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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와 희곡

오유권 원작, 쑥골의 신화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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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골의 신화

원작: 오유권 소설, 쑥골의 신화(동서문학, 1987. 09)

각색: 공노사노 김병한

등장인물

진오(최진오)
진오 아버지
순금이: 최진오 여동생
이삐: 순금이 친구
동수(염동수)
박골댁: 동수 아내
한세 노인: 동수 아버지
동수 누이 동생
동수 외숙모: 우산리
태봉이: 꼭두말집
문석이: 안골
기철이: 딸고만이
똘배: 푸잽이네
영호, 학수, 따돌이, 상섭이, 탁보, 현식이
지서주임
취조관

대화 중에 나오는 인물

한세 노인: 염동수의 아버지
종구

주요 등장인물 성격

진오(최진오): 소극적이기는 했으나 인공에 부역을 했다. 그러나 한세 노인 살해 현장에는 있지 않았으니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피난을 가지 않는 우직한 시골 청년이다.

동수(염동수): 시골에서 행세를 하는 부자집 장손이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고 면 유지들이나 행세께나 하는 사람들과 어울렸다. 전쟁 중에 인공편에 선 주민들이 설치니까 불안해서 외가로 피신한다.

이삐: 한세 노인 살해된 날 진오가 그 현장을 피해 숨어든다. 이삐는 진오가 왜 자기 집으로 피신한 이유는 모르고 할머니 제사기 때문에 제사를 올리면서 밤을 같이 보낸다.

1950년대 전쟁 중

 

장소

오동나무집, 하양 노루, 호산마을, 우산리, 호산마을, 영보리

# 제1막 / 1950년 9월

경찰 수복에 이어 피란을 간 우익진영의 인사들이 되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한 쑥골 사람들은 내남없이 사시나무 떨듯 하였다. 많이 했든 적게 했든 간에 부역에 가담하지 않은 집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무대 한쪽은 오동나무집, 한쪽은 염동수의 집을 보여준다.

& 오동나무집

진오네 집이다. 진오 아버지가 길지 않은 담뱃대를 물고 있다. 진오는 짚신을 삼고 있고 진오 여동생 순금은 이불을 손질하고 있다.

진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어디로 도피해라우. 안 할라우.

진오 아버지

한물에 싸인 고기란다. 잠시 피했다가 오너라. 누구는 꼭 죄를 지어서만들 도피한다냐.

순금이

그래 참! 도예 오빠랑 근수랑도 아무것도 한 것 없어도 다들 달아나더구만. 오빠도 잠시 피했다가 와.

진오

아니다. 안 갈란다. 나 같은 사람을 잡아다 처벌하면 살아남을 사람 없게야. 안 갈란다.

어저께 경찰이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을 뒷산으로 도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을 뒷산 인사봉은 지세가 험해 도피처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진오도 부역을 전혀 안 했다고 볼 수는 없다. 민청에 가입하여 사람을 잡으로 다니고 가산을 몰수하는 데도 따라다녔다. 한동안은 자위대에도 들어가서 궐기대회를 선동하기도 했다. 동수 씨 가족이 살해되던 날 밤에도 일단은 죽창을 들고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살해 현장에는 나가지 않은 것이다. 헌데 자기더러 경찰을 피해서 도피하라니 가당치 않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진오 아버지

꼭 누구는 죄를 지어서만 도피한다냐. 죄를 지었건 안 지었건 쳐들어오고 물러가고 할 때는 피신을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가 좀 피해 있거라. 어저께 도망가는 사람들 못 보았냐.

& 염동수의 집

염동수는 피란에서 돌아왔다. 그 동안에 자기 가족들은 국민학교 뒷산에서 죽었다. 심지어 아기 밴 며느리까지. 소문에는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쇠스랑으로 찍어 죽였다는 것이다.

동수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내가 피란을 가지 않는 것인디.(가슴을 친다)

동수는 피란을 가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었다. 동수는 반동분자로 낙인 찍혔다. 동수 아버지 한세 노인이 예전에 구장질을 하고 동수는 면의 유지라 해서였다. 형세가 이상하다 느낀 한세 노인은 아들의 피란을 제안한 것이다.

한세 노인(소리만)

애비야, 세상 돌아가는 꼴이 심상치 않다. 당분간 나가서 피했다가 오니라. 집은 늙은 우리가 볼란께 잠시 피했다가 시국이 안정되면들 돌아오니라.

