나가겠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어린 동생에게 떠넘긴 것 같아서,
그저 고개를 숙인 채 걷기만 했다.
선택
(푸대골 고수머리 영감의 곳간 배경. 인수는 벽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말한다.)
인수:
고수머리 영감의 곳간은 언제나 가득 차 있었다.
그 집 소들은 사람보다 더 잘 먹었으니 말이다.
우리 집은 굶어죽기 직전인데, 나는 생각했다. 이건 도둑질이 아니라 정의라고.
(손으로 벽을 두드리는 시늉을 한다.)
평수와 함께 새끼줄을 걸고 벽에 구멍을 냈다.
곡식 가마니를 하나씩 끌어내리며, 나는 우리 가족이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내가… 새끼줄을 놓쳤다. 그 순간 모든 게 끝났다.
(무릎을 꿇고 손으로 바닥을 친다.)
떨어지고, 숨이 끊어지기 전,
나는 평수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죽음과 후회
(무대는 어두워졌다가 천천히 밝아진다. 인수의 영혼은 다시 중앙에 서 있다. 그의 표정은 고뇌에 찬다.)
인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평수가 나를 업고 집으로 달려가던 모습,
아내가 곡식을 끌고 들어오던 모습을 나는 모두 보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었을까. 나는 그들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다.
가장이라는 이름만 붙이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떠났다.
(고개를 떨군 채)
평수가 내게 말했다. 형님, 밥 한 그릇도 못 먹고 이렇게 죽으실 겁니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몸은 굳어갔고, 그들의 울음소리만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에필로그: 떠남
(조명이 서서히 황금빛으로 바뀌며 배경에 상여가 어렴풋이 비춰진다. 인수는 천천히 걸어나와 관객을 향해 고개를 든다.)
인수:
이제는 떠나야 한다.
내가 남겨야 할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평수는 나보다 강한 사람이다. 아내는 나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아이는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본다.)
나는 그걸 믿으며 떠난다.
(조명이 천천히 꺼지고, 쇼팽의 장송행진곡이 흐른다. 인수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지며 무대는 완전히 어두워진다.)
끝.
'시나리오와 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노드라마: 기계방아 도는 마을, 태실이 할아버지 독백 (38) | 2024.12.11 |
---|---|
오유권 원작 희곡 '기계방아 도는 마을', 요약정리 (36) | 2024.12.10 |
새로 난 주막, 선애의 독백 (39) | 2024.12.08 |
새로 난 주막, 돈재의 독백 (50) | 2024.12.07 |
모노드라마: 새로 난 주막 - 소쿨례의 이야기 (113) | 2024.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