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방아 도는 마을
원작: 오유권 소설, 기계방아 도는 마을(현대문학, 1965. 06)
각색: 공노사노 김병한
등장인물
덕수(30)
할아버지: 덕수 아버지, 태실이 할아버지
태실이(5)
손주(3): 태실이 동생
기수네 이모
동네 아낙들
삐딱 아낙
방앗간 일꾼
동자아이: 기수네 이모 부엌일을 돕는 아이
청년 1, 2, 3
대화 중에 나오는 인물
덕수 처
기수네 이모 남편과 아들
주요 등장인물 성격
태실이 할아버지: 덕수의 아버지로 한때는 한다한 살림을 꾸렸던 노년. 사랑에서 서화운객과 더불어 시조를 읊고 골패를 뗀 과거를 회상하기도 한다. 자식의 좌익 활동으로 가산이 탕진됐지만 아들과 며느리를 믿는 편이다. 환경에 관심이 커서 방앗간 먼지가 동네 환경을 망친다고 생각한다.
덕수(30): 좌익 활동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품팔이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장. 아내가 기수네 이모에게 돈을 빌려 장사를 나갔다가 소식이 끊겨도 찾을 생각을 안 한다. 아내 빌린 돈 이자값으로 기수네 이모 방앗간 일을 돕는다.
기수네 이모: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까지 먼저 보낸 돈을 열심히 버는 방앗간 주인. 그녀는 동네에 기계방아를 설치하여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돈 장사를 해서 부를 늘리는 30대 여인.
태실이(5): 덕수의 딸로 여기저기서 고명처럼 등장하는 인물. 코흘리개 어린애지만 행동이 맹랑하다.
때
1960년대 초
장소
영산포에서 이십리 떨어진 방앗간이 있는 어느 시골 마을
# 제1막
단풍이 누렇게 물든 마을 어귀에서 방아 찧는 소리가 들린다. 목화밭을 격한 오두막집 지붕에 고추가 널려 있다. 목화밭 건너편에는 기계방아집 기수 이모네 방앗간이이다.
& 덕수네 / 지붕과 마당 그리고 방
구레나룻이 허연 태실이 할아버지가 지붕에 말린 고추를 거둬들이고 있다. 등에는 세 살잡이 손주를 업고 있다. 며느리가 집을 나간데다 아들도 품을 팔러 간 것이다. 태실이가 없으면 태실이 할아버지가 애를 본다.
할아버지
엇치!(재채기를 한 눈에 눈물이 아롱진다.)
허공을 나는 방앗간 집 먼지가 안개같이 흐려 보인다. 먼지는 목화밭에도 앉고 지붕의 고추 위에도 앉았다. 손주가 귀찮은데다 방아 소리와 먼지까지 둘러쓰자 역정이 돋았다. 일 년 내 가꾼 고추농사가 방앗간 집 하루 찧은 품삯만큼도 못한 것이다. 태실이 할아버지는 손가락을 눈물을 닦는다. 그러다가 지붕 이엉이 삭아 발 하나가 푹 빠진다. 그 바람에 등의 손주가 모로 굴러 떨어질 뻔했다. 그때 손주 딸 태실이가 들어온다. 태실이는 코를 훌쩍이면서 한들한들 들어온다.
할아버지
내이 망할 년. 애기 안 보고 어디 갔디야?
태실이
방앗간에서 쌀 줏어 오는디
할아버지
누가 너보고 쌀 줏어 오라디야.
태실이 할아버지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다. 덕수가 돌아온다.
덕수
뭘라고 지붕에는 올라가겠소.
할아버지
이런 것까지 니 손 빌리겄냐.
덕수는 옹배기에 물을 담아 손발을 씻는다. 태실이 할아버지는 물을 데운다. 손주와 저녁을 먹으려는 준비다. 물에 밥을 말아 손주부터 먹인다.
할아버지(혼잣말)
망할 할멈…(푸념조로) 며느리라도 있으면 이 고생은 않을텐디…(사이) 모두가 저 방앗간집 때문이란께. 그 집 돈만 아니었으면 달아날 며느리는 아닌디.
