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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와 희곡

오유권 원작, 쑥골의 신화 제2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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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막

& 지서

앉아 있는 지서주임 앞에 동수가 서 있다.

동수

악질 빨갱이들을 그대로 방치해두고 있을 참이요.

지서주임

그렇게 흥분하실 것이 아니라 이리 잠깐 앉으시오.(의자를 갖다 권한다.)

동수(선 채로)

앉고 어쩌고 할 여유가 없소. 악질 빨갱이들을 당장 조처하지 않겠소?(추궁조로)

지서주임(난처한 표정으로)

그렇지 않아도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는 중이요. 금명간 지시가 오면 잡어다 조산 조처하겠소.
(사이)
희생을 많이 보신 걸로 알고 있는데 치안책임을 맡고 있는 이 사람으로 뭐라고 말할 수가 없소. 진심으로 위로 말씀과 사죄를 드리오.(정중하게 고개 숙인다.)

동수

누가 지금 그런 말 듣자 해서 달려온 것이요. 한 놈이라도 더 달아나기 전에 즉시 체포해다가 총살을 하든가 징역을 보내서 민족진영 유가족들의 한을 풀도록 하시요.

지서주임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고정하십시오. 이 난국에 희생을 본 사람이 어디 댁뿐이겠소.

동수는 수첨을 꺼내 동생이 불러준 악질분자 명단을 적어서 지서주임에게 건넨다.

동수

에시요. 우리 마을 놈들은 이렇소. 다들 입산 도주하고 남은 놈들인데 이 밖에도 몇 놈이 더 있을 듯하니 이자들을 불러다 취조 색출해서 엄벌토록 하시요.

지서주임

알겠습니다. 우선은 평온을 되찾고 입산자들을 권고 자수하는 단계이니 고정하십시오. 금명간 지시가 내려오면 취조 색출해서 엄벌하겠습니다.

무대: 어두워진다.

& 취조실

백열구 전등불이 희부연 사무실을 진오를 비치고 있다. 진오는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취조관

쌔에끼, 바로 말해. 그날 밤 살해 현장에 갔어, 안 갔어.

취조관은 곤봉으로 테이블을 쾅 친다. 진오는 깜짝 놀랜다. 진오는 겁 먹은 표정이다.

진오

안 갔습니다. 나는 절대 안 갔습니다. 구경도 안 했단께요.

취조관

니놈이 끝까지 부인할 작정이냐? 본 사람이 있는디 그래.

진오

누가 봤다고 합디까? 누가 갔다고 합디까? 증인을 대십시오.

취조관

그래도 이 새끼가 바로 안 대네. 에이 요놈의 새끼! 증인을 댈까? 응! 증인을 대?

취조관이 곤봉으로 진오 가슴을 짓찧는다.

진오

대십시오.

취조관

어! 어! 따돌이가 상섭이하고 삽을 메고 살해 현장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는데 그래.

진오

와아!
(사이)
사람 죽일 소리… 나는 그날 밤에 삽은 커녕 몽둥이 하나 안 들고 나갔소. 나오라고 해서 억지로 나갔다가 공기가 험악해서 도로 들어와 버렸소.

취조관

거짓말 마!

취조관은 곤봉으로 다시 진오를 쥐어 박는다.

진오

에그그! 나는 안 갔어라우. 절대 안 갔단께라우.

취조관

이 새끼가 증인을 대도 부인하네.

진오

아닙니다. 따돌이의 말은 백지 애매한 소립니다. 나는 그날 밤에 살해 현장에 간 사실이 없어라우. 하늘에 물어보고 땅의 소리에 귀를 귀울여 보십시오.

취조관

그래도 이 새끼가. 바로 안 댈래. 고문을 당해봐야 알겠나.

진오

고문 아니라 어떤 벌을 씌운다고 해도 안 갔습니다. 안 간 것은 안 갔다고 하지라우. 왜 갔다고 거짓말을 합니까.

무대: 어두워진다.

& 미결수 면회장

진오 동생 순금이가 면회를 왔다. 순금이와 진오가 마주보고 앉아 있다.

