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파(難破)』 현대어 각색
김우진 원작 / 현대어 각색
서곡 – Caro Nome(카로 노메)
(배경: “카로 노메” 아리아의 일부를 재창조한 시적 독백)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내 가슴 깊이 파고든 그 이름,
그리워라, 그리워라.
내 가슴에 불을 지르고
영원히 꺼지지 않을
사랑의 불꽃을 심어준 그 이름!
잠시도 잊히지 않아
내 마음은 그리움으로 불타네.
아, 내가 죽는 순간에도
그 이름을 부르리라.
살아 있는 동안,
언제까지나
그 이름만 부르리라.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그 이름을 부르리라!
Caro Nome! Caro Nome!
그리운 이름이여!
◆ 제1막
조선식 큰집 앞마당, 흐린 달밤
(어머니 등장 —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유령)
어머니
아들아… 내가 낳고서 가장 미워했던 아들아.
시인
(알몸, 창백한 몸으로 다가오며)
미워한다면서 왜 자꾸 불러내세요?
어머니
하늘을 좀 보렴.
더러운 것도 씻기지만, 가엾은 것도 씻기지 않니?
불평만 말고, 이리 와서 내 뺨에 입 좀 맞춰라.
시인
(입을 맞추며)
이렇게 하니 왜 마음이 더 두근거립니까.
어머니
두근거린다니? 또 나를 욕할 셈이구나.
시인
(버럭하며)
그래요, 난 어머니를 욕합니다.
저주합니다.
아니, 대체 왜 나를 이런 인간으로 만들어 놓으셨어요?
처음부터 낳지 말든지,
낳았으면 예쁘고 흠 없이 잘 만들든지!
이렇게 해놓고도 어머니라 할 수 있어요?
어머니
(비웃으며)
아직도 내 말을 이해 못하는구나.
내가 너를 낳기 전에,
너의 형 둘을 낳다가 잃었단다.
그 아이들은 너보다 훨씬 더 예뻤고, 똑똑했고, 귀여웠지.
그래서 네가 태어났을 때
산욕(産褥) 위에서 너를 보자마자
너무 역겨워 그냥 버려두었지.
죽지도 살지도 않게, 그냥 내버려두었단다.
시인
(비웃으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개나 물어가라”고 그랬겠죠?
못나고, 약하고, 밉고, 어리석은 나를!
왜 그때 정말로 개한테 던져버리지 않으셨어요?
어머니
(만지며)
이렇게 마음 비뚤어진 말을 하니까
내 마음이 오히려 흡족하구나.
너를 이렇게 만들려고 네 형들을 죽인 것이야.
모든 것은 약속이 있다.
약속 아래서만 고통이 있고,
고통이 있어야 인생이지.
그 증거가 네 동복동생이잖아.
시인
(속 깊은 탄식으로)
저주받을 어머니…
어머니
네 형들이 잘못해서 죽은 게 아니다.
네 아버지 욕심을 채우려다 보니 그렇게 된 거다.
하나는 여섯 달 만에 떨어져 죽었고,
하나는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통쾌하지 않니?
시인
왜 나는 안 죽였어요?
어머니
밤마다 되풀이하는 말을 또 하려느냐?
너를 만들기 위해 네 형을 둘이나 죽였어도
너는 형도 아니고, 동생도 아니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니다.
그걸 아직도 모르겠니?
시인
(떨며)
오오…
🔸 어머니가 품에 오라 하자 시인은 반발한다
시인
또 나를 붙들어 죽이려고 옷을 벗겨두고
아무렇지 않게 품에 넣을 생각이죠?
무슨 심보예요?
어머니
사람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을 찾는 거다.
신을 찾는 것도 다 그 때문이지.
네가 천상낙원을 동경하는 것도
가보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곳에 하루만 있어 봐라.
지겨워서 못 견딜 것이다.
어둠도 없고, 악도 없고, 추함도 없고,
모든 것이 그저 심심하고 밍밍하여
살아 있는 느낌이 없단다.