방앗간 집 기수네 이모는 삼 년 전에 남편과 사별했다. 그녀는 한 섬지기 논을 팔아 기계방아를 설치했다. 예전 물방아가 돌던 자리에 발동기를 차린 것이다. 가까운 정미소도 없고 하니 손님은 많았다. 사람들은 멀리 가지 않아서 좋다고들 한다. 벼 방아만 찧던 기수이모네는 작년부터 가루방아도 찧고 솜 타는 일도 한다. 밤마다 절구에 품앗이 방아를 찧던 수고를 벗은 아낙들은 심짓불 밑에서 씨아를 틀던 고생을 덜었다. 마을 사람들도 덕을 보지만 가장 개가를 올린 사람은 기수네 이모다. 마을 일 뿐이 아니라 근동 일감이 몰리면서 큰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돈장사를 시작했다. 덕수 처는 기수네 이모한테 돈을 빌려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태실이 할아버지는 생각에 잠겼다. 모든 사단이 기수네 이모 방앗간 때문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울적하다.
덕수 처(소리만)
돈이 돈 벌아라우.
덕수(소리만)
자네가 장사 않으면 못 살아서 그러고 다닌가. 자네 벌어 온 밥 안 묵을라께 그만두소.
덕수 처(소리만)
기수 이모네 돈 버는 것 보시요. 돈 있어야 돈 벌어라우. 한 장 동안만 나갔다 와도 남의 품 보름 든 논맘큼은 벌 것이요.
기수네 이모로부터 삼만원을 빌려 행상에 나선 며느리는 서너 차례 돈 천 원씩 벌어오다가 한달이 좀 지나서 자취를 감췄다. 한 번 나가곤 다시 안 돌아온 것이다. 방앗간 돈이 아니었던들 일밖에 모르는 며느리가 이런 변을 일으킬 리가 없었을 거라고 태실이 할아버지는 생각한다. 태실이 할아버지가 상을 밀쳐놓고 손주를 재운다. 그리고 담배를 뻐끔뻐끔 빨고 있다. 그사이 덕수가 들어온다. 태실이도 따라 들어온다.
덕수
진지 잡사겠소.
덕수는 건성으로 인삿말만 건네고 아들에게 눈길도 안주고 손깍지로 무릎을 싼 채 바람벽만 보고 있다. 까칠한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태실이 동생 자는 것을 본다.
태실이
눈 뜨고 자는 것 봐야.(동생 눈꺼풀을 닫아 준다.)
할아버지(담배를 털면서)
보리도 어서 안 갈아야겄냐.
덕수
보리 그것 못 갈랍디여.
할아버지
남 갈 때 갈아야제 못써야. (사이) 올해는 추위도 빠를 것 같다야.
덕수
보리도 보리지만 김장 때문에 걱정 아니요.
할아버지
고추는 있은께 소금만 몇 되 사서 얼간 치제 어째야.
덕수
누구 보고 와서 담으락 할 것이요.
할아버지
처가에나 한 번 더 가볼래?
덕수
뭣하게 가라우.
할아버지
그새 혹 소식이라도 있는지 알겄냐?
며느리 종적을 두고 하는 말이다.
덕수
소식이 있으면 기별 안 할랍디여.
할아버지
가부간 죽었는지 살았는지나 알면 안 쓰겄냐.
덕수
글쎄라우.
덕수가 멍하니 눈을 한 곳에 모은 채 응수한다. 태실이 할아버지는 며느리 없는 집에 아들까지 품팔이 일을 나가면 아이 보는 일에 부엌 일까지 해야 한다. 며느리가 하루 빨리 오기를 기대하지만 어렵다면 덕수가 새 여자를 만나기를 기대한다.
할아버지
혹 변심을 해가지고 남의 집으로 가지 않았는지 모르겄다.
덕수
누가 알 것이요.
할아버지
아무튼 니가 적적해서 되겄냐. 섣달까지나 기다려보고 정 안 오면 명년에는 사람을 하나 얻어라. 너도 너지만 살림 꼴이 꼴이냐. 이런 세상은 첨이다.