순금이

오빠!(눈물을 흘린다.)

진오

울지 마라. 울지 마.

순금이

흑 흑 흑…

진오

집에 별일 없냐?

순금이

아무 일 없어.

진오

마침 니가 면회 오기를 잘했다. 다름 아니고 오늘 집에 가거든 즉시 이삐한테 증인을 서달라고 해라.

순금이

무슨 증인을?

진오

증인 소환장이 가거든 이삐한테 겁먹지 말고 와서 증인을 좀 서달라고 그래라.

순금이

그러면 유리하겄는가?

진오

그래, 형을 안 받고 풀려날 수가 있어야.

순금이

그런다면야 열 번이라도 와서 서라고 하지.

순금이 다소 진정된 표정으로 면회장을 나온다. 무대는 어두워진다.

& 이삐네 집

이삐가 줄에 빨래를 널고 있다.

순금이

이삐야!

이삐

어서 와, 웬일이니?

순금이

오빠 면회 갔다 온다 얘.

이삐

잘 계시던?

순금이

덕택으로.

이삐

어떻게 하고 계시던?

순금이

미결로 있어. 검찰 심문을 받고 있는 중이야.

이삐

나도 한 번이나 면회를 갈 건데 그러나 봐. 다음번에 가면 나랑 같이 갈꺼냐?

순금이

고마운 말이다. 헌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이삐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순금이

응.

이삐

그게 뭔데?

순금이

니가 오빠 증인을 좀 서줘야겠다.

이삐(정색을 하며)

증인이라니?

순금이

오빠가 지금 검찰에서 조사를 받는 중인데 증인이 있으면 유리하겠다는 거야. 동수 씨 가족이 살해되던 날 밤 오빠가 살해 현장에를 안 갔었다는 증인 말이야. 그날 밤 오빠가 늬네 집에 피해 있었다며. 너하고 밤도와 이야기를 하고 제사 음식도 같이 먹고 했다며?

이삐

몰라, 나는.

이삐는 그날이 한세 노인이 살해된 날이라는 것을 잘 모르는 상황이다.

순금이

모르긴 뭘 몰라야. 오빠가 그날 밤 너희 집에서 너하고 같이 지냈닥 하더라. 제사를 모시면서 떡도 같이 먹고 밤내 같이 놀았다던데. 그래, 소환장이 오면 검찰에 출두해서 그걸 좀 말해줘. 오빠는 그날 밤 너희 집에서 나하고 같이 지냈지 절대 나간 일이 없다고 말이야.

이삐

그날이 며칠 날이었는데?

순금이

구월 스무이레. 음력으로는 팔월 그믐이었다고 하더라.

이삐

그렇다면… 날짜가 맞는데.

순금이

그래다오.

이삐

순금이

여비는 우리가 다 대주고 나도 문 앞에까지는 따라가주께. 가 증인을 서줘. 응!

이삐

글쎄… 이러기도 딱하고 저러기도 딱하다.

순금이

가도라. 너하고 나하고 그럴 사이냐.

이삐

그럼 한 번 생각해보마.

순금이

그래, 꼭 좀 가 도라이.

순금이는 퇴장한다. 이삐는 다시 깊은 생각에 잠긴다. 증인을 서주러 가는 것이 옳으냐 안 가는 것이 좋으냐 하는 번민 때문이다. 순금이와의 사이로 보거나 인간적 도의적인 면으로 봐서는 가주는 것이 좋겠지만 자기 개인의 신상으로 보거나 염동수 씨네 입장을 생각하면 안 가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 처녀의 몸으로 세상 사람들한테서 받을 의혹이 문제였다. 지금 한참 비치고 있는 혼삿말이 끊어지면 더 큰 손상이 없다 싶은 것이다. 이럴까 저럴까 사뭇 번민을 거듭한 끝에 오래 전 이야기가 생각났다. 격전지에서 빚어진 세 병사 얘기였다. 이삐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그새 순금이가 다시 찾아왔다.

순금이

어째, 생각해봤냐?

이삐

생각해봤다. 들오너라.

무대: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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