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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와 희곡

오유권 원작, 혈(穴)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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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穴)

원작: 오유권 소설 ‘혈(穴)’(1958.03)

각색: 공노사노 김병한

등장인물

엄시우(35): 종손으로 4대 독자
시우아내
오일도: 엄시우의 외숙
소년
황생원: 풍수
산역꾼들
계장
소리쟁이
상여꾼들
마포잠방이: 최첨지네 종손
마포잠방이 아내
마포잠방이 아들
최씨네 일행
무안 최씨네 일행
종가 연중
마포잠방이 육촌형
고수머리: 마포잠방이 사촌
마포잠방이 숙부
시우 처당숙
조객
귀동: 시우의 아이
구르마꾼: 시우네 일꾼

대화 중에 나오는 인물

엄상렬: 죽은 전 면장
황풍수: 엄상렬의 묘자리를 잡은 풍수
최씨네 팔대 조부

주요 등장인물 성격

엄시우(35): 전 면장 엄상렬의 아들. 소심하지만 최씨네 종손 마포잠방이의 환심을 사는 수완을 발휘하는 엄씨네 종손이다. 남의 선산에 도장한 묘를 지키기 위해 아내의 조언을 얻어 무난하게 수행한다.

시우 아내: 명당을 지키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엄씨네 종부. 남편 몰래 최씨네 조상묘를 사람들을 시켜 장수산으로 이장하고 시치미를 뗀다.

마포잠방이: 최씨네 종손. 밖으로는 드세게 행동하지만, 되도록 다투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자신의 순한 마음과 종가로서 위신 때문에 갈등한다.

고수머리: 마포잠방이 사촌 동생. 불법 분묘 이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요하게 의심되는 인물을 찾기 위해 애쓴다. 문제의 검은 조끼 소년을 잡아 분묘 이장의 내막을 밝힌다.

 

1950년대 어느해 가을부터 2년간

장소

소롱골과 점등 구암봉과 장수산이 있는 영산강변

# 제1막

읍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하나 넘어가면 점등이라는 장터가 있고 구암봉과 영산강 사이의 소롱골 야산에 있는 최씨네 선산.

& 최첨지네 산소/ 가을 / 산역꾼들

최첨지 8대조 묏머리 위에 새로 들어설 묘를 조성하는 산역꾼들이 일을 하다가 잠깐 쉬고 있다.

산역꾼1

엄씨네 종손이 자식 발복하려고 잡은 자리라고 하데이.

산역꾼2

황풍수하고 2개월을 쏘다니다가 잡았다드만.

산역꾼1

그 집이 손이 귀하긴 해. 오늘 상주가 4대독자라든가.

산역꾼3

그런디 남의 선영 위에다가 써서 되까?

산역꾼2

우리야, 시키는대로 하믄 되지

멀리서 상여 소리가 들린다.

소리쟁이(소리만)

가네가네 아주 가네 우리 동네 엄생원 너와널.

상여꾼들(소리만)

어어허 어어어이야 어허 넘자 너와널.

산역꾼1

이 집이 오대조부 무덤을 다섯 번이나 옮겼다든가?

산역꾼3

고조부는 세 번, 증조부는 열두 번을 옮겼닥하드만

상여 소리가 더 가까이 들린다.

소리쟁이(소리만)

오곡은 도처에 난숙한데 청산고객이 너와널.

상여꾼들(소리만)

어어허 어어어이야 어허 넘자 너와널.

소리쟁이(소리만)

이제 가면 오지 마소 염라대왕과 너와널.

상여꾼들(소리만)

어어허 어어어이야 어허 넘자 너와널.

소리쟁이(소리만)

가세가세 어서 가세 일락서산에 너와널.

상여꾼들(소리만)

너와널 너와널 어리가리 넘자 너와널.

상여는 무대에 등장하지 않고 상여에서 내린 널만 무대로 들어온다. 소리쟁이는 풍경을 흐들면서 고인을 인도한다.

소리쟁이

관음보살

상여꾼들

나무아미타불

소리쟁이

관음보살

상여꾼들

나무아미타불

상주 엄시우가 서두른다. 상여꾼들과 산역꾼들이 협조하여 하관 준비를 한다.

엄시우

어서 끄르고 하관합씨다. 갈 길도들 늦을 텐디.

