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광(月光)
원작: 오유권 소설 ‘월광(月光)’(사상계 1959.12)
각색: 공노사노 김병한
등장인물
진노인
며느리
큰아이(9)
작은아이(7)
양서방(양봉수)
아들(진이두): 진노인의 아들
대화 중에 나오는 인물
없음
주요 등장인물 성격
진노인: 읍내 다리목에서 지물상을 하다가 육이오 때 폭격으로 집과 재산을 날린 60대 노년. 아들 이두가 인공에 협조하다 입산해서, 사곡동을 거쳐 소반마루까지 옮겨왔다. 며느리와 직접 지은 작은 움집에서 손주 둘과 며느리와 함께 산다.
며느리: 남편 입산으로 혼자 아이 둘과 시아버지를 건사하면 사는 30대 여인. 도붓장수를 하면서 어렵게 살림을 하는데 장에서 만난 양서방을 좋아하게 된다.
양서방: 오일장을 돌면서 체장사를 하는 장똘뱅이. 그는 장사도 하지만 손재주가 있어 키도 만들고 솔도 만든다. 그는 장을 돌다 진노인의 며느리를 만나 서로 좋아하게 된다.
때
1955년 경
장소
소반바우골이 바라다 보이는 보리밭 옆 움집과 귀뚝굴네
# 막이 열림
소반바우골 뒷산 보리밭 가에 비바람에 모지라진 움집이 한 가호 있다. 부엌도 울타리도 없는 방 한 칸의 움집이다. 갈대로 듬성듬성 엮은 지붕에는 잡초가 군데군데 돋쳐 있고 벌레 먹은 참나무들이 들어선 집 오른편에는 휘휘한 산기슭이 뻗혀 있다. 왼편 보리밭을 격한 대송나무 저편에는 소반바우골이 차가운 달빛 속에 희부옇게 떠 보였다. 이 방 한 칸의 움집에서 머리가 센 노인과 젊은 여인이 두 아이를 데리고 산다. 뺏센 눈썹 밑에 두 눈이 푸르스름하고 기골이 장대한 백발 노인은 시아버지요 허리가 가늘고 코 운두가 높은 일견 애동대동해 보이는 젊은 여자는 며느리였다. 그리고 두 아이는며느리의 소생이었다. 진노인은 지난 난리통에 아들과 집을 잃고 이와 같이 거지 모양으로 사는 것이다. 진노인은 깡통을 들고 다니는 것은 아니나, 구걸하며 지내고, 며느리는 도붓장사를 하러 오일장을 다닌다. 새우, 멸치, 미역, 생강 등속을 광주리에 이고 송정리, 광주는 물론 담양, 곡성까지 가서 이틀, 사흘을 묵고 오는 때가 많다.
& 진노인 집
허옇게 센 상투머리의 진노인이 수건을 고깔처럼 둘러쓰고 전대를 어깨에 걸친 다음 지팡이를 옆에 세운채 마루에 앉아 있다. 무대 오른쪽에서 며느리가 아이들을 혼내고 있다.
며느리
이 썩을 놈아, 뒷산에 가서 나무 좀 쳐다 노란께 먼 지랄을 했냐.
오늘도 도부를 치고 저물어서야 돌아온 며느리가 저녁을 지으려는데 나무가 없다. 삶에 터덕거리는 며느리는 화풀이를 애들에게 한다. 며느리의 화 내는 소리에 진노인은 말없이 마루에서 일어나 낫 하나에 바랑을 걸치고 뒷산으로 가기 위해 나선다. 그 사이 다시 며느리가 아이들을 닥달한다.
며느리
썩을 놈의 시상, 오늘이라도 칵 죽어버렸으면… 이런 꼴 저런 꼴 좀 안 보게.
손주 중에 아홉살 배기 사내놈이 할아버지를 따라 나간다. 일곱살 배기 여자 아이는 엄머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다.
며느리(딸을 향해)
느그들은 낮에 뭐했냐. 이 애미는 곡성으로 담양으로 댕기면서 보따리 장사를 하는디…
여자 아이
오빠하고 비석치기 했는디…
며느리
비석치기가 밥 믹여주더냐. 그 시간에 솔방울이라도 모아오제.
