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드라마: 농지상한선(農地上限線), 텃골댁의 독백
원작: 오유권 소설 농지상한선 (문학사상, 1982)
각색: 김병한

무대 설정
배경: 시골 마루 한쪽. 부엌 쪽에서 토끼탕 끓는 소리가 들려오고, 논밭을 바라볼 수 있는 창문이 열려 있다.
소품: 키와 멍석, 곰방대, 쌀독, 낡은 옷가지, 삽과 호미.
조명: 무대 중앙은 따뜻한 노을빛으로 밝히고, 창가로는 희미한 바람결의 그림자가 흔들린다.
텃골댁의 독백
(텃골댁, 부엌에서 나오며 앞치마를 턴다. 멍석 위에 앉아 손을 매만진다.)
텃골댁
(웃음) 토끼탕 끓는 냄새가 참 고소하네. 이 냄새 맡으면 그때 생각이 난다. 1950년 봄, 그날도 이맘때였지. 농지개혁법이 나온다고 동네가 난리가 났던 날.
(한숨을 내쉬며)
그날 저녁, 토끼 한 마리 잡아서 잔치를 벌였어. 남의 땅 붙들고 살던 신세가 끝났다고. 소작료 안 내도 되고, 명절마다 봉물 안 바쳐도 되고… 그게 얼마나 가슴 벅찼던지. 우리 영감(텃골양반)도 술잔을 돌리면서 그러더라. ‘이제는 우리 윤봉이를 대학에 보낼 수 있겠다.’ 그 말 듣고는 나도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잠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근데 말이야… 땅이 내 땅이 된다고 해서 세상이 쉬워지는 건 아니더라고. 농지상환료? 그거 내고 나면 손에 쥐는 게 없었어. 그땐 그래도 희망이 있었지. 윤봉이 대학 보내면 땅이 없어도 먹고살 길은 생기겠지, 그 꿈 하나 붙잡고 살았으니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근데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더라. 땅 주인은 됐지만 돈 없는 사람한테 농사는 벼슬이 아니더라고. 돈이 없으니까 비료값도, 씨앗값도, 다 빌려야 했어. 우리 영감은 말은 안 해도 자꾸 한숨만 쉬더라고.
(고개를 저으며)
그러다 보니 윤첨지 같은 사람이 또 고개를 들더라고. 그 양반, 땅 다 내놓고도 돈 굴려서 다시 세도 잡았지. 사람들은 돈이 필요하니까 또 그 집 문턱을 밟았어.
(쓴웃음을 지으며)
뚜범이? 그 착한 놈도 윤첨지 밑으로 다시 들어가더라고. 빚진 사람은 어쩔 수 없다더라. 나는 그걸 보면서 우리도 언젠가는 또 묶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본다.)
그리고 1967년. 농지상한선이 풀렸다더라. 부재지주도 괜찮다더라. 그 소식 듣자마자 우리 영감은 논을 팔았지. 평당 사천 원씩 쳐준다는 말에 솔깃했거든. 윤봉이 학비 대고, 집안 살림 펴자고.
(손으로 치맛자락을 만지며)
양복 한 벌 새로 사 입고, 자식들 학비 다 치르고… 그때는 살림이 펴지는 줄 알았어. 근데 말이야, 땅 팔고 나니까 마음이 허해지더라. 흙 냄새 맡고 살아야 마음이 편한데, 빈손으로 살자니 앞날이 걱정되더라고.
(주먹을 꽉 쥐며)
우리 같은 농사꾼은 땅을 떠나면 뿌리 뽑힌 풀 아니겄어? 그땐 그냥 돈만 손에 쥐면 살 것 같았는데, 막상 살아보니 돈으로는 허기를 못 채우겠더라고.
(잠시 침묵)
금부리? 다들 땅 팔고 돈 쥐니까 잔치 분위기였지. 그때는 다들 웃고 떠들었는데, 지금은 또 울고 있더라. 돈 다 쓰고 나니까 먹고살 길이 막막하다고. 다시 윤첨지 밑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많더라.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놈의 농지개혁, 처음엔 해방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또 다른 속박이었어. 땅 묶었다 풀었다, 그거에 사람들 마음도 왔다 갔다 하고. 그게 땅 탓인지 사람 탓인지, 모르겠다.
(곰방대를 집어 든다.)
우리 영감도 가끔 그러더라. ‘또 묶일 거다. 소작농 때처럼 다시 묶일 거다.’ 나도 그게 두려워. 농사꾼은 흙을 떠나면 못 산다는데… 난 지금 흙 냄새가 그립다.
(손으로 바닥을 쓸어본다.)
그래도 윤봉이는 잘됐어. 서울에서 자리 잡고 잘 살고 있으니까. 논 팔아 학비 댄 게 아깝진 않지. 근데 말이야, 나한테는 이 마당이, 이 흙이 더 소중했나 봐.
(조용히 창밖을 바라본다.)
농지상한선? 그건 이름만 바뀐 굴레였어. 묶였다가 풀렸다가, 또 묶이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언제나 땅에 묶여 사는 거지. 땅이 없는 농사꾼이 뭘 할 수 있겠어.
(곰방대를 내려놓으며)
그래도 살아야지. 흙을 밟지 못하면 풀잎처럼 흔들려도, 바람에 날아가진 말아야지. (고개를 들고) 그래, 나는 이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지. 흙이 나를 부르고 있으니까.
(무대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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