본래 투장은 하관까지가 힘들다. 일단 하관을 끝내면 아무리 산임자가 안다더래도 신체를 함부로 못 들어내는 법이다.

하관을 마치고 산역꾼들은 묘의 때장을 입힌다.

최씨네 일행(소리만)

남의 선영에 도장하지 마라아.
묏 파지 마라아.

최씨네 일행이 들어온다. 손에는 몽둥이가 들려 있고 눈에는 서슬이 퍼렇다. 들일을 하다말고 올라오는 듯 새까만 일옷 상태다.

마포잠방이(최씨네 종손)

누구 허락을 맡고 여그다 묏 쓰냐?

마포잠방이가 상주 엄시우를 향해 내려칠 기세다. 시우의 외숙과 처당숙이 가로 막는다.

오일도(시우 외숙)

어허이! 이 사람이 성질도 몹시 급하네 그랴.

최씨일행(오일도를 둘러싸며)

아니, 뭣이라고? 아니, 뭣이여… 응! 성질이 급해?... 당장 신체를 파라. 이 자리에서 살인 날 뎅께.

시우처당숙이 마포잠방이 어깨를 끈다.

시우처당숙

잠깐 이리 오이씨요.

마포잠방이

놔.

시우처당숙

잠깐만 오시란 말이요.

마포잠방이

가기는 어딜 가! 당장 파내지 못해?... 아니, 당장 못 파내!

마포잠방이는 사뭇 소매를 걷어부치면서 몽둥이를 휘두른다. 그러다 소리를 지른다.

마포잠방이

응? 엄가 세력이 지금도 장땅인 줄 아능가. 남의 가문을 무시해도 유만부덕이제. 대낮에 갖다 도장을 해. (사이) 허허, 이렇게 기매킨 꼴이 있을까! (사이) 당장 파내라. 만일 안 파내면 신체가 두 번 죽엄할 것이다. (사이) 네놈들이 면장질을 했으면 장땡인 줄 아냐! 당장 파내라.

마포잠방이 사촌 고수머리가 상주인 시우 멱살을 틀어잡으려 한다. 이것을 오일도가 막는다. 조객 한 사람이 나선다.

조객

이왕 이렇게 된 일 널리 좀 생각하씨요.

엄시우(나직하게)

이왕 이렇게 된 일 잘 좀 생각해주씨요.

이미 하관을 끝냈으니 파내지는 못할것이라는 생각에 한숨을 돌린 표정이다. 미리 각오한 일이라 크게 당황하지 않는 눈치다.

무대 어두워지면서 다투는 소리만 남는다.

# 제2막

& 소롱골 마포잠방이 집

이튿날까지 계속된 싸움은 결과적으로 시우네가 이긴 셈이 됐다. 면장과 교장이 보증을 서고 삼 개월 후에 신체를 이장하기로 계약한 것이다. 최씨네는 신체는 물론이고 상주까지도 살해하고 싶었으나 무엇보다 신체를 일단 하관한 뒤였고, 상주와 주변 조객들이 밤새 사화를 청하는 바람에 부득이 계약서로써 응한 것이다. 마포잠방이는 묏자리 양보보다도 사화 과정에서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상대쪽이 앞세운 서장, 면장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의 위력에 압도됐다는 사실에 마음이 찜찜했다. 마포잠방이는 사촌 동생 고수머리를 불렀다.

무대에는 고민에 빠진 마포잠방이가 어찌하면 좋을 지 생각에 잠겨있다. 이어서 고수머리가 등장한다.

마포잠방이

동생, 나 상의할 일이 있네.

고수머리

계약서는 받았다지만 썩 내키지 않지라우. 성님!

마포잠방이

암만 생각해도 저놈들이 엊저녁에 사과한 것하고는 달리 처음부터 우리를 업수이 여기고 온 것만 같어.

고수머리

글쎄 말이요. 나도 한편 그런 생각은 듭디다만…

마포잠방이

이래서야 어디 분해서 쓰겄는가… 그 자리에다 묏을 썼다고 해서 누가 꼭 잘되고 못되고야 할라든가만, 암만해도 안 되겠네.

고수머리

가만있으씨요.

마포잠방이 아들이 들어온다.