동수(허공을 향해)

부모님을 놔두고 피하기는 어디로 피해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어도 같이 살지 어디로 피해요.

한세 노인(소리만)

아니다. 늙은 우리야 무슨 죄가 있다고 잡어 갈라디야. 젊은 너희들이 위험한께 잠시 나가 있다 오니라.

동수

아닙니다. 안 나갈랍니다. 나도 죄지은 것이 없습니다. 부모님을 놔두고 어디로 피란을 갑니까.
(사이)
(혼잣말로) 그래. 그때 안 갔어야 했어.(사이) 아니 사실은 불안했어… 평소 그네들과 가까이 지내지 않았던 것이 걸렸지…(가슴을 쥐어 뜯으며) 그러나, 이 죽일 놈들이 우리 가족 셋이… 아니 넷을 학살하다니… 이 원수를 꼭 갚으리라.

한세 노인(소리만)

니가 왠만했어야제. 동네 사람들하고는 어울리지를 못했지 않냐. 그래서 니 어미가 생화를 끓이면서 니 대신 부좃돈을 전하곤 했어야.

동수

출입하는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라우.

한세 노인(소리만)

그런 것이 못내 걱정이 되느니라. 갔다가 좀 진정이 되면 그때 와도 되어야.

동수

그래도 늙은 부모님을 두고 어떻게 간다요.
(사이)
어떻게든 안 가고 직접 상대했어야 했는디, 제가 너무 불민했네요.(자기 손으로 자기 머리를 때린다.)

동수 처 박골댁이 등장한다.

박골댁

그날, 잠자리에 들 때 문을 두들겨서 나갔더니 꼭두말집 태봉이가 동네 청년들을 데리고 당신을 찾더란 말이요.

동수

그래 나도 들었네.

박골댁

친척 집에 초상이 나서 문상 갔닥 안 했소. 그랬더니, 대뜸 ‘이 반동, 그새 어디로 피한 것 아니냐’고 따집디다.

동수

그랬지. 그래서 일 나겄다 싶어 다음날 새벽에 우산리 외갓집으로 피신을 했었지.

박골댁

다음날 태봉이가 와서 다시 찾았닥 안하요. 당신도 나도 없으니까, 아버님과 가족들을 데리고 갔닥 안하요.

동수

세 사람을… 아니 태어날 손주까지 네 사람을 학살을 해. 이 빨갱이 새끼들.(이를 간다.)

동수의 누이 동생이 등장한다.

누이동생

오매매 오라버니, 어째 사께라우.

동수

너희들은 어쩌려고 무사했는지 모르겄다?

누이동생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겼어라우. 오빠 선영이 돌봐서 안 죽고 산 것 같아라우. 유명을 달리하신 부모님께 죄송하기 짝이 없군만요.

동수

그럴 것이다. 하면… 내가 안 죽고 살어왔으니 원수는 갚어야제.

누이동생

동네 것들을 다 찢어 죽여도 분이 안 풀리겄소.

동수

허나 우리 식구 몸에 손을 댄 놈이나 골라 찾아야지 무고한 사람까지 잡어다 처치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어느 놈들이 날뛰고 설쳤는지를 알아야지.

누이동생

설치고 돌아다닌 놈들은 거의 다 도망가 버리고 없어라우.

동수

그럼 안 도망가고 남은 사람 가운데서 살해에 가담했음직한 놈들을 대봐라. 어느 어느 놈들이 설치고 돌아디니더냐?

누이동생

딸고만에 기철이, 푸잽이네 똘배, 영호, 학수, 따돌이, 상섭이.

누이동생이 손을 꼽으면서 센다.

누이동생

그리고 탁보, 현식이 모두 여덟 놈인 것이요.

동수

그리고는 없냐?

누이동생

몇 놈 더 있는 것 같소만 도망갔는가 안 보이요. 방금 손꼽은 놈들을 불러다 물어보면 더 나올는지 모르겄소.

동수는 수첩을 꺼내 명단을 적는다.

& 오동나무집 / 이어서

진오 아버지

너는 국민학교에는 안 갔더냐?

진오

야, 나는 나갔다가 동네 개들이 사방에서 짖어대고 날씨도 우중충해서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빠졌어라우.

순금이

그날 오빠가 집에 안 들어왔는디.

진오 아버지

빠졌으면 왜 집에는 안 왔드냐.

진오(망설이다가)

사실은 집으로 오면 또 부르러 올 것 같아서… 고모네 집으로 갈락 했어라우.