시인
흥, 쇼펜하우어와 잘도 놀아나는군요.
어머니
쇼펜하우어뿐이겠니?
어머니
그래, 너를 만들려고 한 짓이래도 그렇다.
네 형 둘을 죽여서라도 너를 만들려 했다는 말이다.
너는 네 형도 아니고, 네 동생도 아니고,
너의 아버지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그걸 아직도 모르겠니?
시인
(벌벌 떨며)
오오…
어머니
겁나거든 내 품으로 들어오렴.
시인
(벌떡 일어서며)
날 어르고 죽이려는 거죠?
옷 벗겨 놓고, 또 나를 안아 죽이려는 거죠?
무슨 속셈입니까?
어머니
사람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함을 찾고,
신을 찾고, 하느님을 찾는 거다.
완전하다면 왜 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겠니?
너 쇼펜하우어에게 배운 게 있지?
천국은 우주 만물 중 가장 심심하고 맛도 없는 곳이라고 했지.
네가 아직 그곳에 안 가봤으니 동경하는 거다.
그곳에 하루라도 있어봐라.
곧 구역질이 날 거다.
뭐든 저절로 입 안으로 들어오고,
향기만 가득하고, 악도 선도 없고,
추함도 아름다움도 없고,
모든 게 텁텁하고 무미건조한 세계다.
의미도 자극도 없는 삶이다.
시인
흥, 쇼펜하우어랑 잘 맞나 보네요.
어머니
그뿐이겠느냐.
나는 인생의 실체,
끊임없는 생명력과 진화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내 연인으로 삼을 것이다.
얼마 전에 쇼펜하우어 같은 늙은이가 찾아와서 그러더라.
“결혼합시다!”
참 우스웠지.
시인
그럼 나도 두 형처럼 더 잘 만들려고
끌어안으려 했겠죠?
어머니
얘야, 그런 말 하지 마라.
나도 사람이 아니겠니?
나라고 왜 너희들의 원망을 모르겠니?
내 속에서 올라오는 충동을 막을 수 없을 뿐이다.
쇼펜하우어 같은 늙은이와 결혼만 하면
천지가 뒤집힐 것이다.
그러면 나도 죽어 쓸모없어지고
너 같은 존재도 이 세상에서 사라질 테지.
시인
(울며)
왜 이 모양입니까…
가슴이 아파요!
어머니
우는 것만 해도 안 우는 것보다는 낫지.
가서 현실을 보고 와라.
그리고 너처럼 불완전한 인간들과 싸워보렴.
시인
전 싫어요.
무서워요.
금방이라도 무서워서 못 견딜 것 같아요.
왜 싸우라면서 저를 이렇게 불완전하게 만들어 놓으셨어요?
어머니
에잇, 알아듣지 못하는 녀석!
불완전하니까 싸우라고 하는 거다!
그것도 모르니?
미련한 것!
시인
(달려가 때리려 한다. 어머니는 순간 사라진다. 시인은 주저앉아 한숨 쉰다.)
어머니
(다시 나타나며)
또 그 버릇이구나.
억만 번을 그래도 소용없다!
운명을 어쩌겠니?
나를 좀 봐라.
나는 내 역할을 충실히 다하고 있는데
너는 왜 이렇게 모자란 짓을 하니?
시인
(지쳐서)
제 두 형님을 데려와 주세요.
어머니
안 된다.
마지막 형이 죽고 여섯 달 만에 네가 태어났다.
그때 내 몸은 두 번이나 유산을 겪은 뒤였지만
어찌 너를 살살 품어주었겠니?
하지만 너를 이 지독한 현실로 밀어내고 싶은 충동은
이미 그때부터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네 아버지가 ‘신주(神主)’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다른 여자와 가까이 하지 않았던 덕분이지.
그래서 네 아버지의 뛰어난 정신력과 통찰을
네게 물려줄 수 있었던 거다.
고맙지 않니?
시인
그러니까 왜 그 잘난 능력을 물려주고도
저를 이렇게 결함 덩어리로 만들어 놓으셨냐고요.