마포잠방이 아들

아부지, 학다리서 작은할아부지가 오셔가지고 산소로 올라 갔어라우.

마포잠방이와 고수머리는 부리나케 산소를 향한다.

무대 어두워진다.

& 최씨네 산소

최씨네 일행이 무덤을 둘러싸고 숙부를 향해 섰다. 숙부는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조카들을 나무라는 표정으로 본다.

마포잠방이 숙부

으흥!

마포잠방이

꼭 요. 팔대조부님의 묏머리란 말이요.

마포잠방이 숙부

그래 너희들은 하관할 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디야?

마포잠방이

우리는 그날 마침, 남은 나락을 좀 저들이니라고 모르고 있었는디, 고숙이 어디 갔다 오다 보시고 말씀하지 않소.

마포잠방이 숙부

면장을 지내던 누구?

마포잠방이

엄상렬이라고요.

숙부는 번쩍이는 안경테 너머로 묏등을 한참 본다.

마포잠방이 숙부

그럼 조객들도 많었겄구나?

마포잠방이와 고수머리 함께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이에 건너편에서 나무를 하던 검정조끼를 입은 소년이 차츰 일행 쪽으로 접근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얘기에 팔려있고, 고수머리만 그 소년을 유심히 살펴본다.

마포잠방이 숙부

그럼 조객들은 무슨 말들을 않디야?

마포잠방이

그저 이렇게 된 일 할 수 있느냐고 어떻게 사정을 좀 봐준 것이 낫겠다고들 해쌉디다.

마포잠방이 숙부

그래서 계약서를 썼다?(불만이 가득한 어투로)

마포잠방이

예. 석 달 후에 파기로요.

숙부는 지팡이로 땅을 짓찧으며 ‘삼 개월 후라, 삼 개월 후라…’ 이렇게 연신 혼잣말을 뇌인다.

마포잠방이 숙부

삼 개월 후라… 삼 개월 후라… (사이) 그럼 할 수 없는 사정이었구나… (사이) 이놈들아, 조상 묏머리를 패이고도 삼 개월 후에 파주십사아 하고 계약서를 써 줘?

마포잠방이와 고수머리(고개를 숙이며)

마포잠방이 숙부

에이, 병신 같은 녀러 자식들.

무대 어두워진다. 모두 퇴장한다.

무대 다시 밝아지면서 이번에는 마포잠방이와 고수머리 외에 무안에서 온 일가들이 삽이며 괭이를 들고 등장한다.

무안 일가

(삽을 들이대면서) 저놈들이 면장질만 했으면 장땡인가?... (삽으로 무덤을 파헤칠 기세로) 우리도 다 면장도 있고 서장도 있지 않는가.

종가 연중

(무안 일가를 말리면서) 그래도 천천히 하게 그대로 나두란 마시. 계약서까지 써줬는디, 그래서는 못써.

무안 일가

그까짓 계약서가 무슨 소용 있당가?... 다 죽에부릴라네.

이렇게 법석이는 사이에 나무하는 검정 조끼 소년이 근처에서 갈퀴질을 하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것을 고수머리가 유심히 보다가 일행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종가 연중

워이,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보랑께.

무안 일가

무슨 말을 듣고 말고 해… 파버리제.

종가 연중(무안 일가 어깨를 끌어당기며)

그래도 대낮에 그래서는 못쓴단 마시.

무안 일가

종가 연중

파드라도 밤에 파, 밤에.

이 광경을 지켜보는 검은 조끼 소년에게 조명이 비쳤다가 무대는 어두워진다.

& 시우네 집

시우와 시우 아내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얘기를 나눈다.

시우 아내

그렇게 당신이 약하제 어째라우. 시외숙이 뭐라시든지 밤에 갔다 모셨으면 됐을 것 아니요. 그랬으면 뒤에 혹 저쪽에서 알드라도 사정하기가 더 나을 것 아니요. 그런디 대낮에 갖다 딱 그래 농께, 누구든지 자기들을 업수이 여긴 것 같고 분할 것 아니요.

엄시우

허기사 남의 체면도 좀 곤란하기는 했단 마시.

시우 아내

이녁이 죽는 판에 남의 체면은 무슨 체면이어라우. 그리고 석 달 후에 옮기면 또 돈만 몽땅 들제 그 자리에다 묻었으나마나 아니요.