한때는 봄가을로는 이름 있는 절을 찾아디니면서 풍류를 즐기고 문중 출입도 자주 했던 태실이 할아버지다. 해방과 함께 큰아들이 지랄병으로 죽고 육이오 때 덕수가 좌익을 하는 바람에 가산이 탕진됐다. 고향을 뜨고 싶은 생각도 했으나 고향을 외면하고 어디 가서 살랴 싶어 계속 살고 있는 터이다. 덕수와 태실이도 잠이 든다. ‘탈탈탈탈’ 방앗간 소리가 들린다.(음향)
할아버지(혼잣말)
무슨 방아 소리가 저리 큰지…(사이) 먼지는 사방에 쌓이고, 동네가 회색빛으로 변한디.(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무대: 어두워진다.
& 기수네 이모 방앗간
방아 소리가 요란하다. 기수네 이모는 방앗간 일로 바쁜 것이 아니라, 안집에서 빚을 추심하느라 바쁘다. 방앗간 일은 고용한 일꾼이 알아서 한다. 기수네 이모는 일삯과 빚 추심이 자신의 일이다. 기수네 이모 돈장사는 보름 보름씩 끊어서 이자만 받는다. 월수는 고작 이삼백 원부터 많아야 천 원, 이천 원이지만 이용객이 많아 그 액수가 상당하다. 보름날이라 동네 아낙들이 이자를 갚으려고 기수네 방앗간 안집에서 기다리고 있다.
아낙 1
오메! 나는 이자 백 원을 놓으려고 콩 두 되를 가지고 영산포 장에까지 갔다 왔수예.
아낙 2
나도 깨 두 홉을 팔았네.
아낙 3
우리 이자가 얼만가 보시요예.
기수네 이모가 치마 앞에 돈을 수북히 쌓고 빚 대장을 뒤적이고 있다.
기수네 이모
이자가 비싸다고 한 모양인디, 비싸면들 딴 디서 갖다 쓰시요예. 내 돈 주면서 그런 말 안 들을란께.
아낙 4
비싸기는 뭣이 비싸라우. 딴 디는 일 할 안 받는다우.
기수네 이모
이래도 다 당신들 좋은 일 시키니라고 논 팔아서 방앗간 안 차렸소.
아낙 4
그러고 말고라우. 방앗간 안 차렸으면 우리가 지금 저녁 먹고 마을 나올 틈이나 있겄소.
삐딱한 아낙
이렇게 밎놀이를 하는 것도, 생각하면 마을 사람들 덕 아닌가. 우리가 아니면 이 돈들이 어디서 나왔을 것인가.
기수네 이모
뭣이라우.
(사이)
이렇게 빚 놓은 것이 당신들 덕이여라우? 당신들이 지금 나를 생각하고 돈을 갖다 쓰요.
아낙들
…
기수네 이모
내가 당신들을 편하게 했제. 당신들이 나를 살려줘. 말 같은 말을 하시요.
아낙 2가 화제를 돌린다.
아낙 2
그런 것 저런 것 가릴 것 뭐 있는가. 징한 놈의 방아 안 찧고 씨아 안 튼 게 살겄네. 어서 치우고 떡 추렴이나 하세.
아낙들
그럽시다. 떡 추렴이나 합시다.
기수네 이모가 단독으로 비용을 대서 떡을 준비했다. 떡시루가 들어온다. 호박떡이다. 기수네 이모는 은근이 마을 주민들 덕을 보고 있다는 알기에 방 임자로서 마을꾼을 대접하는 것이다.
무대: 어두워진다
# 제2막
& 기수네 이모 방앗간
방앗간에는 아직도 볏가마니가 밀려 있다. 대동골 사람들이 찧으러 와서 기다리고 있다. 방앗간 안은 먼지가 뿌옇다. 기수네 이모는 줄줄줄 흘러 내리는 쌀 한 줌을 집어서 남폿불에 비쳐 본다. 곁에는 방앗간 일꾼이 가마니 정리를 하고 있다.
기수네 이모
너무 찧어진 것 아니요. 그만 내시요.
