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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와 희곡

오유권 원작, 소문(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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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

원작: 오유권 소설 ‘소문’(1957. 5)

각색: 공노사노 김병한

등장인물

나주댁
떠벌네
나주댁 형님
선애: 나주댁 딸
머슴: 안골 반장네 머슴
어떤 아낙: 말을 물어낸 아낙
다른 아낙: 말대꾸를 한 아낙
동네 아낙 3, 4
어떤 아제: 나주댁 술상을 받은 아제
다른 아제: 나주댁 술상에서 상대한 아제
시냇골 사돈: 시냇골서 사는 나주댁 형님 둘째 동생

대화 중에 나오는 인물

판례: 떠벌네 딸
금순네: 고무신 도난 사건이 있던 집

주요 등장인물 성격

나주댁: 나주댁은 스무 살 때 남편을 여의고 혼자서 딸 하나를 위하여 사는 중년 여인. 그녀는 결백증이 있을 정도로 딸 선애를 과보호한다. 동네 이웃들에게 호감을 사는 성격은 아니다.

떠벌네: 말 물어내기를 좋아하는 줌년 여인. 손버릇도 좋지 않아 머슴에게 약점이 잡혀있다.

나주댁 형님: 도량이 넓은 나주댁의 큰집 형님. 나주댁 딸 혼사를 도우려고 친정 동생에게 부탁해 혼인을 성사시키고 있는 중이다. 나주댁 딸 소문에 민감하지만 차분하게 대처한다.

머슴: 한때는 나주댁 머슴도 지냈던 일 잘하는 큰 일꾼. 지금은 안골 반장네 머슴으로 반장 대신 동네 납세고지서를 돌리기도 한다. 떠벌네의 약점을 알고 있어 막판 대세를 뒤집는다.

1950년대

장소

영산포 근처 시골 마을 / 꺼꿀네, 또술네, 떠벌네 / 나주댁집

# 제1막

꺼꿀네 집 모퉁이로 안골 반장네 머슴이 납세고지서를 배부하러 다닌다. 마침 물을 길러 나오는 나주댁 딸이 꺼꿀네 집 모퉁이를 돌다 두 사람이 마주친다. 안골 반장네 머슴이 ‘잘 됐다’ 싶어 고지서를 건네준다. 여기서 그냥 건네주면 고개(나주댁 집은 고개 위에 있음)까지 올라가지 않으니 좋다고 판단했다. 나주댁 딸은 받아서는 안될 종이로 알고 어깨를 비틀면서 받지 않으려고 한다. 꺼꿀네 집에서 떨어진 곳, 무대 반대편에 떠벌네가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몸을 숨긴다.

& 꺼꿀네 집 모퉁이

머슴(고지서를 흔들며)

아, 별것 아니어. 받어둬.

나주댁 딸(몹쓸 것을 피하듯, 몸을 피한다.)

머슴

개불알노무. 내우는 무슨 내우야. 나, 바쁜게 얼렁 받아둬.

나주댁 딸(말 없이 몸만 피한다.)

머슴

아, 염려 말고 받어둬.

그제야 나주댁 딸이 못 이긴 듯이 종이를 받아서 품속에 넣는다. 이것을 숨어 본 떠벌네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린다. 그사이 머슴은 무대 왼쪽으로 퇴장한다. 나주댁 딸도 무대 오른쪽으로 물 길러 나간다. 얼굴을 숨겼던 떠벌네가 고개를 돌린다. 무슨 보물이나 찾은 듯한 뿌듯한 표정으로 두리번 거리면서 무대 중앙으로 나선다. 마침 어떤 아낙이 나타난다.

떠벌네(기다렸다는 듯이)

아니, 내가 방금 꺼꿀네 집 외진 모퉁이를 돌아오자니께, 고갯집 나주댁 딸하고 그 전에 그 집서 머심을 살던 안골 반장네 머심이 무슨 편지를 가지고 주고 받고 하드랑께. 외진 모퉁이에서…(강조하느라 다시 되내고 잠시 뜸을 들인다.) 서로 받으라거니 안 받겠다거니 한참 찌우락거리고 있드란 마시.

어떤 아낙

그래이.

떠벌네(귀중한 것을 발설한다는 듯이)

나, 참, 우서운 일도 다 봤네잉.

