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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와 희곡

오유권 원작, 혈(穴) 제4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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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막

엄시우 네는 경사가 났다. 시우 아내가 아들을 출산했다. 아기를 데리고 두 부부는 보다가 웃기다가 하면서 세월아 네월아 한다.

& 엄시우 집

시우 아내

(아이를 보며) 아아나, 아아나.(턱을 꺼덕이며 아기를 웃기다가) 어따아, 내 새끼이~ 많이 크소 웨. (입을 맞추고 고추자지를 잡고 흔들다가 남편 시우를 향해) 참말로 누구 덕인지나 아요?

엄시우

자네 덕이제 누구 덕이여.

시우 아내

알긴 아요잉.(묘한 웃음을 지으며)

무대: 어두워진다.

& 점등 시장

마포잠방이와 고수머리가 시장을 보고 돌아온다. 고수머리는 장속 사람 중에 검정조끼 소년이 있는지를 살핀다. 마침 싸전머리에서 검정조끼 소년이 나온다. 고수머리는 재빨리 소년을 쫒아 잡는다.

고수머리(소년의 목덜미를 잡고)

네 이놈의 새끼.(뺨을 갈긴다.)
(사이)
가자 이놈. 지서로.

소년

고수머리

바른대로 말해라. 이놈아!
(사이)
너 이놈, 늬가 이놈, 작년에 우리 묏 팠지야? 가자.

소년이 울음을 터뜨린다.

소년

나는 안 팠어라우. 나는 안 팠단 말이요.

고수머리

이놈아, 잔소리 말어.
(사이)
그럼 누가 파디야?

소년

오메 오메! 나는 안 팠단 말이요. 엉엉…

고수머리

그렁께 이 자식아, 누가 파디야?

소년

나는 아무것도 모르단 말이여, 엉엉…

고수머리

네 요놈의 새끼(을러대면서)
(사이)
그럼 가. 지서로.

소년(입술에 피를 닦으면서)

나는 안 팠어라우. 귀동이 어메가 작년 가을에 이것만 봐달라고 했어라우. 나무를 하면서 최씨네 사람들이 귀동이 할아버지 묏을 파는가 안파는가 망을 봐달라고 했어라우.

고수머리

그래서…

소년

근디 어느날 얼굴이 큰 사람이 저녁에 묏을 파버리자고 하길래. 그 말을 전했어라우. 그것 뿐인디. 나중에 본께 묏을 옮겼더구만요.

고수머리

그럼 그 묏을 파다가 어쨌다냐?

소년

장수산에 묻었다고 하드만요.

고수머리

그래 그때 그 집 남자는 못 봤냐?

소년

(울먹거리며) 귀동 어메 혼자서 하능거 같드만요. 나도 잘 몰랐어라우. 말만 전했는디… 귀동어메가 사람을 사서 옮겼다고 하드만요.

고수머리

알았다. 그럼.

무대: 어두워진다.

& 재판정

최씨네는 시우 아내를 걸어 고소했다. 마포잠방이는 묏이 패인 지 이미 한 해 전의 일이요, 그것도 사실은 시우의 소치가 아니고 숫제 그의 아내가 남편까지 숨기고 한 여자의 일인데다, 또 그의 남편 시우가 누누이 사의를 표했기 때문에 감정은 많이 수그려졌다. 게다가 8대조부의 뼈를 곱게 모셔 묘표까지 세워서 정중을 다한 것을 알았기에 사람 하나 구하는 셈 치고 그냥 넘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일가들이 고소를 강력히 주장하고 가문의 위신도 생각 안할 수가 없는 일이어서 부득이 고소를 하게 된 것이다. 재판정에는 원고, 피고의 가족과 약간의 방청객이 있다. 마포잠방이는 고수머리와 함께 오른편에 서고, 피고 시우 아내는 왼편에 섰다. 시우 아내는 해쓱한 얼굴로 가끔 등에 업은 아이를 돌아다보곤 한다.

재판관

피고는 방금 증인과 원고가 말한 사실을 시인하는가?

시우 아내

(말 뜻을 잘 못 알아듣고)...

재판관

당신은 방금 이 두 사람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말이요.

시우 아내

예. 다 맞소.