기수네 이모는 걸어서 발동기 옆으로 간다. 그새 중유가 반 초롱 가량 닳았다. 내일쯤 또 기름을 사러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기수네 이모
몇 가마니째요?
일꾼
열두 가마니째요.
기수네 이모는 머리속을 굴린다. 열두 가마니면 쌀이 대승 말 두 되를 번 것이다. 한 가마니에 쌀 대승 한 되씩을 받는 것이다. 그게 많이 찧은 날은 밤까지 스무 섬도 찧고 스물한 섬도 찧었다. 단돈 백 원 벌기가 땀나는 촌에서 큰 돈이다.
기수네 이모(혼잣말로)
트럭을 살라먼… (손가락을 집어 본다.)
기수네 이모는 트럭을 사서 물류까지 맡을 생각이다. 근동에 짐바리 몇이 있으나 볏가마니를 많이 운송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그 운임도 적잖다. 오 리 저쪽 사람들은 벌목을 하고 숯을 내는 사마니골 사람들은 영산포읍까지 오십리길을 왕래해야 했다. 그런저런 물류를 기수네 이모는 탐내고 있었다. 돈을 버는데 재능을 지닌 여인이다.
기수네 이모(일꾼에게)
서둘러서 일을 끝내고, 내일은 기름을 좀 사와야 겄네요.
기수네 이모 퇴장하고 방앗간 소리는 계속 들리면서(음향) 무대 어두워진다.
& 덕수네
태실네 집에 기수네 이모가 들어선다.
기수네 이모
계시요?
방문이 열리면서 태실이 아버지 덕수가 까칠한 얼굴이 나타난다.
덕수
…
기수네 이모
어떻게 하실라우?
덕수
하기는 어떻게 해라우.
기수네 이모
그럼 돈을 떼어먹을라우 응? 떼어먹어. 당장 못 줄 테면 이자라도 내놓으시오.
손주를 가운데 끼고 벽을 향해 누워 있던 태실이 할아버지는 또 시작했구나 생각한다. 닷새가 멀다고 쫓아와서 들볶는 소리에 신물이 난 것이다. 그런저런 생각에 지그시 눈을 감는다.
덕수(더듬거리며)
살면 갚을 날이 있제 없을랍디여. 우리 하고 사는 꼴을 좀 보시오. 댁의 돈도 돈이지만 지어미가 나간 통에 살림이 살림이요.
기수네 이모
돈을 가져간 지가 대체 언제요. 애기 어매가 가져간 돈이께 그 여자야 있건 없건 애기 아버지가 내야 할 것 아니요. 그새 이자만 해도 한 달에 천오백 원이께 만이천 원 아니요.
(사이)
어서 내놓시요.
(사이)
돈이 삼만 원이면 내가 내놓고 있는 돈의 절반인디… 그것을 태실이 어매가 돌려달라 하도 해싸서 줬는디요.
덕수(더듬거리며)
이날껏 기별 한 장이 없으니 어쩌란 말이요.
기수네 이모
여덟 달 동안을 제때제때 이자를 받았으면 그것이 또 알을 낳고 그랬을 것인디. 홀몸으로 바동바동 애태우며 모아온 서러운 돈이란 말이요.
덕수(악에 받쳐)
돈이 있어야 내놓지라우. 집이라도 가져가면 모를까. 깽푼 한 잎이 없소.
기수네 이모
집 까짓 게 몇 푼이 돼서 가져가라우. 밭문서 내놓시요.
덕수
밭문서 주면 우리는 아주 죽게라우. 쬐끔만 더 참으시오.
기수네 이모
쪼끔 쪼끔이 언제요. 홀몸으로 고생하고 있으께 사람으로 안 보이요. 홀몸이라고…(홀몸을 강조한다.)
덕수
집이만 홀몸이요? 나도 집이 돈 때문에 홀몸으로 이 고생 아니요.
기수네 이모
뭣이라우!(목소리가 올라간다.) 내 돈 때문에 홀몸이 됐다고라우. 집이가 나 때문에 홀몸이 됐어. 하이고, 기막힌 소리도 다 듣겄네.