엄시우

가만있소. 저 사람들이 섟이 좀 삭이면 다시 가서 사정해볼라네.

시우 아내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마씨요.(불만이 가득 담긴 말투로)

엄시우

어쨌든 그만 떠들고 자소 어이. 내가 다 알어서 할 텡께.

무대는 어두워진다. 시우는 잠이 들고 시우 아내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듯이 어두운 가운데 소리가 들린다.

시우 아내(소리만)

당신은 무슨 잠이 그리 많소.

시우(소리만)

나, 통. 잠을 못 자서 그래.

시우 아내(소리만)

당신도 좀 생각해보씨요. 어쨌으면 좋겄는가.

시우(소리만)

아, 내가 다 알어서 할 텡께, 잠이나 자랑께.

무대는 어두운 상태로 시우 아내의 궁리하는 장면을 연상케하는 음악이 흐른다.

음악: 생상스 ‘죽음의 무도’

& 소문

면 일대에 소문이 퍼졌다. 무대는 어두운 가운데 소문 소리가 괴기하게 울린다.

소문

엊저녁에 누가 최첨지네 묏을 파가부렀다네에.

무대 밝아진다

& 엄시우 집

마포잠방이를 비롯 최씨네 일행이 시우 집으로 달려왔다. 마포잠방이 육촌형이 칼을 빼든다.

육촌형

너 이놈, 이리 나오너라. (사이) 이놈 당장 안 나올래!

마포잠방이

(방으로 달려 들어가는 육촌형을 말리며) 성님 (육촌형 어깨를 잡는다.) 잠깐만 기다리씨요. (그리고 시우에게) 잠깐 이리 나오씨요.

시우가 얼떨결해가지고 마당으로 나온다. 시우 아내는 한쪽에서 벌벌 떨고 있다.

육촌형

너 이놈, 엊저녁에 우리 묏 팠냐? 안 팠냐?(칼로 찌르려듯이)

마포잠방이

아따! 성님은 좀 가만있으란 말이요.
(시우를 향해) 엊저녁에 우리 묏을 팠소? 안 팠소?

엄시우

아니! 묏은 무슨 묏이라우.

마포잠방이

소롱골 우리 묏 말이요.

엄시우가 깜짝 놀란다. 사실 시우는 어젯밤 술집에 가서 밤을 새고 아침에 들어왔다.

육촌형

너 이놈! 바른대로 말해라. 당장 배를 찔러 죽일 텡께.

엄시우

허허이! 기막힌 말을 다 듣겄네이. 파기는 누가 무슨 묏을 팠어라우? (사이) 우리는 지금 거그다 묏을 쓰게 한 것도 얼마나 감사한디.

마포잠방이

엄시우

절대 우리는 그런 일 없소.

마포잠방이

여보시오, 큰일 날 것잉께 바른대로 말하씨요잉.

엄시우

허허 이런!

시우는 목이 탄다. 쓴침을 한번 삼킨다.

엄시우

원, 생각해보씨요. 우리는 거그다 묏을 쓰게 한 것만도 감사해서 이제, 오늘이나 낼 새 가서 다시 사과 말씀이라도 좀 디릴까 하는디. 뭣 땜에 그 묏을 팠을 것이요.

마포잠방이

정말이요?

엄시우

정 의심스러우면 바로 저 건네 술집에 가서 물어보씨요. 엊저녁에 거그서 장난을 하니라고 밤샜응께.

마포잠방이

꼭이요?

엄시우

초저녁에 가 가지고 아침에 돌아왔응께. 가 물어보란 말이요.

마포잠방이

그럼, 당신이 사람이라도 사 가지고 묏을 파라고 시킨 것 아니요?

엄시우

천만에 말씀이요.

마포잠방이

엄시우

아니, 내가 무슨 원수졌다고 묏을 팔 것이요. 술집에 가서 물어보면 알 것 아니요.

마포잠방이

가봅시다.

겁 먹은 시우 아내는 남고 시우와 마포잠방이와 그 일행은 모두 퇴장한다. 무대 어두워진다.

