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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와 희곡

오유권 원작, 호식(虎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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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식(虎食)

원작: 오유권 소설 ‘호식(虎食)’(1957. 9)

각색: 공노사노 김병한

등장인물

꺽쇠
아이: 꺽쇠 아들
노인
주인노파: 주막주인 여자

대화 중에 나오는 인물

꺽쇠 아버지
꺽쇠 어머니
꺽쇠 아내

주요 등장인물 성격

꺽쇠: 전라도 점등장과 작천장이 가까운 반촌에 사는 40대 백정.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물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 노인을 만나 얘기를 나눈다.

노인: 40년 전에 떠난 고향을 찾은 60대 떠돌이 노년. 해소로 대화 중에 계속 쿨럭거린다. 40년 전, 고향을 떠난 그는 경상도, 평안도, 황해도에서 떠돌다가 돌아와 옛 인연을 찾아 고향에 왔다.

 

1953년

장소

전라도 어느 반촌 및 점등 느티나무 고개와 주막

# 막이 열림

읍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하나 넘어가면 점등이라는 장터가 있고 거기서 다시 두 마장을 나간 반촌 동구 앞에 꺽쇠라는 백정 집이 있다. 낡은 흙담집에 꺽쇠 내외와 여덟 살배기 사내애 하나가 산다.

& 반촌 동구 앞 / 꺽쇠 집

꺽쇠는 내일 작천 장을 앞두고 일찍 소를 잡을 생각으로 울 가에서 칼을 갈고 있다. 옆에서 아들이 쪼그리고 앉아 아버지 칼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아이(다가와 칼을 가리키며)

아부지, 그 칼로 소 모가지 쿡 찌르나 응?

꺽쇠

아노무 새끼가 쩌리 가래도…

아이는 주춤 물러선다.

아이

아부지, 그렇게 갈면 잘 들지? 까죽도 잘 벗겨지지?

꺽쇠

아, 이노무 새끼야 쩌리 가야. 가서 글 한 자나 외우래도…

아이는 사립문 쪽으로 슬금슬금 피한다.

아이는 학교에서 깔짜 자식이라고 놀림을 받아 학교를 안 가게 됐다. 유독 같은 마을 애들이 더 그러더라는 것이다. 놀림을 받지 않게 하려고 앞길을 오고 가는 마을 애들에게 과자를 사주고 공도 사주었다. 그래도 아이는 영 못 다니고 만 것이다. 꺽쇠는 천자문(千字文)을 사다가 집에서 읽혔다. 그래도 아이는 책보다 소, 개를 죽이는 데 재미가 끌리는 모양이다. 꺽쇠는 아들마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때로는 사정없이 매질도 하지만 소용없다.

꺽쇠(아이를 향해)

응, 이노무 새끼야. 왜 그만큼 일러도 책은 안 보고 이런 디만 뽀짝거리냔 말이다. 나, 자식 새끼 한나 없는 폭 칠란다.

아이는 사립문 밖으로 뛰쳐 나간다.

꺽쇠

(칼 가던 손을 잠시 멈추고 생각에 잠긴다.) 저노무 자식이라도 번듯하게 살아야 할텐디.(사이) 어린 얘들한테도 고개 수그리고 살아서는 안된디…

꺽쇠는 자신이 어떻게 소를 잡고 개를 죽이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저 어릴 적에 홀로 사는 어머니를 따라 이 장 저 장 돌아다니면서 쇠고기를 싸주고 쓸개를 올망졸망 들고 다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자기 역시 친구들이 없었다. 혼자서 돼지 오줌통으로 만든 풍선을 날리며 놀았다. 젊은 사람들이 나이든 어머니에게 대고 ‘하소’ 하는 것도 억울했다. 그러나 꺽쇠 역시 차츰 나이가 들수록 소, 개를 잡는 일밖엔 다른 수가 없었다. 멀리 타향살이라도 갈까, 생각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꺽쇠는 자기에게 이런 일을 물려준 아버지가 몹시 원망스러웠다. 아버지 당신도 생전에는 지금의 자신처럼 숱한 상처를 받았으리라. 초상집 같은 데서도 남은 다 흰 두루마기를 입고 조문하는 그 옆에서 아버지 당신은 칼질이나 하고 있었으리라. 그걸 다시 우리에게 되물려주고 간 아버지. 내일 저녁이 바로 그 아버지의 제삿날인 것이다. 꺽쇠는 해마다 아버지의 제사를 앞두고 더욱 억누를 수 없는 은밀한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쳤다.

