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나리오와 희곡

오유권 원작, '이역의 산장' 흰둥이의 고백

반응형

흰둥이의 고백 - 모노드라마

등장인물


흰둥이 (7년생 수캐, 화자)


1막 - 산장 안, 겨울밤


(무대에는 창호지로 덮인 작은 창이 있다. 장작불이 희미하게 타오르고, 흰둥이가 무대 중앙에 앉아 있다. 그는 관객을 향해 말한다.)

흰둥이
"나는 개다. 사람들은 나를 흰둥이라고 부른다. 내가 흰둥이인 이유? 털이 하얘서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 불릴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그냥 개가 아니니까. 나는 여인을 지키는 개다. 아니, 그녀를 사랑하는 개다."

(흰둥이는 여인의 옆자리를 바라본다. 무대에는 여인의 그림자가 흔들린다.)

흰둥이
"그녀는 혼자다. 남편도, 아들도 모두 전쟁이 삼켜버렸다. 내가 처음 이 집에 왔을 때도 그녀는 혼자였다. 불안하고 외로워 보였다. 그래서 나는 곁에 붙었다. 내가 지켜줘야 한다고, 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그때부터 나는 그녀의 눈짓 하나에 귀를 기울였다."

(흰둥이는 바닥을 긁으며 몸을 웅크린다.)

흰둥이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왔다. 상처 난 발을 끌며 들어온 그 남자. 냄새가 났다. 사람 냄새. 두려운 냄새. 나와는 다른 존재의 냄새였다."

(흰둥이는 귀를 바짝 세우고 경계하는 자세를 취한다.)

흰둥이
"나는 그를 물고 싶었다. 쫓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들였다. 먹을 것을 주고 상처를 감싸줬다. 내 자리를 뺏어버렸다. 나는 그녀 곁을 떠나지 못했다. 그런데 그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흰둥이는 바닥에 엎드려 눈을 감는다. 그러나 곧 고개를 든다.)

흰둥이
"나는 기다렸다. 그가 떠나기를. 그녀가 다시 나만 바라보기를.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밥을 퍼주고, 그의 손을 잡았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흰둥이는 다시 일어나 무대를 빙빙 돈다.)

흰둥이
"나는 짖었다. 그녀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려고. 나는 밤마다 울부짖었다. 그녀가 내 울음을 들으면 마음을 바꿀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꾸짖었다. ‘조용히 해라, 흰둥아!’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흰둥이는 고개를 숙이고 무대 한쪽으로 걸어간다.)


2막 - 산장 밖, 새벽


(무대는 차가운 새벽의 분위기. 흰둥이는 산장 밖에서 웅크리고 있다.)

흰둥이
"나는 떠나기로 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자리가 없어진 집에서 나는 개가 아니라 그림자 같았다. 내가 없는 동안 그녀가 나를 찾을지 궁금했다. 나를 필요로 할지 궁금했다. 그가 나를 대신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될지 궁금했다."

(흰둥이는 하늘을 바라본다.)

흰둥이
"하지만… 그녀는 날 찾지 않았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산을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찾고, 길을 헤맸다. 그런데도 나는 매일 밤 그 집을 떠올렸다. 그녀가 추울까 봐, 배고플까 봐. 나 없이 무서울까 봐."

(흰둥이는 앞발로 땅을 긁는다.)

흰둥이
"나는 다시 돌아갔다. 그런데 그녀는 그와 나란히 누워 있었다. 내가 지켜야 할 자리에 그가 있었다. 나는 돌아온 걸 후회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흰둥아! 어디 갔다 이제 왔냐!’ 그 웃음에 나는 다시 무너졌다."

(흰둥이는 여인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3막 - 안채 안, 봄날 아침


(무대에는 밝은 빛이 들어온다. 흰둥이는 여인의 무릎에 누워 있다.)

흰둥이
"나는 그녀를 미워할 수 없었다. 그녀의 손길이 너무 따뜻했다. 내가 부른 울음에도 그 손길 하나면 다시 녹아버렸다. 나는 그녀를 지키기로 했다. 다시는 떠나지 않기로 했다."

(흰둥이는 여인의 무릎에 얼굴을 기대며 꼬리를 살살 흔든다.)

흰둥이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게 될까 봐, 나를 잊어버릴까 봐. 나는 매일 밤 그녀 옆에서 잠을 자면서도, 그가 나를 밀어낼까 봐 불안했다."

(흰둥이는 무대 중앙으로 나와 관객을 향해 말한다.)

흰둥이
"나는 개다. 하지만 개도 사랑할 줄 안다. 나의 사랑은 말이 없고 손길이 없지만, 온몸으로 그녀를 감싸고 있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녀를 지킬 것이다. 그 남자가 나를 밀어낸다 해도, 그녀가 날 떠난다 해도, 나는 그녀의 곁을 지킬 것이다."

(흰둥이는 무대 한가운데 엎드린다. 여인의 손이 무대 뒤에서 나타나 흰둥이를 쓰다듬는다. 흰둥이는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다.)

흰둥이
"사랑은… 때로 이렇게 짖지 못한 채 묵묵히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며 막이 내린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