# 제3막

일은 해결 기미가 없다. 마포잠방이와 고수머리는 일가친척들과 함께 여러 궁리를 한다. 고수머리는 산소에 기웃거리던 검정조끼를 입은 소년이 의심스러웠다.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소년을 찾아야겠다고 벼렸다.

고수머리

성님! 내가 짐작가는 일이 있구만이라우.

마포잠방이

어디, 생각진데가 있는가?

고수머리

짐작이 가는 데가 있는디, 아직 발설하기는 좀 그렇구만이라우. (사이) 나 갔다가 다시 오께라우.

고수머리는 퇴장한다. 이어서 시우가 선물을 실은 달구지를 몰고 들어온다.

엄시우

어째 아직도 못 잡아겠지라우잉?

마포잠방이

엄시우

참 거, 어떤 몹쓸 사람이 그랬을께라우.

마포잠방이 아내가 술상을 내온다.

마포잠방이

다 운수소관 아니요. 누구를 나물하겄소.

엄시우

아무리 원수니 악수니 해도 남의 묏을 갖다 파부린 사람이 있으께라우.

마포잠방이

그것도 다 업원인 모양이요.

엄시우

그래도 어쨌든 천도가 있는 세상이라. 아무 때 잽혀도 잽힐 것이요.

시우는 3개월 후 이장 계약건을 늦출 이야기를 꺼낼 생각으로 말을 부드럽게 이어간다.

엄시우

올 농사는 어떻게 되었소?

마포잠방이

무던한 폭이요.

엄시우

몇 섬지기나 되신 게라우?

마포잠방이

한두 섬지기나 되는 개비요.

엄시우

얼마 안 된 것이지만 저 나락이나 곳간에 넣두이씨요. 그때 웬만하면 미리 말씀을 드리고 묏을 쓸라던 것이 그리 되었소.

마포잠방이

엄시우

저 널리 접어 생각하이씨요.

마포잠방이

묏을이라우?

엄시우

어째, 이 근처에는 별 주점 같은 것이 없지라우?

마포잠방이

예, 호수가 적어놔서…

엄시우

그럼 잠깐 나가서 바람이나 좀 쐬다 오시께라우?

마포잠방이

나는 별 그런저런 생각도 없소.

엄시우

잠깐만 나갔다 오입씨다.

마포잠방이

엄시우

가깝하시고 한디 잠깐만 나갔다 오입씨다.

두 사람 퇴장하고 무대는 어두워진다.

이틀 후

& 마포잠방이 집 눈 내리는 마당

엄시우가 광목 두 필, 벼 한 구르마와 돼지 한 마리를 싣고 들어온다. 마루에는 마포잠방이와 고수머리가 술상을 받고 있다.

마포잠방이

지난번에는 실례가 많았소이다. 어서 들어오시요.

시우는 잘 됐다 싶다.

엄시우

어떤이요! 제가 되례 실례가 많았습니다.

마포잠방이

어서 고리 앉읍씨다.(자리를 옮겨 앉으며)

고수머리

어떻게 이런 눈길을…
(사이)
잔, 드입씨다.

시우는 잔을 서슴없이 받는다.

엄시우(짐을 내리는 구르마꾼에게)

자네도 이리 와서 한잔 하소.

잔이 오고가고 한다.

엄시우

어째 그 사람은 아직도 못 잡었지라우잉.

마포잠방이

어디가 잽힐 놈들이 그런 짓을 했을 것이요.
(사이)
뼈라도 어따 묻어뒀으면 쓰겄소만…

엄시우

글쎄 말이요. 묏은 늦팠을지라도 뼈나마 묻어둘 것 아니요.

고수머리

어쨌든 암제라도 잡기는 잡을 것이요.

고수머리는 검정조끼 소년에게서 단서를 찾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은연중에 자신감을 내비친다.

엄시우

아무튼 천도가 있는 세상잉께…
(사이)
어서들 드입씨다.

시우 자기편에서 술을 권한다.

시우는 벼르던 말을 꺼낸다.

엄시우

덕분에… (사이) 용케 우리 안에서 태기가 있어라우.

마포잠방이

그래라우…

잠시 침묵이 흐른다.

엄시우

그런디 참, 아버지의 이장을…

마포잠방이는 알 것이라도 안 듯, 그리고 미리 이런 경우의 대답을 미리 준비한 듯 말한다.

마포잠방이

그럼 우선은 그대로 두이씨요.