생각에 잠긴 꺽쇠를 비추던 조명이 꺼지고 무대는 어둠에 쌓인다.

& 점등 장터로 가는 느티나무 고개

웬 노인이 바랑에 갓을 쓰고 기침을 쿨룩거리며 걸어간다. 뒤에 꺽쇠가 장에서 제삿상에 올리기 위해 산 쇠고기 두 근과 북어 두 마리 및 밤과 대추와 나물거리를 가지고 뒤따라간다. 특히 지게 고리에 매달린 북어 두 마리가 사뭇 목매달듯 아래로 흘러 내려 걸을 때마다 허우적거린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다. 꺽쇠는 비를 피할 곳을 찾다가 다복솔 아래로 들어섰다. 노인도 그리 달려온다. 비가 계속 내린다.

꺽쇠(혼잣말로)

비가 쉬 그칠 것 같지 않네…(일어서서 나아간다.)

노인

노인은 헐렁한 헌 갓이 발을 뗄 때마다 그 장단에 맞추어 우쭐거린다. 그 모습을 보는 꺽쇠는 웃음을 참지못한다. 노인 또한 꺽쇠 장짐이 지게에서 대롱거리는 모습에 속으로 웃고 있다.

꺽쇠(혼잣말로)

웬 노인이 갓을 쫌 단단히 쨉매지 않고…

노인(혼잣말로)

우째 저놈의 명탤 저리 맸노… 쿨룩쿨룩(기침을 독하게 뱉는다.)

노인은 지난날 일이 생각이 나서 잠시 비오는 하늘을 보며 상념에 잠긴다. 그때의 자기 모습이 저 젊은이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 사이 소나기가 멈추고 빨간 석양볕이 눈부시게 내리 비친다. 그러나 건넛산에서는 한 무더기의 비구름이 들을 건너온다. 그것을 본 노인이 중얼거린다.

노인(혼잣말로)

또 비가 오려나.

꺽쇠(혼잣말로)

웬, 때 아닌 가을 쏘내기가, (사이) 다 말린 소가죽 썩힐라고!(그러면서 앞서 걸어간다.)

꺽쇠가 걷다가 비 때문에 미끄러운 길에서 주르르 미끄러진다. 북어 두 마리가 지게 고리에서 훌떡 뛴다.

꺽쇠(혼잣말로)

이 염벵할 노무 고무신이…

꺽쇠는 자신이 미끄러진 원인이 고무신에게나 있는 듯 이렇게 중얼거리며 가랑이를 움켜잡고 도랑으로 간다. 노인은 여전히 갓을 우쭐거리며 달랑달랑 달고 걷는다. 꺽쇠와 노인은 이렇게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주막에 이른다.

무대 어두워진다.

& 주막

꺽쇠는 주막에 들자 짐들을 내려놓고 가랑이부터 짠다. 노인도 자신의 옷 가랑이를 짠다. 꼭 빨래를 짜는 심사들이다. (사이) 노인은 술청 앞으로 가 바랑을 끄른다. 꺽쇠는 물 한 바가지를 얻는다. 꺽쇠는 얻은 물로 북어를 헹군다. 지게 허리에 묶인 주먹만한 쇠고기도 풀어서 다시 싼다. 그러면서 꺽쇠는 문득 옛날 호식(虎食)이란 것이 정말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한다. 해마다 아버지 제사를 앞두고 생각나는 의문이 있었다. 어머니가 운명하기 전에 남긴 얘기 중에 아버지가 호식을 당했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당신과 아버지 사이의 일을 얘기했었다. 가슴에 독수리 문양의 홍점 자국이 있던 꺽쇠 아버지는 하룻밤만 치르고는 집을 나간 것이다. 소문에는 호랑이 밥이 됐다는 날이 사십 년 전 내일이다. 그래서 메 진지라도 올리려고 장을 봐 오는 길이다.