두 여인 갈 길을 가고 무대는 어두워진다. 소문이 퍼지는 소리(음향)

음악은 모데스트 무소로크스키 - 전람회의 그림 중 ‘프롬나드(Promenade)’
https://youtube.com/shorts/pR9mftkNqPE?si=DXroudmnaKEagiDE

& 또술네 / 문 앞 / 눈오는 밤

나주댁 큰댁 형님이 문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안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어떤 아낙(소리만)

아니, 나, 그런 줄 몰랐더니 고갯집 나주댁 딸이 안골 반장네 머심하고 뭣을 주고 받었다 하데잉?

다른 아낙(소리만)

금매 그런 말이 있데, 참.

어떤 아낙(소리만)

아, 그, 잡녀러 머심이 꺼꿀네 집 뒤꼍에 가 서 있다가 무단히 물 길러 가는 사람을 틀어잡고 그랬단 않든가.

다른 아낙(소리만)

그러니, 혹, 그 머심이 나주댁서 머심을 살 때부터 무슨 내통이 있었는지도 알겄는가.

어떤 아낙(소리만)

그래, 나주댁 딸에게 혼삿말이 비치는 것을 보고 방해를 할라고 그러는지도 모를네.

나주댁 형님은 차마 방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안절부절하다가 다시 귀를 기울인다. 아낙들 얘기가 계속된다.

아낙 3(소리만)

참말로 나주댁 딸이 그랬을께?

아낙 4(소리만)

하기사 옛날부터 점잖은 개가 부숭에 몬자 올라간다고들 않든가.

어떤 아낙(소리만)

참 사람의 속이란 모를네잉.

나주댁 형님이 치마를 추스리고 나주댁을 찾아 나선다. 종종걸음을 치면서 가는 것이 무척 서두르는 모습이다.

무대가 어두워지고 음악이 흐른다.

음악은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 전람회의 그림 중 ‘프롬나드(Promenade)’
https://youtube.com/shorts/pR9mftkNqPE?si=DXroudmnaKEagiDE

& 나주댁 / 툇마루

나주댁이 누룩의 티를 추리고 있다. 나주댁 형님이 등장한다. 부리나케 나주댁을 향해 득달같이 와서 나주댁을 향해 말한다. 급하지만 숨을 골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잠시 뜸을 들인다.

나주댁 형님

동새(동서를 의미), 티 추리는가.

나주댁

예. 성님 오시요. 어서 오씨요.

나주댁 형님(오만 인상을 찌뿌리며)

아, 그런디 동새… 저미 저 아이가 안골 반장네 머심하고 무슨 일이 있었드랑가?

나주댁

웬이라우! 일은 무슨 일이라우.

나주댁 형님

나, 또술네 집에 모실을 가자니께, 모다 그런 말들을 하고 있데.

나주댁(일어서면서)

나는 첨 듣는 말이요. 뭣이라고들 해쌉디여?

나주댁 형님이 나주댁을 향해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오디오 3배속으로 진행) 이야기를 듣는 나주댁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나주댁 형님

그걸 떠벌네가 봤다고 하는 모양이데.

나주댁(기겁을 하고 벌떡 일어서며 방문을 젖히며)

아가, 너, 안골 반장네 머심한테서 뭣 받은 일 있냐?

무대의 방문이 열리며 수를 놓던 딸이 얼굴을 감싼다.

나주댁 딸

없어.

나주댁

그럼 무슨 말이 그렇게 났다냐?

나주댁 딸

이전 날 고지서 받은 것 보고 그러는 것 아닌가? 그때 판례 어메(떠벌네)가 지내가다 봤어.

나주댁

그때 다른 것은 받은 일 없냐?

나주댁 딸

없어.

나주댁

말도 한 일 없지야?

나주댁 딸

말도 안 했어. 그때 엄니한테 얘기 했잖여.

나주댁 딸은 그날 고지서를 나주댁에게 넘기면서 자초지종을 말했었다.

나주댁(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르며)

그런 사람 죽일 예편네가 다 있소?

나주댁 형님

빈총도 안 맞은 것만 못하다고 혼사조차 어울려지려고 하는디 안 들은 것만 하는가.

나주댁

가만있으시요. 나, 떠벌네한테 가서 댈라우.

나주댁이 일어선다. 전의를 다지면서 치마끈을 졸라맨다.

나주댁 형님

동새, 그렇게 욱하지 말고 앉게. 이런 일일수록 서서히 따져야제. 그렇게 욱하면 말만 더 나는 것일세.