한 손으로 아기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머리카락을 치켜올리면 나직이 대답한다.

재판관

삼 개월 후에 파라고 계약까지 해주었는데 무슨 목적으로 그 묏을 팠던가?

시우 아내

우리는 이때까지 통 자식 하나가 없었어라우. 그래 첨으로 이미 할아부지가 죽어서 거그다 명당이라고 잡어가지고 묻기는 묻었는디, 저 사람들이 억지로 계약서를 써준 것 봉께 암만 생각해도 우리 묏을 갖다 파버릴 것만 같드란 말이요. 그래서 내가 사람을 시켜서 엿을 보게 안했소.

재판관

그래, 그 묏은 왜 팠어?

시우 아내

그래, 그렇게 엿을 보라고 시켰더니 아니사까 그때 저편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서 우리 묏을 막 파벌릴라고 하드락 하지 않소. 그래 곰곰 생각항께, 저편 사람들이 우리 묏을 파기 전에 우리가 몬자 저편 묏을 파버리면 그 판에 저 사람들이 정신을 잃고 우리 묏 같은 것은 팔 생각 없이 자기네 묏만 찾을라고 애쓰겄드란 말이요.

순간 최씨네 일족은 피고의 앙큼한 수완에 마음이 섬뜩했다. 눈빛이 노여움이 돈다.

재판관

그래?...

시우 아내

예, 그래서 할 수 없이 파가지고 장수산에다 갖다 묻고 표적까지 다 해놨어라우. 그렁께 용서해주씨요. 묏을 갖다 그렇게 파기는 팠어도 그 통에 이렇게 애기를 안 낳소.

피고 시우 아내는 등의 아기를 돌려 재판관에게 보인다.

재판관

그것은 알겠소. 그럼 그때 당신 남편하고는 의논 안 했소?

시우 아내

예, 통 모르게 했어라우. 아무리 남편이지만 그런 말을 하면 일이 뒤집혀질 것 같드란 말이요.

재판관

그럼 친정어머니하고는 의논했지?

시우 아내

아니라우. 친정어머니하고도 안 했어라우. 엄니가 막 못하게 하는디 내가 억지로 인부를 사가지고 해버렸어라우.

재판관

그래?...

시우 아내

예, 그렁께 좀 용서해주씨요. 나는 상관없지만 이 애기를 어쩔 것이요.

재판관


(사이)
원고 최는 계약을 승인한 후, 많은 사람을 데리고 와서 피고의 분묘를 발굴할려고 했던 게 사실인가?

마포잠방이

그때 먼 디서 온 일가들이 마구 파버리자고 아는걸, 이왕이면 하루 더 기다려서 저편 임재 보고 손수 파 옮기도록 하자고 말렸습니다. 그런디 꼭 이날 밤에 우리 묏이 없어졌습니다.

재판관

그리고 삼 개월이 경과해도 피고의 분묘는 그대로 방치해두었댔지?

마포잠방이

예, 아무튼 벌써 애기까지 배고, 또 우리 무덤은 이미 없어진 것이고 해서 그대로 두었습니다.

재판관

그럼 그대로 두게 하면서 피고측에서 받은 물건은 없는가?

마포잠방이

재판관

받은 물건이 있는가? 없는가?

마포잠방이

있습니다.

재판관

무엇을 받았는가?

마포잠방이

나락 서른 섬하고 광복 두 필 받었습니다.

재판관

그래?... 그리고 피고가 장수산에 묻은 분묘에 묘표까지 세웠다는데 그것은 사실인가?

마포잠방이

사실입니다.

재판관

좋아.

그리고 재판장이 잠시 생각하느라 침묵이 흐른다.

시우 아내

선생님, 용서해주이씨요. 묏도 묏이지만 자손 없는 집에서 이런 애기를 본 것도 방가운 일 아니요.

시우 아내는 다시금 등에 업힌 아기를 돌려 재판관에게 보인다. 등에 업힌 애기가 그 순간 방긋거린다. 그것을 본 재판관이 자기 모른 새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잠시 후 펜을 들더니 짜장 판결을 내렸다.

재판관

무죄!
무대가 그대로 얼어붙는듯 잠잠하다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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