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남매
원작: 오유권 소설 황량한 촌락
옴니버스 2: 어린 남매
각색: 공노사노 김병한
등장인물
여자 아이(12)
사내 아이: 길주(9)
짐바리꾼
노인
주요 등장인물 성격
여자 아이: 나이에 비해 성숙하여 세 살 아래 남동생을 잘 보호함. 부모가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외할머니 편에 동생과 함께 피난을 보냈다. 피난길에 족보를 보관하도록 했다. 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족보로 일가를 찾아갈 수 있도록.
사내 아이: 누나의 보호를 받으면서 칭얼대는 수준의 남자 아이. 고생은 감수하지만 어리기 때문에 아무래도 인내력이 부족하다. 누나의 말을 잘 따르는 말썽을 부리지 않는 기특한 아이이지만 자기들에게 홀대한 노인에게는 은근히 화를 내고 욕을 한다.
짐바리꾼: 두 남매의 귀향길에 20리를 마차에 태워준 마음씨 고운 남자. 그는 힘들게 까치재를 넘으면서 남매가 장흥을 찾아가는 길을 알려준다. 남매의 안전에 마음을 많이 써준다.
노인: 경찰 주둔 전에 사람을 숨겼다가 아들이 죽는 변고를 거친 노년의 남자. 그래서 사람 거두기를 꺼린다. 두 어린이의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하지 않고 냉정하게 대한다.
때
1951년 경(전쟁 중 어느 날)
장소
까치재와 노인의 집
# 막이 열림
삭은 바윗골서 구릉 장터로 빠지는 험한 까치재를 한 짐바리가 올라가고 있다. 수레 위에는 큰 왜솥이며 함박이며 농짝이며 곡식 가마니가 포갬포갬 실려 있다. 뒤에는 총 긴 짚단이 몇 묶음 쌓여 있다. 이삿짐을 싣고 대파리등으로 가는 짐바리였다.
& 재를 넘는 길 / 짐바리
짐바리 뒤를 두 아이가 따라간다. 외할머니 따라 외가로 피난을 갔다가 경찰이 진주한 지 한 달이 넘어도 집에서 소식이 없기 때문에 집을 찾아가는 길이다. 외가는 경찰이 진주하기 이틀 전에 식구가 모조리 칼 맞아 죽었다. 두 남매는 힘을 다해 짐바리의 뒤를 밀고 있다. 사람 좋은 짐바리꾼이 이십리나 태워줬던 것이다. 고갯길에서 내려 짐바리꾼을 돕는 중이다.
짐바리꾼
이라, 이놈의 망아지야.(채찍을 휘두른다)
채찍질을 한다. 말은 움쭉 고개를 젖혔다가 또 꺼떡꺼떡하면서 걷곤 한다. 말 엉덩이에서 땀방울이 줄을 긋고 흐른다. 섣달 초순 어스름 쯤이다. 늦기 전에 고개를 넘어 대파리등까지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쁘다.
짐바리꾼
이라, 이 빌어묵을 놈의 망아지야.(다시 채찍)
남자 아이
누나, 이 고개를 올라가면 또 어데로 가야 하나?
여자 아이
글씨 몰라. 이따 가서 이 구르마꾼한테 물어봐야지.
남자 아이
그럼 집에까지 갈라면 아직도 며칠이나 더 가야 하나?
여자 아이
여가 구례 땅이니까 아직도 한 이틀 가야 다 가나봐.
남자 아이
누나, 이제 나는 발이 아파서 더 못 가겄다.
여자 아이
그래도 자고 나면 또 나을 거야.(안심시키는 말투)
남자 아이
그럼 또 오늘 저녁에 잠은?
여자 아이
글씨 더 가봐야 안다니깐 자꾸 묻기만 해 그래. (사이) 아유, 속상해.(짜증으로 변한다)
남자 아이
잘 데가 없으니까 묻는 거 아냐. 그리고 누나. (사이) 혹, 아부지랑 엄마랑도 칼 맞어 죽고 집도 불타버리고 했으면 누구하고 사나?
여자 아이
글씨 가봐야 안다니깐, 또 묻고 있어 그래.
어느덧 짐바리가 영마루에 다다랐다. 짐바리꾼이 후유우 하고 숨을 내쉬면서 땀을 닦는다. 여자 아이는 수레 위에서 네모진 보자기를 하나 내린다. 보자기에는 족보가 한 질 들어 있다. 집을 떠날때 그의 어머니가 외가로 피난을 보내면서 족보를 싸준 것이다. 난리통에 무슨 일이 생겨도 족보로 일가를 찾으라는 의미였다.
여자 아이
어저씨, 여그서 자흥(장흥)으로 갈라면 어느 길로 가요?
짐바리꾼
길을 모르나… 그럼 거… 가만있자. (사이) 자흥 방면으로 빠질라면. (한참을 먼 산은 돌아본다.) 저쪽 길이 순천, 이쪽은 곡성이고 하니까.
(사이)
자흥으로 갈라면, 봐라. 이 산을 타고 옆댕이로만 옆댕이로만 한하고 가다가 저기 저, 우뚝한 바위산이 하나 안 있냐. (사이) 그 산허리를 돌아서 저어쪽 신작로로 나서라. 그럼 덜 고생하고 빨리 갈 것이다.