진오 아버지

근디.

진오

막 감나무 밑을 지나려니까 사람들 수근거리는 소리가 납디다. 아프단 핑계대고 나왔는디 사람들 눈에 띄면 안되길낄레 길가 이삐네 집으로 들어갔어라우. (순금을 향해) 니 친구 이삐 집.

순금이

그래서 못 들어왔구만…

진오

그날이 이삐네 지사가 있었든가 상이 차려졌드라. 할머니 지사라 하드락만은.

진오 아버지

이삐는 니가 국민학교에 안 간 것을 알겄구나.

진오

야, 이삐네 집에서 피해 있는디 한세 노인네 가족이랑 우익계 인사들이 현장으로 끌려가더란 말이오. 나는 숨죽이고 틈새로 보기만 했어라우.

무대: 어두워진다.

# 제2막

& 지서

앉아 있는 지서주임 앞에 동수가 서 있다.

동수

악질 빨갱이들을 그대로 방치해두고 있을 참이요.

지서주임

그렇게 흥분하실 것이 아니라 이리 잠깐 앉으시오.(의자를 갖다 권한다.)

동수(선 채로)

앉고 어쩌고 할 여유가 없소. 악질 빨갱이들을 당장 조처하지 않겠소?(추궁조로)

지서주임(난처한 표정으로)

그렇지 않아도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는 중이요. 금명간 지시가 오면 잡어다 조산 조처하겠소.
(사이)
희생을 많이 보신 걸로 알고 있는데 치안책임을 맡고 있는 이 사람으로 뭐라고 말할 수가 없소. 진심으로 위로 말씀과 사죄를 드리오.(정중하게 고개 숙인다.)

동수

누가 지금 그런 말 듣자 해서 달려온 것이요. 한 놈이라도 더 달아나기 전에 즉시 체포해다가 총살을 하든가 징역을 보내서 민족진영 유가족들의 한을 풀도록 하시요.

지서주임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고정하십시오. 이 난국에 희생을 본 사람이 어디 댁뿐이겠소.

동수는 수첨을 꺼내 동생이 불러준 악질분자 명단을 적어서 지서주임에게 건넨다.

동수

에시요. 우리 마을 놈들은 이렇소. 다들 입산 도주하고 남은 놈들인데 이 밖에도 몇 놈이 더 있을 듯하니 이자들을 불러다 취조 색출해서 엄벌토록 하시요.

지서주임

알겠습니다. 우선은 평온을 되찾고 입산자들을 권고 자수하는 단계이니 고정하십시오. 금명간 지시가 내려오면 취조 색출해서 엄벌하겠습니다.

무대: 어두워진다.

& 취조실

백열구 전등불이 희부연 사무실을 진오를 비치고 있다. 진오는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취조관

쌔에끼, 바로 말해. 그날 밤 살해 현장에 갔어, 안 갔어.

취조관은 곤봉으로 테이블을 쾅 친다. 진오는 깜짝 놀랜다. 진오는 겁 먹은 표정이다.

진오

안 갔습니다. 나는 절대 안 갔습니다. 구경도 안 했단께요.

취조관

니놈이 끝까지 부인할 작정이냐? 본 사람이 있는디 그래.

진오

누가 봤다고 합디까? 누가 갔다고 합디까? 증인을 대십시오.

취조관

그래도 이 새끼가 바로 안 대네. 에이 요놈의 새끼! 증인을 댈까? 응! 증인을 대?

취조관이 곤봉으로 진오 가슴을 짓찧는다.

진오

대십시오.

취조관

어! 어! 따돌이가 상섭이하고 삽을 메고 살해 현장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는데 그래.

진오

와아!
(사이)
사람 죽일 소리… 나는 그날 밤에 삽은 커녕 몽둥이 하나 안 들고 나갔소. 나오라고 해서 억지로 나갔다가 공기가 험악해서 도로 들어와 버렸소.

취조관

거짓말 마!

취조관은 곤봉으로 다시 진오를 쥐어 박는다.

진오

에그그! 나는 안 갔어라우. 절대 안 갔단께라우.

취조관

이 새끼가 증인을 대도 부인하네.

진오

아닙니다. 따돌이의 말은 백지 애매한 소립니다. 나는 그날 밤에 살해 현장에 간 사실이 없어라우. 하늘에 물어보고 땅의 소리에 귀를 귀울여 보십시오.

취조관

그래도 이 새끼가. 바로 안 댈래. 고문을 당해봐야 알겠나.