여자 아이(주눅 들려)
…
그 사이 진노인과 남자 아이가 돌아온다. 진노인 바랑에는 불소씨개 나뭇가지가 들어있다. 남자아이는 솔가지 두 개를 각 손에 들고 들어온다.
진노인
아가, 니가 고생이 많다.
며느리(외면하며)
아니라우, 아버님 진지상을 올릴라고 본께, 불 필 나무 하나 없단께요. 큰소리 내서 미안하구만이라우.
진노인은 원래 읍내에서 지물상을 했었다. 육이오 동란이 일어난 다음다음 해의 어느 늦은 봄날에 유엔군 폭격으로 집과 재산을 온통 날리고 이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먹고 살기 위해 구걸을 하면서 끼니를 때웠다. 한때 제법 살았던 처지라 챙피해서 아는 지역은 피해서 다녔다. 며느리가 역정을 낸다한들 탓할 수도 없다. 아들놈이 인공에 협조하다 입산을 했던 것이다. 아들놈이 인공 때 주변 사람들에게 못할 짓을 저질러서 그 일을 아는 사람들은 진노인을 보면 한 소리씩 해대는 것이다.
진노인은 저녁을 준비하는 며느리와 아이들을 두고 읍내로 빠지는 길 옆 등성이로 간다.
무대: 어두워진다.
& 읍내길 / 등성이
진노인은 곰방대에 담배를 채워 입에 문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가 피식 웃는다. 며느리가 밤에 오줌동이에 오줌을 눌 때 그 소리를 생각한 것이다.
진노인(혼잣말로)
이런 주변머리 없기는… (사이) 잠을 푹 자먼 그런 소리에 깨지 않을텐디… (사이… 다시 픽 웃으며) 그나 오짐 줄기 소리가 크기도 해. 근디 어제는 소피를 보고 뭣을 하는지 늦게 들어오든디… 요즘 달이 밝은께 제 남편 생각을 할까…
저녁에 소변을 보러 나가는 며느리 때문에 잠을 깨는 것이다. 게다가 오줌동이에 소변을 볼 때 나는 소리가 잠을 더욱 못 들게 하는 것이다. 진노인은 은근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행동을 무안하게 생각하는 중이다.
진노인(떠오르는 달을 보며)
(혼잣말로)이두 그 자석도 저 달을 보고 있으까. 하긴 살아있기 어렵겄제. (일어서며 엉덩이를 턴다.)
진노인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방향을 집 쪽으로 튼다. 그러다가 잠시 주춤한다. 소변을 보고 들어가야 된다는 생각을 한다. 미리 소변을 봐두면 저녁 잠을 더 깊이 들 수 있다는 생각이다.
진노인(혼잣말로)
소피를 보고 들어가자. 그먼 좀 낫겄지.
진노인 무대에서 사라지고, 소변 보는 소리가 들린다.(음향)
& 진노인 집 / 안방
방에는 며느리와 손주 둘이 자고 있다. 며느리는 울목에 벽을 보고 자고 있다. 옷은 입은채다. 아랫목은 진노인이 자도록 비워두고 그 사이에 손주 둘이 누워서 자고 있다. 소리나지 않게 진노인이 들어온다.
진노인(두리번 거리다가 혼잣말로)
불쌍한 것들…
진노인 자기 자리를 잡고 아랫목 벽을 향하고 잠을 청한다. 물론 옷은 입은채다. 며느리와 같이 한 방에서 살기 때문에 옷을 벗고 편히 잘 수가 없다.
진노인(혼잣말로)
저번 날에는 막걸리 한잔 걸치고 자다가 실수를 했는디, 조심해야제…
언젠가 마을을 돌다가 어떤 부잣집 환갑잔치에서 술을 거나하게 얻어먹고 왔었다. 취해서 옷까지 벗고 신세 한탄을 하다 잠이 들었다. 저녁에는 아랫목 자리를 잡고 잠이 들었으나 다음날 아침에 보니 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자신은 며느리가 있어야 할 웃목에 있고 며느리는 아랫목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부터는 진노인과 며느리 사이에는 어딘지 모를 벽이 생겼다. 진노인은 마음에 한사코 걸렸다.