덕수
그럼 그렇제 어째라우. 집이 돈이 아니었으면 일밖에 모르는 우리 집사람이 나갔을 것이요. 집이가 돈을 줘서 나갔은께 결국은 집이 때문에 내가 홀몸이 됐제 어째라우. 그런 대가는 생각 않고 돈만 내라고 그리 야단이요. 밭 가져갈라면 차라리 나를 잡어가시오. 나를…(‘나를’을 강조)
기수네 이모
…
덕수 대꾸에 태실이 할아버지는 만족해 한다.
태실이 할아버지(혼잣말)
제 년이 기계방아를 차려서 돈을 벌었고 그 돈바람에 며느리가 포목장사를 나가서 생사조차 묘연하게 됐는디…(사이) 제 년이 내 며느리를 찾아내야지.
기수네 이모는 화가 꼭지까지 치밀어서 돌아간다.
태실이 할아버지(덕수를 보고 돌아누우며)
에 참, 말 잘했다. 내 속이 다 시언하다.
태실이 할아버지는 생각에 잠긴다. 해방 후에 무분별하게 벌채를 하면서 민둥산이 되어간 세월을 돌아본다. 또한 육이오의 붉은 물이 지하를 흐를 때 좌익들 은폐를 막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마을 근처의 수림과 참대나무를 모조러 쳐버렷다. 급한 때는 불을 놓기도 했다. 그렇게 환경이 파괴되어 마음 아픈 태실이 할아버지에게 기계방아는 또 하나의 환경파괴범이다. 기계방아가 마을에 들어온 뒤로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렸다. 기계방아 소리가 계속 들린다.(음향)
태실이 할아버지(혼잣말)
저놈의 방아 소리…(귀를 막는다.)
무대: 어두워진다.
& 기수네 이모 안집
덕수가 일을 하고 있다. 마름을 틀어달라고 해서 기수네 이모 안집 마름을 틀고 있는 것이다. 수건을 목에 걸고 았는 덕수는 일을 하면서 기수네 이모 집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집이 깨끗했다. 커다란 은행나무를 양쪽에 끼고 있었고, 은행나무 밑에는 장독대가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기수네 이모가 저녁상을 내온다. 상에는 김이 무럭거리는 하얀 쌀밥에 고추장이 빨갛고 나물도 기름내가 구수하다. 멸치 육수에 삶은 무국도 맛있다. 게다가 토하젓까지. 나무랄데 없는 음식 솜씨다. 이때 코를 대롱거리며 태실이가 들어온다.
덕수(태실이를 향해)
이년아, 코나 좀 닦고 오너라.
덕수는 밥을 한 술 남겨서 딸에게 주려고 한다. 그것을 본 기수네 이모가 부엌을 향해 동자 아이에게 말한다.
기수네 이모
아야, 거기 남은 밥 가져오너라아이.
동자아이가 밥을 내오고 그것을 냉큼 받는 태실이. 기수네 이모는 저만치서 가슴을 풀어 헤치고 편안한 상태로 누워서 쉬고 있다. 기수네 이모는 본래 누워 쉬는 것을 좋아한다.
덕수(기수네 이모에게서 눈길을 돌려 태실이를 향해)
이년아, 냉큼 먹고 가서 애기 봐야.
기수네 이모
놔두시요. 천천히 먹고 가게.
덕수
얼른 먹고 가야.
태실이 퇴장하고 덕수는 담배 한 갑을 지급 받는다.
덕수
감사하고만요. 잘 먹고 가고만이라우.
기수네 이모
잠깐 뵙시다.
(사이)
앉아 보시요.
덕수(앉는다.)
…
기수네 이모
밭이라도 팔아서 해주라 말이요. 이자를 제때제때 받아서 빚 놨으면 그 돈이 몇 천 원은 안 되었겄소.
덕수(난처한 표정으로)
갚기 싫어서 안 갚을 것이요. 우리 집 형편을 보시요. 빚을 갚게 생겼는가.