꺽쇠가 길을 나서려다 다시 내리는 비를 보고 망설이다가 주막에 주저 앉는다.

꺽쇠(혼잣말로)

웬 노무 쏘내기가 (사이) 장마 질라고 이러나…

꺽쇠는 쇠가죽 썪힐까보아 염려가 된다.

꺽쇠(혼잣말로)

염벵할 노무 비. (사이) 그럼 주인…나, 여그 막걸리 한 잔 주씨요.

꺽쇠가 돌아서 화로 곁으로 앉는다. 주인노파가 주전자 뚜껑을 열어 본다.

주인노파

얼마나 디릴께라우?

꺽쇠

딴 대로 따시요.

꺽쇠는 막걸리를 두 잔 마신다. 화롯가에서 마신 술기운이 삽시에 후끈거리기 시작했다. 실날같은 김발이 여전히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옷을 말리는 것이다. 점점 등이 후끈해왔다. 소맷자락도 제대로 놀았다. 꺽쇠는 한결 기분이 가뿐해짐을 느끼면서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노인이 여전히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바랑을 뒤적이는가 하면 뭘 집어내어 발로 문지르는 것이다.

꺽쇠(노인을 향해)

노인 양반 떨리신디 불 곁으로 오시지오.

노인이 눈을 빠끔이 뜨고 건너다 본다.

꺽쇠

아니 거그서 떨리지 않으시냐고요.

노인은 이쪽 말을 잘못 알아듣는 듯 이내 고개를 숙였다. 꺽쇠는 술을 한 잔 더 들었다. 어느 결에 노인이 꺽쇠 곁에와 있는 것이다. 꺽쇠는 화로를 노인쪽으로 밀어준다. 노인은 잠자코 화로를 받아 바닥에 내려 놓는다. 그리고 그 위에 발을 올렸다. 그 발에서 김이 오르기 시작한다. 점점 꺽쇠 있는 데까지 김이 서려 뻗쳤다. 꺽쇠가 문득 코를 돌린다. 노인의 옷 마르는 냄새가 고약하게 치받친 것이다. 꺽쇠는 이때 껏 앉아 있어도 이렇게까지 냄새가 고약하지 않았는데, 새삼스레 노인을 훑어보았다. 과연 까맣게 끄슬린 옷이 어느 한 군데 때가 안 밀린 데가 없다. 그리고 수염이 까칫거리는 동정께는 이미 온통 헤어져 있었다.

꺽쇠(혼잣말로)

그랴, 아까참에도 얼핏 본께, 가까운 장꾼은 안 같드라니.

꺽쇠는 중얼거리며 한 걸음 물러앉았다. 그러나 아주 돌아앉은 것은 아니었다. 한사코 노인에게 다른 눈치를 보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꺽쇠의 눈에 얼핏 뜨이는 것이 있었다. 실날 같은 김발이 나울거리는 노인의 무릎에서 꼭 점만한 것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였다. 바랑에도 ‘이’ 두마리가 맬빵을 타고 넘어간다. 꺽쇠는 그제야 모든게 알아지는 듯 했다. 노인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무엇을 했는지.

꺽쇠(노인을 향해)

에씨요 노인양반, 약주나 드실지 알면 한 잔 드이씨요.

노인(나직한 목소리로)

구만 두이소.

노인은 속주머니를 더듬는다.

노인

아지머이, 예도 막걸리 한 잔만 주이소. 쿨룩 쿨룩.

꺽쇠는 처음 듣는 타관 말에 흠칠했는가 하자 일변 호기심에 끌린다.

꺽쇠

그냥 이 잔 한 잔 드이씨요.

노인이 젖은 주머니 안에서 구겨진 십 환짜리 몇장을 가까스로 찾아내 보인다. 그러면서 꺽쇠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떨군다.

노인

형, 그럼 초면에 사양치 않겠십니데이.

주인노파도 처음 듣는 노인의 타관 말에 흥미를 느끼며 노인을 쳐다본다.