달빛이 밝다. 작은 들창에 달이 비쳐 하얗게 빛난다. (음악: 베토벤의 월광)
며느리 소변을 보기 위해 일어난다. 진노인은 며느리 일어나는 소리에 잠을 깼지만 자는 척 하느라 꼼짝도 하지 않고 벽만 보고 있다. 며느리는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조금 후에 오줌동이에 소변을 보는 소리가 들린다. 음향(소변 보는 소리가 좀 크게 들린다.) 이어서 며느리 침뱉는 소리가 난다.
소리만
툇(침 뱉는 음향)
진노인(돌아 누우며)
…
한참이 지나도 며느리가 돌아오지 않는다.
진노인(혼잣말로)
어제도 그러드만. 오늘도 늦네. 달을 보고 따라올리도 없는디. 즈그 남편 생각이 간절한갑네. 하긴… 달빛이 밝긴 하더구만…
한참이 지나도 며느리는 돌아오지 않는다.
무대가 잠시 어두워졌다가 밝아진다. 진노인은 기다리다 못해 창가로 기어간다. 그리고 봉창에 난 구멍으로 밖을 내다본다. 밝은 달빛이 밖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보리밭은 이삭에 달빛이 부딪혀 부서진다.
진노인(혼잣말로)
달 따라서 언덕배기까지 내려갔나…
진노인은 자기 자리로 돌아와 다시 잠을 청한다.
무대는 다시 어두워졌다가 밝아진다. 시간이 흘렀다. 며느리가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온다. 진노인은 자는 척 꿈쩍도 안한다. 들어오는 며느리한테 분냄새가 난다. 며느리는 두 아이를 조금 아래로 밀쳐내고 자기 자리에 눕는다.
여자 아이
엄니, 어디 갔다 온가? 근디 무슨 분내가 나네.
며느리(묻는 여자 아이 입을 가리며)
쉿! 할아부지 주무신디…
네 식구 모두 조용히 잠을 청한다. 진노인은 잠이 오지 않으나 자는 척 하는 것이 고역이다. 침을 꿀꺽 삼킨다..
진노인(침을 삼키면서)
흐흠(헛 기침)
무대는 어두워지고 베토벤 월광이 배경으로 흐른다.
# 제2막
귀뚝굴네 우산각에서 마을 노인들이 술을 마시고 있다. 지나가는 진노인을 보고 부른다. 노인들에게 술을 대접하는 마흔 살 되어 보이는 중년사내도 있다.
& 귀뚝굴네 우산각
노인1(진노인을 향해)
저 노인, 술 한잔하고 가시요.
진노인은 저마한다. 진노인은 아들의 좌익 활동 때문에 눈총을 받기 때문에 사람들을 가급적 피하면서 산다.
노인2
오시요. 가난이 죄지 얻어 잡수는 것이 무슨 허물이요.
진노인이 주춤주춤하면서 우산각으로 가서 말석에 앉는다. 중년사내가 다른 노인들을 접대한 후에 진노인에게도 술을 따른다. 그러면서 정중히 인사를 한다.
양서방
곡성서 이사 온 양봉수올시다. 진작 한번이나 어르신들을 모시려던 것이 불민하게 됐습니다. 편좌하십시오.
진노인은 상황을 파악했다. 새로 이사온 양이라는 젊은이가 아사 술을 내는 것이라는 것을. 중년사내는 진노인에게 깍듯이 무릎을 꿇고 술을 권한다. 그리고 옆 사랑에는 젊은이들이 있으니 거기도 가서 술을 권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양서방은 무대에서 나간다.
노인3
젊은 사람이 꽤 쏠쏠하네 거.
노인1
점잔하지.
노인2
이곳에 일가붙이가 없다하데.
노인4
친면 있는 사람도 없다든디. 근디 뉘 끄나풀로 이런 산골까지 이사를 올까?
노인3
본디 체장사를 했는디 요즘엔 키도 만들고 솔도 맹근다네.
노인2
홀몸에 자식이라곤 예닐곱 살 먹은 계집애가 하나 있다든디.
노인4
이사를 와서 마을 사람들 대접하는 것 보면 무슨 속셈이 있기는 있는 것 같애.
진노인에게는 이런 얘기가 딴 세상 이야기 같다. 공술이라 기분좋게 마시고 집으로 향했다.
무대: 어두워진다.
& 진노인 집
며느리가 집에서 여자 아이 머리를 곱게 빗기고 있다. 며느리가 투덜대지 않는 것이 고맙다.
진노인(며느리를 향해)
오늘은 안 나갔냐?