기수네 이모
긍께 밭을 팔아서 주란 말이요. 태실이 어메가 첨에 밭이라도 잡고 주라는 것을, 믿고 그냥 줬습네이다. 홀몸으로 방앗간을 꾸려나가기가 보통 일인 줄 아요.
덕수
그래도 집이는 나보다 나을 것이요. 늙은 아버지께 부엌동자를 맡기고 일을 다니요.
기수네 이모
그래도 집이는 애기들이라도 있은께 더 안 낫겄소. 나는 혼자 어쩌겄소.
(사이)
그래 집이 애기 어메 나간 것이 내 죄요? 나보고 애기 어메를 찾아내라고 하게.
뜻밖의 얘기에 덕수는 당황한다.
덕수
생각햐면 그렇제 어째라우. 댁이 아니면 내가 홀몸이 되었을 것이요. 댁의 돈 때문에 집사람이 나가고 이 모양이제. 돈도 좋지만 사람 없으면 살겄습디여.(맞장구를 치는 셈이다.)
기수네 이모
그런께 통 내 죄구만이라우잉.
덕수
돈 받을 생각 마시고 차라리 나를 잡으시오. 그러면 피차 고생을 한 덜겄소.
기수네 이모
이 양반이 못할 말이 없네.
덕수
치이!
기수네 이모
에잇, 여보시오.
덕수 나가고 기수네 이모는 옷을 갈아 입는다. 옷을 갈아 입으면서 체경에 비춰 본다. 무늬 어린 자락치마가 반드르르 빛나고 그 밑에 하얀 버선이 예쁘다. 끝자락을 되게 여며서 안 퍼지게 감추고 다시 체경을 들여다 본다. 기수네 이모 집을 나선다. 무대: 어두워진다.
# 제3막
방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마을 사람들의 귀마다 저와 같이 울리는 방아소리는 그것이 그대로 자연을 극복하고 인간승리를 의미하는 복음이라고 생각했다. 기수네 이모는 오늘밤에는 기필코 밀린 이자를 받아내리라고 다짐한다. 방아소리를 유일하게 미워하는 사람은 태실이 할아버지다. 그는 기계방아가 마을을 망치는 원흉이라 생각한다.
& 태실네 / 마당
태실이 할아버지(혼잣말로)
에잇 툇!
(사이)
방아 좀 안 찧는 것이 그리 좋아서 팽팽한 육신을 놀려서 뭐 할라고.
에잇 툇툇툇!
태실네 할아버지는 아낙들이 기계방아에 맞기고 자신들 방아 찧는 일에서 해방된 것을 고깝게 생각한다. 결국 기계방아가 내는 먼지와 시끄러운 소리로 마을은 망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집에 오는 길에 기수네 이모를 봤기에 기분이 더러워서 침을 뱉고 헛기침을 한다.
태실이 할아버지(집으로 들어서며)
애비 있냐?
덕수
이제 오십니꺼.
덕수가 방문을 열고 일어서서 나오며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린다.
태실네 할아버지
그래 이놈아, 할 일이 그리 없어서 품삯도 없는 집 일을 하러 다니냐. 뭣이 좋아서 그 여편네 일을 갔냐.
덕수
빚진 죄인이라니 하는 수 있소. 일이라도 해주락 한께 해줘야줘.
할아버지
에잇 못난 자식. 여편네는 못 찾아주락 할망정 그런 종노릇을 하고 다녀야. 그래 너는 방아 소리가 듣기 좋으냐.
덕수
아버니, 일찍이 누우십시오.
할아버지
흥! 이러고 있은께 술 한잔 먹을 데가 없는 줄 아냐. 안 노인이 공술 한잔 줘서 먹었다.
덕수
잘 하셨습니다. 어서 누십시요.
할아버지
여편네를 안 찾아주면 그년 집에 가서 파고 살아라. 김장도 그년보고 담아주락 하고.
태실이 할아버지는 기수네 이모가 돈만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며느리가 나갔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기수네 이모 때문에 며느리가 돈에 눈이 어두워서 나간 것이라고.
덕수
어서 들어가서 주무셔요.
