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밀밭에서
원작: 오유권 소설 황량한 촌락
옴니버스 1: 모밀밭에서
각색: 공노사노 김병한
등장인물
남편: 소설 속 ‘나’
아내
사내 아이: 인구(6)
여자 아이: 인자(4)
주요 등장인물 성격
남편(나): 영산강변 들판에서 농사짓는 남매를 둔 30대 초 남자. 대대손손 물려받아 짓는 농사에서 어떤 숭고함을 느낀다. 그러나 자식들에게 가난을 물려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고단한 삶이지만 아내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
아내: 남편 못지 않게 선하고 열심히 사는 여인. 남편과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지극정성이다. 걱정했던 자식들은 폭격에 무사했지만 자신이 폭격에 사망한다. 전형적인 조선의 여성상이다.
때
1951년 경(전쟁 중 어느 날)
장소
무등산이 보이는 영산강 주변의 들판
# 막이 열림
아침 해가 반짝이는 언덕배기였다. 옥비녀 낭자머리에 수건을 쓰고 호미를 들고 가는 아내의 뒤를 남편은 밀집모자에 괭이를 메고 내려가고 있다. 어저께부터 맨 모밀밭을 매러 가는 길이다. 다 탄 곰방대를 괭이자루에 톡톡 털면서 내려가다가 어제 매던 모밀밭을 내려다본다.
& 무등산이 보이는 들판
남편과 아내는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전답을 둘러보고 있다. 옛날 갈대밭이었을 초평지를 윗대 할아버지가 땀을 흘려 밭을 만들었고 그것을 대를 이어 후손에게 물려줬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한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다시 아들에게. 그리고 다시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가면서 대대손손 이 땅을 일구고 삶을 영위할 것이다. 그런저런 생각에 코가 시큰해진다. 무등산에는 구름 한 점이 걸려있다.
남편(혼잣말로 중얼거리듯)
옛날 사람들은 참 심이 세었든 모양이여.
아내
대체 참 세었든 모양입디다. 증조할머니만 하드라도 벼 한 섬을 사흘씩이나 걸려서 절구에 찧어냈다 안 합디여.
남편
참 세었든 모양이여.
아내
그런디 요새 사람들은 심은 하나도 없고 머리만 영리해져서 못된 꾀들만 많습디다잉.
남편
사람들이 한사코 우리처럼 매운 꼬치건, 물고기건 대고 묵고, (사이) 잠 같은 것도 함부로 자버려해야 된디. 맨날 간사하게만 살고 있은께.
아내
금매 만날 무슨 새 기계를 맨들었다 해,도 원자탄을 맨들었다 해도, (사이) 무장 살기만 어렵고 도둑만 많아집디다잉.
남편
그런께 우리는 한사코 애들을 소탈하고 튼튼하게 길러이~. 그래야 힘도 쎄고 간사하지 않을 것이여.
두 부부는 일곱 해 전에 만나가지고 그사이 남매를 얻었다. 아들 인구는 여섯 살, 딸 인자는 네 살이다. 난리통이라 두 아이들은 집에 두고 부부가 밭을 매로 나온 것이다. 가뭄에 모심기를 놓쳐 죽이라 끓여 끼니를 이으리라 생각하고 모밀을 심은 것이다. 쌕쌕이(비행기)가 폭탄을 날리기 때문에 며칠 나오지 않다가 어제부터 모밀밭 김매기에 나선 것이다.
남편(괭이를 들고 밭으로 들어가면서)
치! 들에 나오면 전쟁을 안 하고 있는 것 같네이.
아내(치마끈을 묶으면서)
둘이 한 사날 매면 다 매께라우?
남편
김이 하도 짓어서 한 너댓새 매야 다 맬걸.
아내
그런디 오늘도 애기들이 집을 잘 보고 노는지 모르겄소. 나는 암만해도 못 믿업소예.
남편
잘 놀겄제 뭐.
아내
아니 잘 노는 것은 고사하고, 폭탄이라도 떨어지면 얼마나 놀랄 것이요. 그러다 혹 귀창이라도 떨어지면.
남편
우리 같은 농민이 무슨 죄라고 이런디다 폭격을 할라든가. 한 너댓새 동안 눈 딱 감고 매세
아내
참말로오.
(사이)
그런디 당신, 우리 인구가 참 슬기라우잉. 어저께 하고 노는 것을 보면.
어제 아들 인구는 부부가 없는 사이에 집에서 소꼽놀이를 하고 놀았다. 동생 인자가 놀다가 실수 할 때는 오빠 인구가 보살폈다. 어제 일을 끝내고 돌아간 부부는 정답게 놀면서 지낸 남매를 칭찬했던 것이다. 그 생각들을 한다.
남편
오지겄네.
어제 일을 생각하면서 흐뭇해하는 남편 생각에 잠긴다. 저 자식들은 이런 가난한 삶을 물려줘서는 안되는데… 하면서 주위를 둘러본다.
남편
오소, 좀 쉬었다 매게.
남편 괭이를 놔두고 밭뚝으로 나온다.
아내
당신이나 쉬이시요. 나는 어서 어서 맬라우.
남편
오소, 좀 쉬었다 매게. (사이) 그것 좀 더 맸다고 얼마나 더 줄을라든가.(쌈지를 집어다 담배 한 대를 붙인다.)
아내
참, 풀이 무던히도 질었소잉.
아내가 그제야 옆으로 와서 앉는다. 순간 낭자머리 옥비녀가 반짝 빛난다.
