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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와 희곡

오유권 원작, 기계방아 도는 마을 제1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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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방아 도는 마을

원작: 오유권 소설, 기계방아 도는 마을(현대문학, 1965. 06)

각색: 공노사노 김병한

등장인물

덕수(30)
할아버지: 덕수 아버지, 태실이 할아버지
태실이(5)
손주(3): 태실이 동생
기수네 이모
동네 아낙들
삐딱 아낙
방앗간 일꾼

대화 중에 나오는 인물

덕수 처

주요 등장인물 성격

태실이 할아버지: 덕수의 아버지로 한때는 한다한 살림을 꾸렸던 노년. 사랑에서 서화운객과 더불어 시조를 읊고 골패를 뗀 과거를 회상하기도 한다. 자식의 좌익 활동으로 가산이 탕진됐지만 아들과 며느리를 믿는 편이다. 환경에 관심이 커서 방앗간 먼지가 동네 환경을 망친다고 생각한다.

덕수(30): 좌익 활동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품팔이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장. 아내가 기수네 이모에게 돈을 빌려 장사를 나갔다가 소식이 끊겨도 찾을 생각을 안 한다. 아내 빌린 돈 이자값으로 기수네 이모 방앗간 일을 돕는다.

기수네 이모: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까지 먼저 보낸 돈을 열심히 버는 방앗간 주인. 그녀는 동네에 기계방아를 설치하여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돈 장사를 해서 부를 늘리는 30대 여인.

태실이(5): 덕수의 딸로 여기저기서 고명처럼 등장하는 인물. 코흘리개 어린애지만 행동이 맹랑하다.

 

1960년대 초

장소

영산포 근처 방앗간이 있는 어느 시골 마을

# 제1막

단풍이 누렇게 물든 마을 어귀에서 방아 찧는 소리가 들린다. 목화밭을 격한 오두막집 지붕에 고추가 널려 있다. 목화밭 건너편에는 기계방아집 기수 이모네다.

& 덕수네 / 지붕과 마당 그리고 방

구레나룻이 허연 태실이 할아버지가 지붕에 말린 고추를 거둬들이고 있다. 등에는 세 살잡이 손주를 업고 있다. 며느리가 집을 나간데다 아들도 품을 팔러 간 것이다. 태실이가 없으면 태실이 할아버지가 애를 본다.

할아버지

엇치!(재채기를 한 눈에 눈물이 아롱진다.)

허공을 나는 방앗간 집 먼지가 안개같이 흐려 보인다. 먼지는 목화밭에도 앉고 지붕의 고추 위에도 앉았다. 손주가 귀찮은데다 방아 소리와 먼지까지 둘러쓰자 역정이 돋았다. 일 년 내 가꾼 고추농사가 방앗간 집 하루 찧은 품삯만큼도 못한 것이다. 태실이 할아버지는 손가락을 눈물을 닦는다. 그러다가 지붕 이엉이 삭아 발 하나가 푹 빠진다. 그 바람에 등의 손주가 모로 굴러 떨어질 뻔했다. 그때 손주 딸 태실이가 들어온다. 태실이는 코를 훌쩍이면서 한들한들 들어온다.

할아버지

내이 망할 년. 애기 안 보고 어디 갔디야?

태실이

방앗간에서 쌀 줏어 오는디

할아버지

누가 너보고 쌀 줏어 오라디야.

태실이 할아버지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다. 덕수가 돌아온다.

덕수

뭘라고 지붕에는 올라가겠소.

할아버지

이런 것까지 니 손 빌리겄냐.

덕수는 옹배기에 물을 담아 손발을 씻는다. 태실이 할아버지는 물을 데운다. 손주와 저녁을 먹으려는 준비다. 물에 밥을 말아 손주부터 먹인다.

할아버지(혼잣말)

망할 할멈…(푸념조로) 며느리라도 있으면 이 고생은 않을텐디…(사이) 모두가 저 방앗간집 때문이란께. 그 집 돈만 아니었으면 달아날 며느리는 아닌디.

방앗간 집 기수네 이모는 삼 년 전에 남편과 사별했다. 그녀는 한 섬지기 논을 팔아 기계방아를 설치했다. 예전 물방아가 돌던 자리에 발동기를 차린 것이다. 가까운 정미소도 없고 하니 손님은 많았다. 사람들은 멀리 가지 않아서 좋다고들 한다. 벼 방아만 찧던 기수이모네는 작년부터 가루방아도 찧고 솜 타는 일도 한다. 밤마다 절구에 품앗이 방아를 찧던 수고를 벗은 아낙들은 심짓불 밑에서 씨아를 틀던 고생을 덜었다. 마을 사람들도 덕을 보지만 가장 개가를 올린 사람은 기수네 이모다. 마을 일 뿐이 아니라 근동 일감이 몰리면서 큰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돈장사를 시작했다. 덕수 처는 기수네 이모한테 돈을 빌려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태실이 할아버지는 생각에 잠겼다. 모든 사단이 기수네 이모 방앗간 때문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울적하다.

덕수 처(소리만)

돈이 돈 벌아라우.

덕수(소리만)

자네가 장사 않으면 못 살아서 그러고 다닌가. 자네 벌어 온 밥 안 묵을라께 그만두소.

덕수 처(소리만)

기수 이모네 돈 버는 것 보시요. 돈 있어야 돈 벌어라우. 한 장 동안만 나갔다 와도 남의 품 보름 든 논맘큼은 벌 것이요.