할아버지
그년 때문에 며느리 생사도 모르게 됐는디… 죽지만 않았으면 오기는 올 것이다만.
태실이 할아버지는 며느리에 대한 믿음이 있다. 태실이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가고 무대는 어두워진다.
& 마을 거리
방앗간 일꾼이 기계를 손보다 팔을 잘려 면소 간이병원으로 가는 길이다. 집 일꾼에 업혀 지나간다. 업혀가는 일꾼은 팔이 축 쳐져있고 신음 소리를 내면서 무대에서 사라진다.
아낙 1
오메 저런이라니!
아낙 2
어따어따! 어쩌다가 그랬당가.
아낙 3
기계는 항상 무섭다 마시. 일꾼도 일꾼이지만 기수네 이모가 되었는가.
사라진 일꾼 뒤로 부리나케 기수네 이모도 따라간다.
기수네 이모
이 일을 어째사 쓸고이.
(사이… 앞서서 떠난 일꾼을 보고)
피 더 안 흐르게 꽉 좀 붙잡으시요.
(사이) 피 덜 흐르게 꽉 좀 붙잡으란 말이요.
아낙 1
어쩌다가 그랬다우.
기수네 이모(건성으로)
일 하다가 … 기계 손보다가(말의 두서가 없다. 그리고 무대 밖으로 서둘러 사라진다.)
기수네 이모(소리만)
치료비가 만만치 않을 텐디… 누구보다 일을 하락할까?
일꾼 팔도 팔이지만 들어갈 비용에 앞으로 일할 사람 없는 것 등이 막막한 것이다.
& 주막
태실이 할아버지는 안 노인네 술집으로 갔다. 젊은이들 셋이서 술상을 받고 있다.
청년 1
나오십니껴.
할아버지(건성으로 말을 들으며)
들어보소들.
(사이)
툇!(가래를 뱉는다.)
청년들
…
할아버지
방앗간 차려서 좋다고들 하더니 좋은 것이 얼마나 있는가. 당장 절구질 좀 안 하고 물레 안 틀게 살지 알고들. 팽팽한 육신들 놔두고 얼마나 편할라고 기계방아 기계방아들 해. 팔 잘라지기 다행이지 만일 머리라도 감겼어보소. 대갈통이 달아나서 당장 죽었지. 방앗간 차린 뒤로는 시끄러워서 잠을 편히 잘 수 있는가.
청년 2(말 대접으로)
그러시고 말고라우. 올라앉으십쇼.
할아버지
자네들이나 들소.
청년 3
올라앉읍시다.(술을 따른다.)
할아버지(술청에 앉으면서)
금메 마시. 그놈의 먼지는 온 천지를 덮어서 희뿌옇고. 기계방아가 마을을 다 망친단 마시. (사이) 근디, 무슨 트럭을 산다고 하더만. 그것이 편하고 좋은 것 같지만 기계방아에 팔 잘리듯이 그것도 필경 죽음을 앞당기는 것이랑께.
청년들
…
할아버지
발달 발달. 신식 신식, 해쌌지만 발달하고 신식이 돼서 뭐가 얼마나 좋아졌는가. 좋아진 것이 있다면 몸이 좀 편해졌을 뿐이제. 사람 사는 마을은 마음들이 편해야제…
청년들
…
할아버지
편히 살려다가 빨리 죽기 십상이여. 봐~ 방앗간 일꾼을. 그게 모다 저연을 배반하고 천심에 반역하는 결과여.
청년1
어서 잔 드십시다.
할아버지
들게들.
무대: 어두워진다.
& 태실네
태실네 식구는 일찍이 불을 끄고 잠을 청한다. 각각 나간 아내와 며느리 생각에 잠겨있다. 그때 밖에서 기수네 이모가 기척을 한다.
기수네 이모(소리만)
흐음!
덕수(심지에 불을 붙이고 방문을 연다.)
웬일이요?
기수네 이모
방앗간이 밀려서 그런디 손 좀 봐주실라우?
덕수
…
기수네 이모
기술자도 없고 죽겄구만이라우. 저녁만 나와서 거들어주쇼.