며느리
인자 오십니껴.
며느리는 물 묻은 손 그대로 시아버지의 어깨에서 전대부터 내려놓는다.
며느리
시장하신디 곧 상을 봐 올릴께요.
진노인은 마침 술기까지 흔흔하게 오르는 판이라, 신세 한탄 겸해 며느리 위로를 한다.
진노인
팔자가 이렇게까지 기구할 줄이야 꿈엔들 생각이나 했겄냐.
(사이)
이왕 늙은 나는 나지만, 네가 어린 자석들하고 고생이다.
말을 하는 진노인의 눈에 이슬이 맺힌다. 며느리는 개다리상을 내온다. 평소에 보기 힘든 군 꽁치가 있다. 밥에는 쌀이 섞여 있다. 진노인은 상을 물끄러미 보면서 의아한 생각이 드는지 잠시 상을 다시 본다.
며느리
저는 괜찮소만 아부니가 만년에 고상이시요.
진노인
나, 오다가, 마을 앞에서 술 한잔 얻어묵었더니 밥염이 없다. 양 뭐라는 사람이 곡성서 이살 왔다든가… (사이) 그래, 이 고기랑은 뒀다가 애들이나 줘라.
며느리는 잠시 생각 깊은 얼굴을 하다가 산을 본다. 그리고 솥으로 가서 숭늉을 훑는다. 숭늉을 진노인에게 드리고 진노인이 물린 상을 가지고 부엌으로 간다.
무대 어두워진다.
& 진노인 집 / 방 / 저녁
진노인은 쐐~하는 며느리 오줌 누는 소리(음향)에 잠을 깼다. 진노인은 이래서는 안된다면서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뒤이어 속곳 추스리는 소리(음향)까지 들린다. 진노인은 무안하고 불편한 생각을 벗어나기 위해 아랫목 벽을 향하고 잠을 청한다. 며느리가 들어오면 자는 척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진노인
(바로 들어오지 않는 며느리를 생각하며) 오늘도 달이 밝아서 지 남편 생각을 하나…(사이) 달 따라 올 서방도 아닌데,
무대 어두워졌다. 밝아진다. 시간이 흘러도 며느리가 들어오지 않는다. 진노인은 살금살금 기어서 봉창에 뚫린 창구멍으로 눈을 가져간다. 그리고 밖에를 살핀다.
진노인은 봉창으로 달이 밝은 잿더미께를 살핀다. 저편 소반바우골로 뻗힌 대송나무 아래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인다. 진노인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 사람은 며느리다. 또 한 사람은 알지 못할 사내였다. 두 남녀는 보리밭둑에서 서서 달빛을 우러르고 있었다.
진노인(혼잣말)
아하!(두 주먹을 부르쥐었다.)
진노인은 온통 신경을 곤두세워 귀를 기울인다.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며느리(소리만)
달이 밝기도 하요잉!
사내(소리만)
긍께 보름인가 보시.
며느리(소리만)
인자 내려 가시요이.
사내(소리만)
쬐끔만 더 있다 가세.
며느리(소리만)
인자 가시요잉.(며느리가 사내 옷을 털어주는 소리) 아부님 깨실까 무섭소.
며느리가 돌아오는 기미에 진노인은 얼른 자기 자리로 돌아와 벽을 보고 눕는다. 며느리는 조용히 까치발로 조심히 들어와 자기 자리로 간다.
무대: 어두워진다.
& 진노인 집 / 저녁
진노인은 다음 날 동냥을 나가지 않았다. 동냥이건 뭐건 꺼덕하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며느리는 헌 옷을 기우면서 아침부터 누워있는 시아버지 기색을 살핀다.
며느리(진노인 기색을 살피며)
아부니, 일어나 저녁 잡수시오.(어딘지 모르게 주저주저하는 말소리)
진노인
나, 밥염이 없다. 너희들이나 묵어라.
며느리
점심도 안 잡수고 시장해서 쓸 것이요. 어디가 편찮으시오. 일어나 좀 뜨이시오.
진노인은 마지못한 듯 일어난다. 며느리는 상을 봐온다. 손주들과 겸상을 한다. 상에는 미역과 두부를 넣은 쇠고기국에 생선까지 올랐다. 밥은 콩이 듬성듬성 섞인 쌀밥이다. 진노인은 선뜻 수저를 들지 못하는데, 두 손주는 허겁지검 밥을 검어 넣고 있다.