나주댁

아니라우! 나, 지금 가서 댈라우.

나주댁 형님

금매, 그러지 말고 이리 앉게

나주댁은 스무 살 때 남편을 여의고 혼자서 딸 하나를 위하여 살아왔다. 딸이 열다섯 때부터는 바깥심부름도 시키지 않았다. 근년에 들어서는 허드렛일 시킬 때도 구정물 나는 옷을 입히지 않을 정도로 애지중지 키우는 중이다. 딸 열여덟 되던 해부터는 머슴도 일체 들이지 않았다. 몇 건의 혼사일이 추진 됐으나 조건이 맞지 않아 거절했다. 나주댁은 데릴사위를 원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세월이 흘러 딸의 나이가 스물둘이 됐다. 더 기다릴 수 없어 어울려지는 혼사가 앞산 넘어 시냇골 사는 홀아비 아들이었다.(큰댁 형님의 둘째 동생이 중간에 중매) 슬하에 외아들이라는 것이 걸리긴 하나, 두 집이 합의하에 혼사가 이뤄지면 두 집 살림을 합쳐 한집 살림을 하는 것으로 말이 됐다.

나주댁은 큰댁 형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어섰다. 혼사도 혼사지만 여태 마을 한 번 안 내보낸 딸에게 누명도 분수없다는 생각에 분이 솟구쳤다.

나주댁(혼잣말로)

이런 얼척 없는 일이 있다니!

이를 악물고 고삿길로 내달았다. 나주댁 무대에서 사라지고 무대는 어두어진다.

# 제2막

떠벌네 집으로 나주댁 들어선다. 왼손으로 오른쪽 소매를 걷어부치면서 전의를 다지며 떠벌네 안방을 향한다.

& 떠벌네 집

나주댁(목청을 돋우고)

판례 어매 집에 있소?

떠벌네(방문을 열며 흠칫 놀란다.)

뭣하실라우?

나주댁(말투를 한껏 긴장감 있게 낮추면서)

나, 물어볼 말이 좀 있어서 왔소.(평상에 걸터 앉으면서…) 아니, 판례 어메. 우리 선애가 안골 반장네 머심한테 뭣 받은 것을 봤습디여?

떠벌네

보기는 뭣을 봐라우.

나주댁

그럼 무슨 말을 그렇게 퍼뜨리고 다녔습디여?

떠벌네(시치미를 뗀다.)

퍼뜨리기는 무슨 말을 퍼뜨렀어라우?

나주댁

그럼 동네 사람들이 안 한 말을 했다고 하께라우? 응! 집이처럼 안 한 말도 했다고 하고, 한 말도 안 했다고 하께라우. 금매 우리 선애가 꺼꿀네 집 뒤꼍에서 뭣을 받습디여?(말이 뭉쳐 말이 뒤섞여 나온다.)

떠벌네(방을 나오면서)

나는 그런 말, 한 일도 없고 안 한 일도 없소.

나주댁

그럼 이리 나오씨요. 동네 사람들한테 가서 댑씨다.(나주댁이 떠벌네 손목을 잡아 끈다)

떠벌네

손 놔두씨요. 손 놔두고 말하씨요.

나주댁(말이 거칠어진다.)

나와… 아, 이리 나와… 대관절 우리 딸이 뭣을 주고 받었는가 가 대보자.

떠벌네

손 놔두랑께. 아, 손 나두고 말해.

나주댁

응! 할 말 있고 안 할 말 있제. 말이면 다 말인가. 어서 가 대보자.(말투가 험해진다.)

떠벌네(같이 말투가 거칠어 짐)

금매 손 놔두고 말해.

두 사람의 말소리가 자연 높아진다. 그새 이웃 사람들이 우~ 모여든다. 그러자 나주댁이 들으란 듯이 이웃을 향해 말한다.

나주댁

이 뒷심 무른 예편네 봐… 아 그런 말 안 했으면 얼렁 가 대보장께? 아, 안 했으면 가 대봐.

떠벌네가 버티다 못해 마당에까지 끌려 나왔다. 그러자 떠벌네도 여러 사람이 있는 데서 이렇게 끌려나오는 것이 분하다.

떠벌네

그럼 불 안 땐 귀뚝에서 냉갈 나께라우? 집이 딸한테 가서 물어보씨요… 응. 받은. 집이 딸한테 가서 물어봐.

나주댁이 벌떡 뛴다.