덕수
그럽시다.
할아버지(역정 난 목소리)
가기는 어디를 가야.
덕수(할아버지를 보고)
아버지는 가만히 계시쇼.
할아버지
손 잘릴라고 가야.
덕수
빚이 원수지라우. 다녀 오께라우.
기수네 이모와 덕수가 무대에서 사라지고 무대는 어두워진다.
& 기수네 이모 방앗간
세 사람, 네 사람이 싸댔는데도 정미는 첫닭이 훼칠 무력에야 가까스로 끝났다.(음향: 닭 우는 소리) 솜은 내일 타기로 하고 덕수는 대강 비질을 하고 마무리 짓는다.
기수네 이모
된 참 했소. 갑시다. 가서 막걸리나 한잔 하쇼.
기수네 이모가 안채로 향한다. 뒤 따르는 덕수가 손을 털고 머리 수건을 벗어 턴다. 기수네 이모는 사라졌다가 다시 안채로 들어서고 덕수는 옷을 털고 참을 들 준비를 한다. 기수네 이모는 그 사이에 세수까지 하고 들어온다. 수건으로 낯을 닦는다.
기수네 이모
앉으시요.
덕수
밤중에 안 되었소.(기수네 이모가 가리키는 자리에 앉는다.)
기수네 이모
안 되기는 뭣이 안 되라우. 집이하고 할 말도 좀 있고 해서 오시락 했소.
기수네 이모는 술상을 봐온다. 이미 준비됐는지 신속하게 들고 들어온다. 뚝배기에 남실거리는 탑탑한 막걸리가 군침을 돌게 한다. 덕수는 침을 꿀꺽 삼킨다.
기수네 이모(술을 따르면서)
드십시오.
덕수
미안하요.
덕수는 잔을 쭈욱 들이킨다. 그 모습을 기수네 이모가 빤히 쳐다본다.
기수네 이모
빚은 언제 갚으실라우?(내용에 비해 말투가 평온하다.)
덕수
갚을 날이 있제 없을랍디여.
기수네 이모
갚기 어려울 것 같으면 방앗간 일이나 쭈욱 봐주쇼. 일꾼도 그렇게 돼버렸겠다. 사람을 하나 써야겠는디 돈이 있소? 돈이. 병원비가 자그마치 만 원도 더 들 것 같다는디. 내일 도립병원으로 간다우. 어디가 병원비 뿐이요. 우리 일을 하다 그랬은께 퇴원을 해도 쌀가마니는 안 줘야겠지라우.
덕수
글쎄라우.
기수네 이모
차를 살라고 했는디, 다 글러부렀소. 이자 주시란 말 안 하께 방앗간 일 좀 봐주쇼.
덕수
우리는 누가 벌어묵고 살게라우.
기수네 이모(부드러운 말투로)
아따! 잘만 하시면 다 거기 있지 않소.
덕수
그럴라면 빚 대신 나를 아주 가져가시요.
기수네 이모(말꼬리를 흐리면서)
저 양반이 못할 말이 없다이.
덕수
그럴 것 뭐 있는가. 방앗집 돌봐주께 마누라 삼세.
덕수는 기수네 이모 손을 끈다.
기수네 이모(앙탈이 아닌 아양조로)
움마움마! 이 양반 봐야.
덕수
오라 마시, 이리.
덕수는 불을 훅 끈다. 그리고 기수네 이모 허리를 끌어 안는다.
무대: 어두워진다.
& 같은 장소 / 다음날
둘이는 늦잠을 자고 있다. 밖에서 성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음향)
할아버지(소리만)
이놈아, 뭣이 좋아서 잠까지 자고 있냐. (사이) 니 여편네 왔다. 어서 오니라.
덕수가 깜짝 놀라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선다. 기수네 이모는 옷 매무새를 고치고 사라진다.
할아버지
섬에 가서 미역장사하고 왔단다.
기수네 이모(소리만)
오메, 그럼 내 돈 받아야겄네.
할아버지
돈은 무슨 돈. 한 이불 속에서 잔 여자가 무슨 돈.
무대: 어두워지고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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