무대: 어두워진다.
& 진노인 집 / 방 / 저녁
손주 둘은 잠을 자고 있다. 진노인은 창문에 난 창구멍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다. 밖에서 만나고 있는 두 남녀를 보고 있는 진노인 주먹을 부르쥐었다.
며느리(소리만)
여기선 안 돼요. 못써요.
진노인은 창에서 눈을 떼고 곰방대에 담배를 문다. 밖에는 달빛이 여전히 밝다. 담배를 끄고 옷매무새를 고치고 자리에 눕는다. 그사이 며느리가 조용히 까치발로 들어와 자기 자리를 잡는다. 며느리의 몸에서 분내가 풍긴다. 진노인은 갓 잠에서 깬 시늉을 하고 소변보러 가는 것처럼 문을 열고 나온다. 며느리는 방에서 가쁜 숨을 안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한다.
무대: 어두워진다.
& 대송나무께 / 저녁 / 밝은 달
진노인은 나오자마자 며느리와 헤어져 내려가는 사내를 따라간다. 소리가 들릴 만한 곳에서 사내를 불러 세운다.
진노인(의젓한 목소리로)
거, 뉘?
사내(깜짝 놀래서)
아~ 예!
진노인은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돌아서는 사내는 귀뚝굴네 양서방이었다. 며느리가 곡성 등지까지 다니면서 도부를 친다는 말은 여러 차례 들어왔다. 그리고 이 사내는 일가붙이는 커녕 친면 있는 사람, 한 사람도 없다는 말도 들었다.
진노인
아하!
(사이)
양서방 아닌가?
양서방(당황하며)
…
진노인(위엄있는 목소리)
대장부 사내가 놀라긴…
(사이)
가게…(손가락으로 뒤를 가리키며)
양서방이 용서받은 도둑처럼 냉큼 돌아가려 한다.
진노인
이 사람아, 이리 가게(진노인 자기 집쪽을 가리키며). 대장부 사내가 일단 품은 여자를 보고 그냥 돌아서 가다니… 난 여기 있을 테니 집으로 가게.
양서방
말씀을 사뢰기 전이라… 실은 제가 저어…
진노인
알겠네, 가게.
그리고 진노인은 읍내길 나가는 등성이를 향한다. 진노인 퇴장한다. 양서방 진노인 집으로 향한다. 진노인이 나간 후에 며느리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양서방은 진노인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양서방(소리만)
놀라지 마소, 나시. 양서방이시.
무대: 어두워진다.
& 읍내길 / 등성이
(음악: 베토벤의 월광)등성이를 거니는 진노인은 달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진노인은 교교한 달빛을 우러르면서 등성이 여기저기를 왔다갔다 한다. 진노인 눈동자에는 세상의 쓴맛 단맛을 다 겪은 지혜가 빛난다. 장대한 기골 뒤에는 오랜 풍상을 겪은 뒤의 허허한 적멸이 엿봉니다. 그 지혜와 적멸이 교교한 달빛을 타고 끝없이 번져갔다. 그 달빛 속에 며느리와 양서방의 모습이 박혀있다.
진노인(혼잣말로)
같이 사는 것이 좋겠지.
진노인이 달을 우러르다가 읍내길에서 들어오는 모퉁이를 본다. 그때 푸른 옷을 입은 사내가 이쪽을 향해 온다. 진노인 가까이 온 사내가 진노인을 본다.
사내(아들 이두)
아버니 아니십니까?
진노인
…
아들
산에서 잽혀서 형을 마치고 나오는 길입니다.
진노인은 칵 말문이 막혔다. 묵묵히 고개를 꺼덕이면서 말머리를 찾는다. 그러나 할 말이 없다.
아들(잿더미께를 가리키며)
아버지, 밤중에 저게 웬 사람들입니까?
진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돌린다. 잿더미께를 넘어가는 두 사람의 등이 보인다.
음악(야상곡 대금 연주)
진노인(나직한 목소리로)
너처럼 나를 위한 사람들이다. 너 없는 대신 나를 섬긴 이 마을 사람들이다.
(사이) 달밤이 좋아서 저렇게 거니는 것이로구나.
음악 계속 흐른다.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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