엄시우

(좋아하는 기색을 감추고)그제 그 집에서 한잔 합시다이.

그들은 술집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야 헤어졌다. 막이 내린다.

# 제4막

엄시우 네는 경사가 났다. 시우 아내가 아들을 출산했다. 아기를 데리고 두 부부는 보다가 웃기다가 하면서 세월아 네월아 한다.

& 엄시우 집

시우 아내

(아이를 보며) 아아나, 아아나.(턱을 꺼덕이며 아기를 웃기다가) 어따아, 내 새끼이~ 많이 크소 웨. (입을 맞추고 고추자지를 잡고 흔들다가 남편 시우를 향해) 참말로 누구 덕인지 아요?

엄시우

자네 덕이제 누구 덕이여.

시우 아내

알긴 아요잉.(묘한 웃음을 지으며)

무대: 어두워진다.

& 점등 시장

마포잠방이와 고수머리가 시제장을 보고 돌아온다. 고수머리는 장속 사람 중에 검정조끼 소년이 있는지를 살핀다. 마침 싸전머리에서 검정조끼 소년이 나온다. 고수머리는 재빨리 소년을 쫒아 잡는다.

고수머리(소년의 목덜미를 잡고)

네 이놈의 새끼.(뺨을 갈긴다.)
(사이)
가자 이놈. 지서로.

소년

고수머리

바른대로 말해라. 이놈아!
(사이)
너 이놈, 늬가 이놈, 작년에 우리 묏 팠지야? 가자.

소년이 울음을 터뜨린다.

소년

나는 안 팠어라우. 나는 안 팠단 말이요.

고수머리

이놈아, 잔소리 말어.
(사이)
그럼 누가 파디야?

소년

오메 오메! 나는 안 팠단 말이요. 엉엉…

고수머리

그렁께 이 자식아, 누가 파디야?

소년

나는 아무것도 모르단 말이여, 엉엉…

고수머리

네 요놈의 새끼(을러대면서)
(사이)
그럼 가. 지서로.

소년(입술에 피를 닦으면서)

나는 안 팠어라우. 귀동이 어메가 작년 가을에 이것만 봐달라고 했어라우. 나무를 하면서 최씨네 사람들이 귀동이 할아버지 묏을 파는가 안파는가 망을 봐달라고 했어라우.

고수머리

그래서…

소년

근디 어느날 얼굴이 큰 사람이 저녁에 묏을 파버리자고 하길래. 그 말을 전했어라우. 그것 뿐인디. 나중에 본께 묏을 옮겼더구만요.

고수머리

그럼 그 묏을 파다가 어쨌다냐?

소년

장수산에 묻었다고 하드만요.

고수머리

그래 그때 그 집 남자는 못 봤냐?

소년

(울먹거리며) 귀동 어메 혼자서 하능거 같드만요. 나도 잘 몰랐어라우. 말만 전했는디… 귀동어메가 사람을 사서 옮겼다고 하드만요.

고수머리

알았다. 그럼.

무대: 어두워진다.

& 재판정

최씨네는 시우 아내를 걸어 고소했다. 마포잠방이는 묏이 패인 지 이미 한 해 전의 일이요, 그것도 사실은 시우의 소치가 아니고 숫제 그의 아내가 남편까지 숨기고 한 여자의 일인데다, 또 그의 남편 시우가 누누이 사의를 표했기 때문에 감정은 많이 수그려졌다. 게다가 8대조부의 뼈를 곱게 모셔 묘표까지 세워서 정중을 다한 것을 알았기에 사람 하나 구하는 셈 치고 그냥 넘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일가들이 고소를 강력히 주장하고 가문의 위신도 생각 안할 수가 없는 일이어서 부득이 고소를 하게 된 것이다. 재판정에는 원고, 피고의 가족과 약간의 방청객이 있다. 마포잠방이는 고수머리와 함께 오른편에 서고, 피고 시우 아내는 왼편에 섰다. 시우 아내는 해쓱한 얼굴로 가끔 등에 업은 아이를 돌아다보곤 한다.

재판관

피고는 방금 증인과 원고가 말한 사실을 시인하는가?

시우 아내

(말 뜻을 잘 못 알아듣고)...

