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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와 희곡

오유권 원작, 기계방아 도는 마을 제2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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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막

& 기수네 이모 방앗간

방앗간에는 아직도 볏가마니가 밀려 있다. 대동골 사람들이 찧으러 와서 기다리고 있다. 방앗간 안은 먼지가 뿌옇다. 기수네 이모는 줄줄줄 흘러 내리는 쌀 한 줌을 집어서 남폿불에 비쳐 본다. 곁에는 방앗간 일꾼이 가마니 정리를 하고 있다.

기수네 이모

너무 찧어진 것 아니요. 그만 내시요.

기수네 이모는 걸어서 발동기 옆으로 간다. 그새 중유가 반 초롱 가량 닳았다. 내일쯤 또 기름을 사러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기수네 이모

몇 가마니째요?

일꾼

열두 가마니째요.

기수네 이모는 머리속을 굴린다. 열두 가마니면 쌀이 대승 말 두 되를 번 것이다. 한 가마니에 쌀 대승 한 되씩을 받는 것이다. 그게 많이 찧은 날은 밤까지 스무 섬도 찧고 스물한 섬도 찧었다. 단돈 백 원 벌기가 땀나는 촌에서 큰 돈이다.

기수네 이모(혼잣말로)

트럭을 살라먼… (손가락을 집어 본다.)

기수네 이모는 트럭을 사서 물류까지 맡을 생각이다. 근동에 짐바리 몇이 있으나 볏가마니를 많이 운송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그 운임도 적잖다. 오 리 저쪽 사람들은 벌목을 하고 숯을 내는 사마니골 사람들은 영산포읍까지 오십리길을 왕래해야 했다. 그런저런 물류를 기수네 이모는 탐내고 있었다. 돈을 버는데 재능을 지닌 여인이다.

기수네 이모(일꾼에게)

서둘러서 일을 끝내고, 내일은 기름을 좀 사와야 겄네요.

기수네 이모 퇴장하고 방앗간 소리는 계속 들리면서(음향) 무대 어두워진다.

& 덕수네

태실네 집에 기수네 이모가 들어선다.

기수네 이모

계시요?

방문이 열리면서 태실이 아버지 덕수가 까칠한 얼굴이 나타난다.

덕수

기수네 이모

어떻게 하실라우?

덕수

하기는 어떻게 해라우.

기수네 이모

그럼 돈을 떼어먹을라우 응? 떼어먹어. 당장 못 줄 테면 이자라도 내놓으시오.

손주를 가운데 끼고 벽을 향해 누워 있던 태실이 할아버지는 또 시작했구나 생각한다. 닷새가 멀다고 쫓아와서 들볶는 소리에 신물이 난 것이다. 그런저런 생각에 지그시 눈을 감는다.

덕수(더듬거리며)

살면 갚을 날이 있제 없을랍디여. 우리 하고 사는 꼴을 좀 보시오. 댁의 돈도 돈이지만 지어미가 나간 통에 살림이 살림이요.

기수네 이모

돈을 가져간 지가 대체 언제요. 애기 어매가 가져간 돈이께 그 여자야 있건 없건 애기 아버지가 내야 할 것 아니요. 그새 이자만 해도 한 달에 천오백 원이께 만이천 원 아니요.
(사이)
어서 내놓시요.
(사이)
돈이 삼만 원이면 내가 내놓고 있는 돈의 절반인디… 그것을 태실이 어매가 돌려달라 하도 해싸서 줬는디요.

덕수(더듬거리며)

이날껏 기별 한 장이 없으니 어쩌란 말이요.

기수네 이모

여덟 달 동안을 제때제때 이자를 받았으면 그것이 또 알을 낳고 그랬을 것인디. 홀몸으로 바동바동 애태우며 모아온 서러운 돈이란 말이요.

덕수(악에 받쳐)

돈이 있어야 내놓지라우. 집이라도 가져가면 모를까. 깽푼 한 잎이 없소.

기수네 이모

집 까짓 게 몇 푼이 돼서 가져가라우. 밭문서 내놓시요.

덕수

밭문서 주면 우리는 아주 죽게라우. 쬐끔만 더 참으시오.

기수네 이모

쪼끔 쪼끔이 언제요. 홀몸으로 고생하고 있으께 사람으로 안 보이요. 홀몸이라고…(홀몸을 강조한다.)

덕수

집이만 홀몸이요? 나도 집이 돈 때문에 홀몸으로 이 고생 아니요.

기수네 이모

뭣이라우!(목소리가 올라간다.) 내 돈 때문에 홀몸이 됐다고라우. 집이가 나 때문에 홀몸이 됐어. 하이고, 기막힌 소리도 다 듣겄네.

덕수

그럼 그렇제 어째라우. 집이 돈이 아니었으면 일밖에 모르는 우리 집사람이 나갔을 것이요. 집이가 돈을 줘서 나갔은께 결국은 집이 때문에 내가 홀몸이 됐제 어째라우. 그런 대가는 생각 않고 돈만 내라고 그리 야단이요. 밭 가져갈라면 차라리 나를 잡어가시오. 나를…(‘나를’을 강조)

기수네 이모

덕수 대꾸에 태실이 할아버지는 만족해 한다.