남편
글씨 진작 좀 맬것을. 그런 비행기가 무서워서 그랬더니.
아내
어째 당신 샛것 좀 안 자실라우?
남편
벌써 묵어… 한참씩 매다 묵세
그때, 쌕쌕이 폭음이 쑁~ 하고 울리고, 따다다다… 기총사격을 한다.(효과음)
아내
오메!
아내가 남편 등에 얼굴을 묻는다. 남편도 깜짝 놀라 고개를 움추린다. 그러다가 남편은 빠르게 자세를 고쳐 잡는다. 겁을 내는 아내를 안심시켜려는 듯.
남편
그냥 멀리 가네.
남편 태연스레 공방대를 입으로 가져간다. 아내도 공중을 살핀다.
아내
그정, 방금 어따 때렸는지 모르겄소잉.
남편
글씨 오늘은 아주 가까이 때린 것 같네.
아내
혹 집 근처 어따 안 때렸는지 모르겄소.
아내 놀란 눈으로 일어난다. 갑자기 집에 있는 애들 생각에 안절부절한다.
아내
예말이요예, 나 애기들 어쨌으까 무선께 얼런 좀 가볼라우예.
남편
어쨌을라든가만 한번 가 보소.
아내
오메! 이 아이들이 다쳤으면 어쩔꼬잉.
아내는 거의 울상이 되어 신 신을 것도 잊고 맨발로 나선다.
남편도 불안하기는 매일반이다. 아내가 집으로 향한 뒤 남편은 괭이 대신 아내의 호미를 들고 쭈그리고 앉는다. 그리고 호미질을 해본다. 그러다가 호미질이 서툴러 풀을 움켜쥔 왼손을 호미로 찍었다. 불안함이 행동으로 보인다.
남편
어마!
남편은 왼손에 난 호미 자국을 매만진다.
남편(혼잣말로)
왜 아직도 안 온다냐…
남편은 마음이 안 놓인다.
아내(소리만 멀리서)
인구 아버지이.
남편
어어…
아내(소리만)
괜찮애요오.
아내가 나타난다.
남편
아따, 쓰것다!
(사이)
(혼자말 처럼)아무리 먹일 것 입힐 것이 없다만 요행 죽지나 말고들 커야지. (사이) 그래야 나중에 밭 이랑을 사이에 두고 인구는 이쪽에서 며누리는 저쪽 이랑에 서서 오늘 우리들처럼 이곳에 발자국을 남기지.(리드미컬하게 읖조리듯이)
남편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남편(혼잣말로)
어쨋든 한사코 죽지 말고 어서들 커가지고, 너희들만은 이 복 없는 아비 어미들보다 낫고 편한 살림들을 해야지.(말 소리가 점점 줄어듬)
아내
아따 당신!
남편
된참했네.
아내(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아따 당신! 나는
(사이)
이것 좀 보시요, 요.
피투성이가 된 발가락을 내보인다. 급하게 집을 향해 맨발로 가다가 발에 상처가 난 것이다.
남편
쩟쩟, 조심하제.
아내
그래도 나는 지금 발이
(사이)
어따아, 고것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본께 얼마나 오지고 재미있을 것이요에.
남편
쓰겄네.
아내(한숨을 돌리고)
그럼 샛것이나 좀
아내는 밥 바구니를 연다.
남편
그러세.
(사이… 생각나는 것이 있어)
오소, 가만있소.
아내
뭣하시게라우?
남편
도랑에 가서 붕어 새끼나 한 마리 잡어다 반찬하세.
남편과 아내는 도랑으로 향하느라 퇴장한다. (사이) 두 부부의 목소리만 들린다. 도랑에서 물고기를 잡는 소리가 음향으로 들린다. 음악: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중 아침의 기분(Mornign Mood)
남편(소리만)
거깃네, 거기
아내(소리만)
오메에
(사이)
당신, 괴기 잡을라다가 깐딱하면 나까지 잡겄소.
남편(소리만)
허허허허, 저 얼굴 좀 보소이.
아내(소리만)
그런디 당신, 잉어가 참 크요예.
남편(소리만)
크네 글씨, 그놈은 우리가 가서 생으로 묵고 아이들 것 한두 마리 더 잡세.(사이) 근디 그 사이 다 숨어부렀네. 피라미 한 마리가 없네. 우리가 너무 설쳤네.
아내(소리만)
그럼 아이들 것은 이따 갈 때 잡고, 어서 가서 샛밥이나 묵읍시다.
부부 다시 무대에 등장한다. 남편 손에는 잉어가 들려있다.
남편
이놈아, 가만있거라.
부부는 샛것을 먹는다. 남편이 먼저 고추장을 묻쳐 대가리쪽을 아삭 씹는다. 이어서 아내에게 권한다.
남편
자, 자네도 좀 묵소
아내
어째 맛 있소?
남편
맛있고 말고
아내는 잉어를 받아들고 남편이 베어 먹은 다음 대목을 아삭 깨물었다. 그리고 연해 싱긋거리면서 아삭아삭 고깃물을 음미한다.(사이) 그때 쌕쌕이가 쑁~ 하고 내닫더니, 따다다다… 기총소사를 한다.
아내
오메!
아내가 무참히 피를 흘리면서 고개를 떨군다. 남편 쓰러지는 아내를 붙잡는다. 밭이랑이 아내의 피로 빨갛게 물든다. 막이 내린다. 무등산이 보이는 평화로운 들판에 늦은 봄 정경과는 다른 감당할 수 없는 설움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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