나주댁(거칠게)

이 사람 죽일 년 봐라~ 우리 딸은 그날 고지서밖에 받은 일 없다~ 늬 눈깔이 있으면 똑똑히 봤을 것이다. 이날 이때껏 손에 물 한 점 안 묻히고 키워온 내 딸이다~ 모실 한 번 안 보낸 내 딸이다. 우리 딸은 그날 고지서밖엔 말 한마디 건넨 일 없고 얼굴 한 번 쳐다본 일도 없다~ 가만있거라. 이 자리에 꼼짝 말고 있거라. 그 고지서를 갖다 늬 눈앞에 똑똑히 보여 주마.

나주댁은 고지서를 가지러 집으로 달려간다. 나주댁 퇴장하고 떠벌네는 자기가 굽히지 않은 것을 이웃들에게 보여주려고 옷매무새를 만지고 주변을 둘러본다.

떠벌네

나, 꼬락사니 없는 년도 다 보것네. 아, 불 안 땐 귀뚝에서 냉갈 나께라우?... 자기 딸 단속 못했단 말은 않고 남한테만 대들고 지랄 맞네.

이웃들 수근거린다. 시간이 지난다(무대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진다.) 그 사이 나주댁이 숨을 헐떡이며 고지서를 흔들면서 돌아온다.

나주댁

봐라~ 늬 눈 있으면 똑똑히 봐라. 이 고지서밖에 받은 일 없다. 이 혓바닥을 동강이 낼 년아. 밥 처묵고 배아지가 따땃하면 가만히 나자빠져 있제 뭣하러 남의 말을 퍼뜨리고 다니냐~ 이 눈구녘을 파버려도 안 시언할 년아. 늬가 가리사니 없는 년이란 것은 온 동네가 다 안다~ 당장 혀라도 뽑아 죽일 년아.

나주댁은 구경꾼들을 향해 고지서를 보여주면서 말한다.

나주댁

아니, 다들 보씨요예… 우리 딸은 그때 꼭 이 고지서밖에 받은 일 없단 말이요. 그런디 저 오살해 죽을 년이 그 따위 주둥이를 놀리고 나녔을께라우?

떠벌네

아따… 누가 혀를 뽑아 죽일 년인지 모르겠네.

떠벌네도 바야흐로 용심이 치받힌 듯 턱을 고추 세우고 말한다.

떠벌네

그럼, 이년아. 너는 그때 내가 고무신 도둑질한 것을 참말로 봤디야… 이 육살해 죽을 년아. 지금도 내 분은 안 풀린다… 이 혀를 잘라 죽여도 안 아까울 년아. 이년아.

나주댁

오냐. 이년~ 나는 참말로 봤다. 늬가 이년. 그때 고무신 전 머리에서 바꾸는 것을. 내, 이 눈으로 똑똑히 봤다.

다섯 해 저쪽이었다. 우물께 금순네 집에서다 아낙네들이 밤늦도록 놀다가 신 한 켤레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쁜이 어머니 새 고무신이었다. 성냥불을 그어 자기 신을 대보고 비겨보기도 했다. 종내 찾지 못하고 놀다 먼저 간 사람을 헤아렸다. 판례 어머니와 기수 어머니가 먼저 간 것이다. 다음날 장거리를 다녀오던 나주댁이 고무신 전 머리에서 판례 어머니가 있는 것을 봤다. 판례 어머니는 헌 부대 자루에서 웬 고무신 한 켤레를 내가지고 바꾸고 있었다. 나주댁은 수상쩍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마을로 돌아와 그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퍼뜨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신이 어떤 신인가는 5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오직 한 사람만 알고 있을 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떠벌네

이년아, 너는 그때, 내가 신을 도둑질한 줄 알고 그렇게 말 내고 다녔더냐… 이 앙급해 뒈질 년아. 그 분은 내 가슴에 뗏장을 얹을 때까지도 안 풀리겠다…

나주댁

내 이 죽일 녀~ 늬년은 이년. 그 종이가 편지로밖에 안 보이더냐~

소문은 날새 꼬리에 꼬리를 물고 구석구석까지 번졌다. 대부분은 나주댁의 상처를 은근히 통쾌하게 생각했다. 개중에서도 한 또래의 계집애들은 더욱 시원하다 했다. 선애는 같은 처녀로서 이때껏 함께 노는 법이 없었다. 옷도 남달리 말쑥하게 입고 다니는 것이 거슬린데다 물 길러 나오는 때도 말 한마디 하지 않은 것이 시체 처녀들로서는 거만하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나주댁은 으례 딸을 데리고 자랑하고 내세우던 것이었다.