재판관

당신은 방금 이 두 사람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말이요.

시우 아내

예. 다 맞소.

한 손으로 아기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머리카락을 치켜올리면 나직이 대답한다.

재판관

삼 개월 후에 파라고 계약까지 해주었는데 무슨 목적으로 그 묏을 팠던가?

시우 아내

우리는 이때까지 통 자식 하나가 없었어라우. 그래 첨으로 이미 할아부지가 죽어서 거그다 명당이라고 잡어가지고 묻기는 묻었는디, 저 사람들이 억지로 계약서를 써준 것 봉께 암만 생각해도 우리 묏을 갖다 파버릴 것만 같드란 말이요. 그래서 내가 사람을 시켜서 엿을 보게 안했소.

재판관

그래, 그 묏은 왜 팠어?

시우 아내

그래, 그렇게 엿을 보라고 시켰더니 아니사까 그때 저편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서 우리 묏을 막 파벌릴라고 하드락 하지 않소. 그래 곰곰 생각항께, 저편 사람들이 우리 묏을 파기 전에 우리가 몬자 저편 묏을 파버리면 그 판에 저 사람들이 정신을 잃고 우리 묏 같은 것은 팔 생각 없이 자기네 묏만 찾을라고 애쓰겄드란 말이요.

순간 최씨네 일족은 피고의 앙큼한 수완에 마음이 섬뜩했다. 눈빛이 노여움이 돈다.

재판관

그래?...

시우 아내

예, 그래서 할 수 없이 파가지고 장수산에다 갖다 묻고 표적까지 다 해놨어라우. 그렁께 용서해주씨요. 묏을 갖다 그렇게 파기는 팠어도 그 통에 이렇게 애기를 안 낳소.

피고 시우 아내는 등의 아기를 돌려 재판관에게 보인다.

재판관

그것은 알겠소. 그럼 그때 당신 남편하고는 의논 안 했소?

시우 아내

예, 통 모르게 했어라우. 아무리 남편이지만 그런 말을 하면 일이 뒤집혀질 것 같드란 말이요.

재판관

그럼, 친정어머니하고는 의논했지?

시우 아내

아니라우. 친정어머니하고도 안 했어라우. 엄니가 막 못하게 하는디 내가 억지로 인부를 사가지고 해버렸어라우.

재판관

그래?...

시우 아내

예, 그렁께 좀 용서해주씨요. 나는 상관없지만 이 애기를 어쩔 것이요.

재판관


(사이)
원고 최는 계약을 승인한 후, 많은 사람을 데리고 와서 피고의 분묘를 발굴할려고 했던 게 사실인가?

마포잠방이

그때 먼 디서 온 일가들이 마구 파버리자고 아는걸, 이왕이면 하루 더 기다려서 저편 임재 보고 손수 파 옮기도록 하자고 말렸습니다. 그런디 꼭 이날 밤에 우리 묏이 없어졌습니다.

재판관

그리고 삼 개월이 경과해도 피고의 분묘는 그대로 방치해두었댔지?

마포잠방이

예, 아무튼 벌써 애기까지 배고, 또 우리 무덤은 이미 없어진 것이고 해서 그대로 두었습니다.

재판관

그럼 그대로 두게 하면서 피고측에서 받은 물건은 없는가?

마포잠방이

재판관

받은 물건이 있는가? 없는가?

마포잠방이

있습니다.

재판관

무엇을 받았는가?

마포잠방이

나락 서른 섬하고 광복 두 필 받었습니다.

재판관

그래?... 그리고 피고가 장수산에 묻은 분묘에 묘표까지 세웠다는데 그것은 사실인가?

마포잠방이

사실입니다.

재판관

좋아.

그리고 재판장이 잠시 생각하느라 침묵이 흐른다.

시우 아내

선생님, 용서해주이씨요. 묏도 묏이지만 자손 없는 집에서 이런 애기를 본 것도 방가운 일 아니요.

시우 아내는 다시금 등에 업힌 아기를 돌려 재판관에게 보인다. 등에 업힌 애기가 그 순간 방긋거린다. 그것을 본 재판관이 자기도 모른 새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잠시 후 펜을 들더니 짜장 판결을 내렸다.

재판관

무죄!

무대가 그대로 얼어붙는듯 잠잠하다.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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