기수네 이모로부터 삼만원을 빌려 행상에 나선 며느리는 서너 차례 돈 천 원씩 벌어오다가 한달이 좀 지나서 자취를 감췄다. 한 번 나가곤 다시 안 돌아온 것이다. 방앗간 돈이 아니었던들 일밖에 모르는 며느리가 이런 변을 일으킬 리가 없었을 거라고 태실이 할아버지는 생각한다. 태실이 할아버지가 상을 밀쳐놓고 손주를 재운다. 그리고 담배를 뻐끔뻐끔 빨고 있다. 그사이 덕수가 들어온다. 태실이도 따라 들어온다.

덕수

진지 잡사겠소.

덕수는 건성으로 인삿말만 건네고 아들에게 눈길도 안주고 손깍지로 무릎을 싼 채 바람벽만 보고 있다. 까칠한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태실이 동생 자는 것을 본다.

태실이

눈 뜨고 자는 것 봐야.(동생 눈꺼풀을 닫아 준다.)

할아버지(담배를 털면서)

보리도 어서 안 갈아야겄냐.

덕수

보리 그것 못 갈랍디여.

할아버지

남 갈 때 갈아야제 못써야. (사이) 올해는 추위도 빠를 것 같다야.

덕수

보리도 보리지만 김장 때문에 걱정 아니요.

할아버지

고추는 있은께 소금만 몇 되 사서 얼간 치제 어째야.

덕수

누구 보고 와서 담으락 할 것이요.

할아버지

처가에나 한 번 더 가볼래?

덕수

뭣하게 가라우.

할아버지

그새 혹 소식이라도 있는지 알겄냐?

며느리 종적을 두고 하는 말이다.

덕수

소식이 있으면 기별 안 할랍디여.

할아버지

가부간 죽었는지 살았는지나 알면 안 쓰겄냐.

덕수

글쎄라우.

덕수가 멍하니 눈을 한 곳에 모은 채 응수한다. 태실이 할아버지는 며느리 없는 집에 아들까지 품팔이 일을 나가면 아이 보는 일에 부엌 일까지 해야 한다. 며느리가 하루 빨리 오기를 기대하지만 어렵다면 덕수가 새 여자를 만나기를 기대한다.

할아버지

혹 변심을 해가지고 남의 집으로 가지 않았는지 모르겄다.

덕수

누가 알 것이요.

할아버지

아무튼 니가 적적해서 되겄냐. 섣달까지나 기다려보고 정 안 오면 명년에는 사람을 하나 얻어라. 너도 너지만 살림 꼴이 꼴이냐. 이런 세상은 첨이다.

한때는 봄가을로는 이름 있는 절을 찾아디니면서 풍류를 즐기고 문중 출입도 자주 했던 태실이 할아버지다. 해방과 함께 큰아들이 지랄병으로 죽고 육이오 때 덕수가 좌익을 하는 바람에 가산이 탕진됐다. 고향을 뜨고 싶은 생각도 했으나 고향을 외면하고 어디 가서 살랴 싶어 계속 살고 있는 터이다. 덕수와 태실이도 잠이 든다. ‘탈탈탈탈’ 방앗간 소리가 들린다.(음향)

할아버지(혼잣말)

무슨 방아 소리가 저리 큰지…(사이) 먼지는 사방에 쌓이고, 동네가 회색빛으로 변한디.(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무대: 어두워진다.

& 기수네 이모 방앗간

방아 소리가 요란하다. 기수네 이모는 방앗간 일로 바쁜 것이 아니라, 안집에서 빚을 추심하느라 바쁘다. 방앗간 일은 고용한 일꾼이 알아서 한다. 기수네 이모는 일삯과 빚 추심이 자신의 일이다. 기수네 이모 돈장사는 보름 보름씩 끊어서 이자만 받는다. 월수는 고작 이삼백 원부터 많아야 천 원 이천 원이지만 이용객이 많아 그 액수가 상당하다. 보름날이라 아낙들이 이자를 갚으려고 기수네 방앗간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다.

아낙 1

오메! 나는 이자 백 원을 놓으려고 콩 두 되를 가지고 영산포 장에까지 갔다 왔수예.

아낙 2

나도 깨 두 홉을 팔았네.

아낙 3

우리 이자가 얼만가 보시요예.

기수네 이모가 치마 앞에 돈을 수북히 쌓고 빚 대장을 뒤적이고 있다.

기수네 이모

이자가 비싸다고 한 모양인디, 비싸면들 딴 디서 갖다 쓰시요예. 내 돈 주면서 그런 말 안 들을란께.

아낙 4

비싸기는 뭣이 비싸라우. 딴 디는 일 할 안 받는다우.

기수네 이모

이래도 다 당신들 좋은 일 시키니라고 논 팔아서 방앗간 안 차렸소.

아낙 4

그러고 말고라우. 방앗간 안 차렸으면 우리가 지금 저녁 먹고 마을 나올 틈이나 있겄소.

삐딱한 아낙

이렇게 밎놀이를 하는 것도, 생각하면 마을 사람들 덕 아닌가. 우리가 아니면 이 돈들이 어디서 나왔을 것인가.

기수네 이모

뭣이라우.
(사이)
이렇게 빚 놓은 것이 당신들 덕이여라우? 당신들이 지금 나를 생각하고 돈을 갖다 쓰요.

아낙들

기수네 이모

내가 당신들을 편하게 했제. 당신들이 나를 살려줘. 말 같은 말을 하시요.

아낙 2가 화제를 돌린다.

아낙 2

그런 것 저런 것 가릴 것 뭐 있는가. 징한 놈의 방아 안 찧고 씨아 안 튼 게 살겄네. 어서 치우고 떡 추렴이나 하세.

아낙들

그럽시다. 떡 추렴이나 합시다.

기수네 이모가 단독으로 비용을 대서 떡을 준비했다. 떡시루가 들어온다. 호박떡이다. 기수네 이모는 은근이 마을 주민들 덕을 보고 있다는 알기에 방 임자로서 마을꾼을 대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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