무대: 어두워진다.

& 우물가

나주댁은 좀체 마음이 가라앉힐 수가 없다. 허구한 젊은 날을 홀몸으로 늙어온 보람이 깡그리 수포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나주댁이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로 등장한다. 우물에는 동네 아낙들이 물을 긷기도 하고 빨래를 하는 이도 있다.

나주댁

다들, 물어보씨요예… 원 세상에 그렇게 주책없는 년이 다 있으께라우? 어저께 구경꾼들도 봤지만, 우리 딸은 그때 납세고지서밖엔 받은 일 없단 말이요. 그것도 처음에는 죽어도 안 받을라고 하다가 그놈의 머심이 바쁘다고 한사코 떠맡기는 바람에 억지로 받었어라우. 그라고 말 한마디 한 일 없고 얼굴 한 번도 안 쳐다봤다우. 그런디 그 혀 빠져 죽을 년이 누굴 갖다 진구렁에 처넣을라고 무슨 편지를 받었다니. 뭣을 소군거렸다니 할 것이요. 다들 알다시피 이날 이때껏 모실 한 번 안 내보내지 안 했소? 참으로 꾸정물 나는 옷 한번 안 입히고 지애비 없이 서럽게 키워오지 안 했소?

하소연하듯 이렇게 말하는 나주댁의 눈에 어느덧 눈물이 이슬맺히듯 데룽거린다.

나주댁

그라고 요새 온사가 어울려질라고 하면서부터는 참말로 샘 질에 한번 내보내기를 두려워했어라우. 꼭 집에 앉혀놓고 지 일이나 보게 했어라우. 그런디 그 눈 곯아빠질 년이 똑똑히 보지도 못하고 그런 애먼 소리를 할 것이요… 그라고 어저께도 그런 말을 정 안 했으면 가서 대자고 한께. 그래도 이년이 속은 있는가 기어이 안 나올라고 버티드란 말이요. 아, 그렇지 않소? 지년이 떳떳하면 그렇게 떨고 꽁무니 뺄 것 뭣 있소…

나주댁은 우물에 두레막을 드리운 채 물꾼이 갈릴 때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나주댁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같은 말로 자기 딸이 납세고지서 받은 일밖에는 없다고 변호하고 다닌다. 그러나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웃 마을까지 번진다. 이녁만 깨끗하면 가만히 있을 일이지 뭣하러 종알종알 떠벌거리고 돌아다니냐는 것이다. 나주댁은 몸이 한껏 지치고 입맛까지 떨어졌다. 무대에서는 돌아다니는 나주댁과 함께 배경 음향으로 두런거리는 마을 주민들의 소문이 돌아다닌다.

소문(소리만)

나주댁 딸 선애하고 안골 동장네 머심하고 무슨 일이 있어더라며…

배경음향은 느릿하면서 사람 속을 긁는 톤으로 계속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 나주댁 집

중매를 선 시냇골 사돈이 등장한다.

시냇골 사돈(놀란 얼굴로)

아니, 사둔네. 애기가 누구하고 무슨 말썽이 있었드라우?

나주댁

아니라우. 말썽은 무슨 말썽이라우?

시냇골 사돈

그럼 무슨 소문이 거까지 퍼졌다우? 듣자 하니 누 머심하고 무슨 말썽이 있었다고 그럽디다.

나주댁

아니, 남자 집서 뭣이라고 합디여?

시냇골 사돈

나도 아침까지 모르고 있었는디 남자 집서 와 가지고, 사둔네 큰애기가 어느 반장집 머심하고 무슨 편지를 주고 받었단다고 그래라우. 그라고 첨에는 그 머심을 데릴사위로 삼을라고 했던갑드라고도 하고. 남자 집서도 모르고 있었는디 동네 사람들이 몬자 알고 속닥러리드라고 합디다.

나주댁

그래 사성은 안 보냅디여?

시냇골 사돈

사성도 보낼라고 저고릿감까지 떠놨는디, 그런 말이 들린께 떠름해한 모양입디다.

나주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듯 했다. 그러나 태연스레 그때의 일을 고분고분 밝힌다.(3배속 오디오)

나주댁

그 주책없는 예편네가 빈말을 한 것인께. 염려 말고 사성이나 보내단다고 하씨요.