진오

고문 아니라 어떤 벌을 씌운다고 해도 안 갔습니다. 안 간 것은 안 갔다고 하지라우. 왜 갔다고 거짓말을 합니까.

무대: 어두워진다.

& 미결수 면회장

진오 동생 순금이가 면회를 왔다. 순금이와 진오가 마주보고 앉아 있다.

순금이

오빠!(눈물을 흘린다.)

진오

울지 마라. 울지 마.

순금이

흑 흑 흑…

진오

집에 별일 없냐?

순금이

아무 일 없어.

진오

마침 니가 면회 오기를 잘했다. 다름 아니고 오늘 집에 가거든 즉시 이삐한테 증인을 서달라고 해라.

순금이

무슨 증인을?

진오

증인 소환장이 가거든 이삐한테 겁먹지 말고 와서 증인을 좀 서달라고 그래라.

순금이

그러면 유리하겄는가?

진오

그래, 형을 안 받고 풀려날 수가 있어야.

순금이

그런다면야 열 번이라도 와서 서라고 하지.

순금이 다소 진정된 표정으로 면회장을 나온다. 무대는 어두워진다.

& 이삐네 집

이삐가 줄에 빨래를 널고 있다.

순금이

이삐야!

이삐

어서 와, 웬일이니?

순금이

오빠 면회 갔다 온다 얘.

이삐

잘 계시던?

순금이

덕택으로.

이삐

어떻게 하고 계시던?

순금이

미결로 있어. 검찰 심문을 받고 있는 중이야.

이삐

나도 한 번이나 면회를 갈 건데 그러나 봐. 다음번에 가면 나랑 같이 갈꺼냐?

순금이

고마운 말이다. 헌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이삐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순금이

응.

이삐

그게 뭔데?

순금이

니가 오빠 증인을 좀 서줘야겠다.

이삐(정색을 하며)

증인이라니?

순금이

오빠가 지금 검찰에서 조사를 받는 중인데 증인이 있으면 유리하겠다는 거야. 동수 씨 가족이 살해되던 날 밤 오빠가 살해 현장에를 안 갔었다는 증인 말이야. 그날 밤 오빠가 늬네 집에 피해 있었다며. 너하고 밤도와 이야기를 하고 제사 음식도 같이 먹고 했다며?

이삐

몰라, 나는.

이삐는 그날이 한세 노인이 살해된 날이라는 것을 잘 모르는 상황이다.

순금이

모르긴 뭘 몰라야. 오빠가 그날 밤 너희 집에서 너하고 같이 지냈닥 하더라. 제사를 모시면서 떡도 같이 먹고 밤내 같이 놀았다던데. 그래, 소환장이 오면 검찰에 출두해서 그걸 좀 말해줘. 오빠는 그날 밤 너희 집에서 나하고 같이 지냈지 절대 나간 일이 없다고 말이야.

이삐

그날이 며칠 날이었는데?

순금이

구월 스무이레. 음력으로는 팔월 그믐이었다고 하더라.

이삐

그렇다면… 날짜가 맞는데.

순금이

그래다오.

이삐

순금이

여비는 우리가 다 대주고 나도 문 앞에싸지는 따라가주께. 가 증인을 서줘. 응!

이삐

글쎄… 이러기도 딱하고 저러기도 딱하다.

순금이

가도라. 너하고 나하고 그럴 사이냐.

이삐

그럼 한 번 생각해보마.

순금이

그래, 꼭 좀 가 도라이.

순금이는 퇴장한다. 이삐는 다시 깊은 생각에 잠긴다. 증인을 서주러 가는 것이 옳으냐 안 가는 것이 좋으냐 하는 번민 때문이다. 순금이와의 사이로 보거나 인간적 도의적인 면으로 봐서는 가주는 것이 좋겠지만 자기 개인의 신상으로 보거나 염동수 씨네 입장을 생각하면 안 가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 처녀의 몸으로 세상 사람들한테서 받을 의혹이 문제였다. 지금 한참 비치고 있는 혼삿말이 끊어지면 더 큰 손상이 없다 싶은 것이다. 이럴까 저럴까 사뭇 번민을 거듭한 끝에 오래 전 이야기가 생각났다. 격전지에서 빚어진 세 병사 얘기였다. 이삐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그새 순금이가 다시 찾아왔다.

순금이

어째, 생각해봤냐?

이삐

생각해봤다. 들오너라.

무대: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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