여자 아이
아저씨의 가는 길로 가면 안 돼요?
짐바리꾼
이 길은 딴 길이다. 안 된다. 그냥 이 산길을 타고 한사코 저기 보이는 신작로로 빠져라.
짐바리꾼은 다시 말을 몰기 시작한다. 잠바리꾼은 무대에서 퇴장한다.
두 아이
그럼 아저씨, 안녕히 가세요.
짐바리꾼(소리만)
오냐, 잘들 가거라.
영마루의 두 남매는 눈물이 글썽한다. 해는 저물고 어데로 가나 하는 걱정이다.
무대: 어두워진다. 음악: 쇼팽의 녹턴이 흐른다.
& 어떤 초가집 / 앞
여자 아이(문을 두들기며)
쥔 양반.
(사이)
쥔 양반, 예.
(사이)
빗장 뽑는 소리가 삐드득거린다.(음향)
노인
누구요?(쉰 목소리로)
늙수그레한 노인이 나온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하면 두리번거린다.
여자 아이
해가 저물어서 근디, (사이) 미안하지만 하룻밤만 자고 갑시다.
노인
우리 집은 잘 디가 없다.(냉정하게)
대문을 닫아 버린다.(음향)
여자 아이
예말이요예, 할아부지. (사이) 해는 저물고 잘 디가 없어서 근디 쪼끄만 잡시다거.
노인(소리만)
안 된다. 우리 집은 잘 디가 없다.(냉정하게)
여자 아이
아무 디라도 찡겨서 하룻밤만 잡시다.(애원조로)
노인
…
아이들
예, 할아부지?
두 남매는 설움이 북받쳤다. 잠시 후 다시 대문을 두들겼다.
여자 아이
예말이요예, 쥔 양반.
노인
…
여자 아이
하룻저녁만 자고 갑시다. 피란 갔다 오다가, 길이 저물어서 그요.
노인
…
여자 아이
예, 쥔 양반.
남자 아이가 대문을 콩콩 두들긴다.
노인(소리만)
잘 디가 없다는디 왜 문짝을 두들겨쌌냐.(화를 낸다)
여자 아이
그럼 할아부지, 밥이라도 한술 주시요.
노인(소리만)
밥도 없다.(찬바람이 날 정도로 냉정하게)
노인은 경찰이 진주하던 날 낯모른 사람을 숨겼다가 아들을 죽인 일이 있는 것이다. 경찰이 비록 진주는 하였지만 아직도 세상이 바로 잡히려면 멀었다는 생각이다.
여자 아이
예, 할아부지…(말끝이 흐려진다)
노인
…
두 남매는 밤 장막이 겹겹이 둘러쌓이는 어둠 속에서 쓸쓸히 서 있다. 둘러보니 외양간이 있다. 외양간으로 가서 잠자리를 살핀다. 거적때기와 마름 사이로 자리를 본다. 여자 아이는 족보를 머리맡에 소중히 두고 동생의 찬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어준다.
여자 아이
길주야, 자자. 그리고 낼도 어서어서 가야 집에 가닿제.(어른스럽게 말한다)
남자 아이
누나, 나는 배가 고파서 못 자겄다.
누나는 동생을 끌어 안고 잠을 청하려다가 슬며시 자기 품속을 더듬는다. 그리고 무언가를 꺼낸다. 아침에 얻은 누룽지다. 먹지 않고 남겨둔 것이다.
여자 아이
아 해.(입을 벌리면서 아~ 시늉을 한다)
남자 아이
아침에 얻은 걸 여태까지 애낀 거야.
(사이)
이 누룽지는 어느 집에서 얻었나? 누나!
여자 아이
네가 웨 (사이) 그 개 짖는 집에서 밥을 얻어묵고 있었잖아. 그때 난 또 두 집 세 집을 더 돌아 댕긴 거야.
남자 아이
그럼 누나도 좀 묵어라.
여자 아이
난 괜찮아.
남자 아이
묵어 좀~
여자 아이
괜찬해, 네나 묵고 낼은 힘을 좀 내.(어른스럽게)
남자 아이
그래도 묵어 좀.
여자 아이
아, 싫다니간… 난 안 묵어도 돼.
어느덧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소리가 들리면서 두 남매는 꼭 껴안고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와들와들 떨면서 앙상한 머리로 외양간을 나온다. 노인이 외양간으로 쫒아온다.
노인(문간을 나서면서)
저 빌어묵을 놈의 새끼들이…
노인(도망치는 남매를 향해)
아 이 새끼들아, 누굴 또 죽일라고 그런 디서 처박혀 잤냐.
금방 붙잡아서 칠 기세다. 여자 아이는 냉큼 앞장 서서 어제 짐바리꾼이 알려준 길로 접어들었으나 남자 아이는 누나를 따라가지 않고 연해 노인을 흘겨본다.
남자 아이(작은 소리로)
이 독한 늙은탱이. 이 원숭이 같은 늙은탱이.
두 어린 남매는 버림받는 고아는 안 될 것이다. 그들 옆구리에 족보가 있는 한. 족보를 싸들고 여자 아이는 앞서고 남자 아이는 뒤 따른다. 음악: 녹턴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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