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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와 희곡

모노드라마: "경천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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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드라마: "경천의 독백"


원작: 오유권 소설 농민과 시민
각색: 공노사노 김병한


무대


(무대는 소박한 농촌 풍경. 들판과 논을 암시하는 배경에 허름한 두레와 두레줄이 있다. 무대 중앙에 노송나무를 상징하는 나무 한 그루 서 있다. 무대 한편에는 민태와 함께 마신 막걸리 병, 꽁보리밥 그릇과 열무김치가 담긴 바구니가 보인다. 무대 전체는 점점 타들어가는 들판을 상징하듯 어두운 톤의 조명으로 시작한다.)


프롤로그


(경천 등장. 땀에 젖은 허름한 옷, 얼굴에 깊이 팬 주름, 일에 찌든 손. 그는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와 두레줄을 힘없이 쥔다. 조용히 두레를 당기는 동작을 반복한다. 관객을 향해 독백이 시작된다.)


경천의 독백

경천

(한숨을 쉬며 두레질을 멈추고 관객을 본다.)

"이 땅이 척박한 건 내 탓이 아닐진대… 오늘도 해는 중천에 떠서 이글이글 내리 꽂힙니다. 논바닥은 쩍쩍 갈라지고, 가슴도 갈라질 듯 답답하오. 민태 녀석 하고 하루종일 품어댔소만, 물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요.

아니, 그게 뭐냐고요? 물을 품어 올려 농사나 짓자는 건데, 저 강 건너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장구 소리에 피가 거꾸로 솟아요.

(목소리가 격앙되며)
그 사람들, 저 노송나무 그늘 밑에서 지껄이기나 하고, 맥주에 불고기 잔뜩 깔아놓고 노세 노세 부른다니까요. 그 한낱 소리에도 내 손은 멈추고, 속이 끓습니다. 여기 있는 이 물 한 두레에 우리 밥 한 숟가락이 달렸는데, 저긴 잔칫집인가요? 아니, 그런 것 같소.

(조용히 한숨을 쉬며)
아무리 가난이 천하의 큰 죄라 해도, 우리 농군은 그 누구보다 밥 한 숟가락 값은 하지 않소? 하지만 저들은, 그 밥을 지어준 손의 고됨은 눈꼽만치도 모르고 한낮에 물장구나 쳐요. 그저 부아가 치밀 뿐입니다."


장면 전환


(경천은 두레질을 멈추고 무대 한 편의 막걸리 병을 꺼내 든다. 한잔을 따르고 허공에 비우며 이어간다.)

경천

"민태 녀석 말이오, ‘있는 놈들 거 얻어먹으면 어쨌냐’고 하대요. 그놈 참… 맘은 여리지만 난 아니오. 절대 아니야. 농민의 자존심도 밥값에 묻어버릴 순 없소.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소. 물 한 두레, 땀 한 바가지가 천 냥이요. 근데 도회지 사람들은 사기처럼 찾아와 논두렁 옆에서 키득대고, 노래하고 춤추고… (갑자기 소리를 높이며) 저리 가라고 했소! 일하는 사람 옆에서 그러는 건 상놈이라 했소!"

(잠시 무대 침묵. 경천은 멀리 노송나무를 바라본다.)


나무 베기 사건


(경천은 한걸음 나무 쪽으로 다가가며 속삭이듯 말한다.)

경천

"그 노송나무요. 우리 마을 소나무지만 저것이 화근이오. 그늘에 끼어 앉아 피서랍시고 누워서 논다지요. 참다못해 톱을 들었소. 이장님도 막겠지요? 뭐, 허가니 뭐니 하지만 이건 농민의 숨구멍을 막아놓는 겁니다.

(톱질 흉내를 내며)
이렇게 딱 베어버리면, 제 눈꼴사나운 꼴도 못 볼 거 아니겠소? 근데… 잘린 나무 보고도 오더란 말이오. 오늘도 버스는 들어오고, 장구는 울리고… 우리는 물만 품었소."

(손을 벌벌 떨며 관객을 향해 외친다.)

경천

"그게 다 우리 돈이오. 농민들이 밥을 지어줬잖소! 쌀밥 먹여주고… 어디서 저렇게 놀러 댕기오! 이런 거라면 쌀 한 가마, 사만 원이어도 부족할 거라니까요!"

(잠시 침묵. 손을 내려뜨린다.)


마지막 장면


(경천은 천천히 객석을 향해 걸어 나오며 마무리한다.)

경천

"내가 잘못했소? 우리들 노동이, 우리의 자존심이 그렇게 하찮았소? 나 같은 농군 하나쯤 잡아가면 뭐가 달라질까요. 하지만 내 얘길 들어주오. 우리도 사람이라오. 가난한 농민이지만, 땀 한 방울이 제 값 했으면 좋겠소.

이 막걸리 한잔에 내 억울함과 농군의 한을 섞어 마셨소만… 그래도 비는 내려오지 않았소. 소나무도 베이고 나도 이렇게 끌려가요. 그렇지만요… 내 자식 때는 이 밭이 갈라지지 않기를… 아니, 제발 일하는 사람이 사람대접을 받는 세상이 오길 바라오."

(경천은 무대를 뒤로 돌아 나가며 무대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에필로그


(어두운 무대에 마지막 대사가 울려 퍼진다.)

경천의 목소리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오. 하지만 농민도 천하의 사람이라오. 그것만은 꼭 잊지 말아 주오."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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