노인

아지머이, 쿨룩, 말씀 좀 물읍시더.

주인노파

무슨 말씀이요?

노인

다른 기 아니라, 와, 저어.

노인은 언뜻 말의 순서라도 바뀐듯.

노인

아입니더. 아주머이, 아니고… 쿨룩 클룩. 아주머이는 고향이 본래 여깁님꺼? 쿨룩 쿨룩.

주인노파

예, 내 고향이 여그요.

노인

태생집니꺼?

주인노파

예 내가 이그서 낫소 멀라고 그라요?

노인

그라믄 (사이) 다른 기 아닙니더. 저 이 고갤 다부 넘어가면, 그 전에 와… 거, 큰 고목나무가 하나 있지 않었십니까? 쿨룩.

주인노파

노인

그게 하마 사십년 전일끼구만. 쿨룩 쿨룩. 그렇다! 똑 오늘이 사십년째다. 그 무렵에 와 그 큰 고목나무 밑에서 오 선달네라고 중늙은이가 한 분 안 살고 있었십니꺼?

주인노파

노인

와~ 잘 좀 생각해 보이소.

주인노파

사십 년째… 사십 년째면 내가 아직도 큰애기 땐겨…

주인노파는 어린 날의 기억에서 어떤 재미라도 그려낸 듯 황급히

주인노파(빠르게)

예, 있었구만이라우. 있었소. 언제나 머리를 곱게 빗고 어린딸 하나 데리고 있는 홀엄씨 말이지라우?

노인

옳십니더. 옳십니더. 그런데 그 중 늙은이 집서 그 무렵에 머슴을 살던, 쿨룩, 질바우라고 (사이) 와, 쿨룩 쿨룩, 몸집이 우악스럽고 끼웃든거린 청년이 하나 안 살었십니꺼? 굴룩 쿨룩 쿨룩.

주인노파

노인

잘 좀 생각해보이소.

주인노파

그 집이 하도 머심이 자조 드나들어서 그것은 모르것구만이라우.

노인

아하~ 참 맹랑하네이. 쿨룩.

주인노파

노인

더 좀 잘 생각해보이소. 그 청년이 장갈 가서 일 년도 채 몬 있다 어린애 하나 낳고 어디로 나가삔 사람, 와 있지 않었십니꺼?

주인노파

그때 그 중늙은이 집은 우리가 그 뒤에까지 도라지를 캐로 댕기고 해서 알것는디 (사이) 머심은 모르겄구만이라우.

노인

내가 사흘 전에 여 와 갖고, 쿨룩 쿨룩, 근동을 쭉 찾아봤십니더만 하나도 모른다 않십니꺼. 그 사람이 원래 일가친척도 없는 사람입니더.

곁의 꺽쇠가 더욱 호기심에 끌린다.

꺽쇠

멀라고 그라십니까?

노인

꼭 좀 알아볼 일이 있십니더.

꺽쇠

그럼 노인양반이 여그 어디 알음이 있어겠십디꺼?

노인

나도 본 고향이 여깁니다. 강진서 살다가 여 와서 한 이 년간 안 살었십니꺼. 쿨룩.

꺽쇠가 또 한 번 흠칠하고 놀란다.

꺽쇠

그래라우. 그런디 말소리가 여그 말소리가 아닌디 어서 살다오시요?

노인

한 평생 객지 생활만 하다가 다 안 늙었십니꺼. 내가 스무 살 땐께, 그 해가 똑 장개간 이듬해로구만. 내 혼차 고향을 나가가지고 겡상도에 가 똑 한 삼십 년 너머 안 살었십니꺼. 쿨룩. 그러다 내중에는 저어 펭안도에 가서 또 한 육칠 년 살다가 옵니다. 쿨룩 쿨룩 쿨룩. (사이) 혹시 형도 그 머슴을…

노인이 생각해도 그것은 무리라는 생각에 말을 중간에 끊는다.

꺽쇠

사십 년 전이면 내가 났을까 말까 땝니다.

노인(끄덕거리며)

아하~ 그렇지…

노인은 몹시 숨이 가빠 잠시 머리를 식탁에 의지한다.