태실이 할아버지(혼잣말)

제 년이 기계방아를 차려서 돈을 벌었고 그 돈바람에 며느리가 포목장사를 나가서 생사조차 묘연하게 됐는디…(사이) 제 년이 내 며느리를 찾아내야지.

기수네 이모는 화가 꼭지까지 치밀어서 돌아간다.

태실이 할아버지(덕수를 보고 돌아누우며)

에 참, 말 잘했다. 내 속이 다 시언하다.

태실이 할아버지는 생각에 잠긴다. 해방 후에 무분별하게 벌채를 하면서 민둥산이 되어간 세월을 돌아본다. 또한 육이오의 붉은 물이 지하를 흐를 때 좌익들 은폐를 막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마을 근처의 수림과 참대나무를 모조러 쳐버렷다. 급한 때는 불을 놓기도 했다. 그렇게 환경이 파괴되어 마음 아픈 태실이 할아버지에게 기계방아는 또 하나의 환경파괴범이다. 기계방아가 마을에 들어온 뒤로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렸다. 기계방아 소리가 계속 들린다.(음향)

태실이 할아버지(혼잣말)

저놈의 방아 소리…(귀를 막는다.)

무대: 어두워진다.

& 기수네 이모 안집

덕수가 일을 하고 있다. 마름을 틀어달라고 해서 기수네 이모 안집 마름을 틀고 있는 것이다. 수건을 목에 걸고 았는 덕수는 일을 하면서 기수네 이모 집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집이 깨끗했다. 커다란 은행나무를 양쪽에 끼고 있었고, 은행나무 밑에는 장독대가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기수네 이모가 저녁상을 내온다. 상에는 김이 무럭거리는 하얀 쌀밥에 고추장이 빨갛고 나물도 기름내가 구수하다. 멸치 육수에 삶은 무국도 맛있다. 게다가 토하젓까지. 나무랄데 없는 음식 솜씨다. 이때 코를 대롱거리며 태실이가 들어온다.

덕수(태실이를 향해)

이년아, 코나 좀 닦고 오너라.

덕수는 밥을 한 술 남겨서 딸에게 주려고 한다. 그것을 본 기수네 이모가 부엌을 향해 동자 아이에게 말한다.

기수네 이모

아야, 거기 남은 밥 가져오너라아이.

동자아이가 밥을 내오고 그것을 냉큼 받는 태실이. 기수네 이모는 저만치서 가슴을 풀어 헤치고 편안한 상태로 누워서 쉬고 있다. 기수네 이모는 본래 누워 쉬는 것을 좋아한다.

덕수(기수네 이모에게서 눈길을 돌려 태실이를 향해)

이년아, 냉큼 먹고 가서 애기 봐야.

기수네 이모

놔두시요. 천천히 먹고 가게.

덕수

얼른 먹고 가야.

태실이 퇴장하고 덕수는 담배 한 갑을 지급 받는다.

덕수

감사하고만요. 잘 먹고 가고만이라우.

기수네 이모

잠깐 뵙시다.
(사이)
앉아 보시요.

덕수(앉는다.)

기수네 이모

밭이라도 팔아서 해주라 말이요. 이자를 제때제때 받아서 빚 놨으면 그 돈이 몇 천 원은 안 되었겄소.

덕수(난처한 표정으로)

갚기 싫어서 안 갚을 것이요. 우리 집 형편을 보시요. 빚을 갚게 생겼는가.

기수네 이모

긍께 밭을 팔아서 주란 말이요. 태실이 어메가 첨에 밭이라도 잡고 주라는 것을, 믿고 그냥 줬습네이다. 홀몸으로 방앗간을 꾸려나가기가 보통 일인 줄 아요.

덕수

그래도 집이는 나보다 나을 것이요. 늙은 아버지께 부엌동자를 맡기고 일을 다니요.

기수네 이모

그래도 집이는 애기들이라도 있은께 더 안 낫겄소. 나는 혼자 어쩌겄소.
(사이)
그래 집이 애기 어메 나간 것이 내 죄요? 나보고 애기 어메를 찾아내라고 하게.

뜻밖의 얘기에 덕수는 당황한다.

덕수

생각햐면 그렇제 어째라우. 댁이 아니면 내가 홀몸이 되었을 것이요. 댁의 돈 때문에 집사람이 나가고 이 모양이제. 돈도 좋지만 사람 없으면 살겄습디여.(맞장구를 치는 셈이다.)

기수네 이모

그런께 통 내 죄구만이라우잉.

덕수

돈 받을 생각 마시고 차라리 나를 잡으시오. 그러면 피차 고생을 한 덜겄소.

기수네 이모

이 양반이 못할 말이 없네.

덕수

치이!

기수네 이모

에잇, 여보시오.

덕수 나가고 기수네 이모는 옷을 갈아 입는다. 옷을 갈아 입으면서 체경에 비춰 본다. 무늬 어린 자락치마가 반드르르 빛나고 그 밑에 하얀 버선이 예쁘다. 끝자락을 되게 여며서 안 퍼지게 감추고 다시 체경을 들여다 본다. 기수네 이모 집을 나선다. 무대: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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