시냇골 사돈

그런디 소문이 그렇게까지 났소잉?... 세상에 입들도 험하요잉?...

나주댁

그런께 걱정 말고 보내려든 사성이나 보내라고 하씨요. 그라고 못 믿어우면 그 머심한테도 물어봐도 안다고 하씨요.

생각인즉, 나주댁은 사돈과 함께 안골 반장네 머슴을 찾아가 그때의 사실을 밝혀주고 싶었으나 때마침 머슴이 주인을 따라 섬으로 쇠 장사를 가고 없었다.

시냇골 사돈은 퇴장한다. 나주댁은 티를 추린 누룩을 두어 되 바수어서 술을 버무린다. 소문이 이 이상 안 퍼지도록 동네 사람들의 입을 막아두고자 함에서다. 그리고 혼사에 쓰려고 아껴뒀던 밀가루도 한 되쯤 내어 부침개질을 하였다. 술 못 먹는 여자 몫으로 찐 밥도 반 시루가량 쪘다. 막걸리에는 ‘소주’를 섞어 빨리 괴게 하였다. 나주댁 집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어떤 아제

술 맛이 참, 좋네, 거.

다른 아제

전도 고기까지 넣서 안 먹을 만하든가.

어떤 아제

제엔장, 대사 술은 우리가 몬자 묵었네 그랴.

술과 전을 먹던 동네 사람들 흩어져 퇴장하고, 시냇골 사돈이 등장한다.

시냇골 사돈

아니, 사둔. 무슨 말이 또 그렇게 났다우?

나주댁

무슨 말이라우?

시냇골 사돈

동네 사람들한테 무슨 술을 먹였습디여?

나주댁

……

시냇골 사돈

남자 집서 와가지고, 동네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해서 술을 한턱 미겠단다고. 그런 것 보께, 정말 자기 딸에게 허물이 있었던 것이 사실 아니느냐고, 사성을 안 보낼라고 해라우.

나주댁

……

나주댁은 하늘이 내려앉은 듯 땅이 꺼지는 듯 눈앞이 아찔하였다. 종내 말문이 막힌 채 사돈과 함께 큰댁 형님 집으로 나선다.

나주댁 집은 텅 비었다. 소문이 빈 집을 꽉 채운다. 오디오 음향이 울려 퍼진다. 느릿하면서 속을 긁는 소문이.

소문(소리만)

나주댁 혼사가 아주 깨져버렸다네…

무대: 어두어진다. 소문 소리만 연이어 퍼진다.(오디오 음향)

& 떠벌네 집

섬에서 돌아온 안골 반장네 머슴이 이 소문을 듣고 떠벌네 집으로 왔다.

머슴(떠벌네 안방을 향해)

판례 엄니, 이리 좀 나오시오.

떠벌네가 당황한 모습으로 문을 열고 나온다.

머슴

아니, 판례 엄니. 내가 고갯집 딸하고 뭣을 주고받습디여?

떠벌네(얼굴이 빨개지며)

……

머슴

아니, 내가 뭣을 줬가니 그런 말을 내고 다녔습디여. 어디 말 좀 해보씨요.

떠벌네

……

머슴

에이, 여보씨요. 할 말 안 할 말이 따로 있제. 그런, 순, 억지소리를 해가지고 남의 혼사까지 깨지게 맨든 사람이 어디 있소.

떠벌네

……

머슴

똑똑히 보지도 못하고 그런 말을 해서 쓸 것이요? 내가 그때 고지서밖에 뭣 더 줍디여? 고갯집 딸이 고개 한번 쳐들어 봅디여? 아니 내가 정 뭣을 줍디여?

떠벌네

……

머슴

아니, 말 좀 해보씨요. 뭣을 줍디여?

떠벌네(어눌하게)

그럼 내가 잘못 말했는것이요.

떠벌네가 눈물을 질금 떨어뜨리며 나직이 대답한다. 떠벌네는 이 머슴한테 생전 쥐어지내야 할 것이 하나 있었다. 금순네 집서 신을 잃어버리던 날 밤, 떠벌네가 고무신 한 켤레를 감춰들고 고삿길을 지나가는 것을 머슴이 본 것이다.

소문

웅얼거리는 소리(알아듣기 힘든 소리)

무대는 어두어지고 알아듣기 힘든 웅얼거림(소문)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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