꺽쇠

노인 양반, 떨린디 어서 그 술이나 한 잔 드이씨요.

노인

그럼 사양치 않겟십니다.(잔을 든다)

꺽쇠

아조 한 잔 더 드이씨요.

꺽쇠는 이방인을 대하는 호기심이 더욱 발동된다.

꺽쇠

노인양반, 겡상도란 디가 어떻습디까?

노인

사람 사는 데, 다 안 똑같십니꺼.

꺽쇠

그래도 겡상도 문둥이, 겡상도 문둥이 해쌍께 참 우섭습디다.

노인

그것은 전라도 개똥세, 전라도 개똥세 하는 것과 안 똑 같십니거. 쿨룩 쿨룩

노인은 경상도는 경상도 문둥이가 아니라 ‘문동’이라는 것, 그런데 사람들이 문둥이 문둥이 해쌌는 것은 남을 빈정거리기 좋아한 데서 그런 것이라는 설명을 한다. 전라도 사람들의 개똥세 사연도 설명을 해준다. 전라도 개똥세는 ‘개땅(沼地)’쇠란 것. 전라도는 개펄이 뭍으로 변한 곳이 많아 이런 말이 생겼다는 얘기다. 노인이 입상은 허름하지만 말하는 투가 보통이 아니다.

꺽쇠

그럼 대체 그 지방이 얼마나 살 만합디까? 펭안도까지 가서 지내겟으면 어디 이야기나 좀 해보시요.

노인은 바깥을 끼웃 넘겨다 본다.

노인

이너무 비가 쿨룩 우째 날을 셀라고 하나, 세월을 넘길라고 하나, 쿨룩 쿨룩.

노인은 비가 계속 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나갈 것을 체념하고) 자신이 그간 지내온 사연을 꺽쇠를 상대로 얘기를 한다. 경상도에서 보낸 세월, 평안도에서 보낸 세월을. 그리고 전쟁이 일어난 뒤에 옹진반도에서 지낸 사연 등을 늘어논다. 모두 결말은 좋지 않다. 그동안 만난 여자만해도 여럿이지만 모두 떠나고 혼자 남았다. 그리고 사십 년 전 버리고 떠난 본마누라 생각이 나서 고향을 찾은 것이다.

꺽쇠(시종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듣다가)

만년에 고상 많이 해겠습니다… 진작 비도 다 끄친 모양인디 어서 그 잔이나 드이씨요.

빨리 집에 가야 메 진지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 것이다.

노인

아지머이, 잘 좀 생각해보이소. 쿨룩 쿨룩. 그 중늙은이 집서 살던 머심 말입니더.

주인노파

모르겠구만이라우.

노인

우쨌든 그 머심을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하로 밤이라도 의지하다 죽겠심니더만… 통 이놈의 해소뱅 땜에 어디 돌아댕기기나 하겠습니꺼, 쿨룩 쿨룩 쿨룩.

주인노파

모르갔구만이라우.

노인은 무료히 절망에 가까운 빛을 띠고 있더니, 바야흐로 술기가 오르는 듯 옷고름을 푼다. 가슴패기에 고인 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는 물을 닦다가 가슴을 내보인다. 노인의 가슴에는 총 맞은 자국이 붉은 점 위로 덧나 있었다.

노인(나직한 목소리로)

형, 이 좀 보이소… 이것이 그 섬에서 맞은 총 자국 아닙니꺼.

꺽쇠

참 거 다행이었소잉.
(사이)
그럼 노인양반,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꺽쇠는 일어나서 지게를 진다.

노인

형~ 참, 초면에 실례가 대단했십니더. 또 만나십시데이.

노인은 꺽쇠의 얼굴에서 어딘지 모르게 친밀한 감을 느낀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을 다시 본 듯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꺽쇠는 메 진지 올릴 일이 바빠 서둘러 떠난다. 꺽쇠는 무대에서 퇴장하고 노인만 남았다. 노인은 감기는 눈을 가까스로 뜨면서 먼 산을 바라본다. 무대 점점 어두워진다. 무대는 완전 어두워지고 음악만 흐른다.

음악: Ludovico Einaudi ‘Nuvole Bian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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