어머니
그게 바로 운명이다.
나는 단지 맡은 역할을 했을 뿐이다.
네 형들을 찾아오라는 뜻은 나도 모르지만
내 힘으로 어찌하겠니?
내가 인과율을 어떻게 움직일 수 있겠니?
시인
그러니까 왜 굳이 내게 이런 인과율의 사슬을 걸어 놓으셨어요?
어머니
그러니까 네가 ‘너’가 된 거다.
세상에는 장엄한 것만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이들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비열한 것까지 갈망한단다.
시인
내 눈앞에 그것이 있는 것 같지만
나는 그것을 잡을 수가 없어요.
어머니
세상은 용기를 찬양하지만,
정작 용기를 어디에 써야 하는지는 모른다.
시인
저도 용기를 믿습니다.
하지만 제 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아요.
어머니
세상은 행복을 구하려고 이것저것 희생한다.
시인
저도 행복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행복을 사랑하면서도
행복이 두렵습니다.
어머니
세상에는 비열함을 욕하면서
정작 그 비열함을 실행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시인
전 비열함을 실행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비열함을 미워하지도 못해요.
어머니
세상은 희생을 숭배하면서
막상 희생은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시인
전 희생을 미워하진 않지만
희생을 매일 하고도 앉았습니다.
어머니
세상 사람은 쾌락을 좋아하면서
정작 쾌락은 발로 차버린다.
시인
저는 쾌락이란 걸 모르지만
그렇다고 쾌락을 마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
세상 사람들은 현실을 미워하면서도
현실을 달게 받아먹고 산다.
시인
저도 현실이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해요.
하지만 맛보는 법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세상은 명예를 사랑하면서
명예에 똥칠을 한다.
시인
저도 명예가 귀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걸 얻는 법은 모릅니다.
어머니
세상은 모두 천사와 성현으로만 보이지만
사실 악한 것과는 형제나 다름없지.
시인
저는 악을 마주 보는 용기도 없으면서
어찌 그것을 해보고 싶어 안달이 나지요.
아버지 등장
아버지
왜 서로 욕만 하며 앉아 있느냐!
너냐? 내 아들아.
내 얼굴 좀 봐라.
주름투성인 이 얼굴!
온갖 고난과 현실의 길을 살아온 이 얼굴을
똑바로 보아라.
그러면 저년(어머니)과 함께 나를 욕하진 않겠지.
시인
(눈물겹게)
저는 인과율에 묶인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동정심으로 저를 만지면
저는 불행한 얼굴을 보여드릴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차라리 저를 때려 주십시오.
죽도록 때려 주세요.
어머니
얘야, 네가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곤장 맞고
실신한 일을 잊었느냐?
아버지
그렇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혈기왕성했을 때
네가 안 맞은 날이 하루라도 있었느냐?
네 건망증은 정말 대단하다.
시인
저는 그 건망증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매는 잊어도 눈물은 잊지 못합니다.
저를 때려 달라는 말은,
아버지께서 늘 자랑하던
“양반 가문”, “신라 성족의 후예”라는 그 오만을
제게서 걷어내 달라는 뜻입니다.
아버지
(손을 올려 때리며)
불효자식!
모든 것은 효에서 시작된다는 걸 모르느냐!
서양놈도 일본놈도 몰라도
우리 조선 사람에게 ‘효’는
충신도,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도
모두 효에서 나오느니라!
시인
(분노하여)
온 우주가 아버지 명령으로 도는 줄 아십니까?
늙은 허수아비 같은 분이!
아버지
이놈! 또 맞아 보겠다는 거냐?
아직 기운은 남았다! (달려든다)
시인
(칼을 뽑아들며 맞서다가, 결국 칼을 탁 놓친다)
아…!
어머니
(빙긋 웃으며 둘을 바라보다가)
그래, 이게 바로 내 역할이다.
이걸 보기 위해, 이걸 만들기 위해!
잘들 싸운다. 잘도 싸우는구나.
아버지
너도 내 매 좀 맞아라!
(‘악귀’가 나타난다.
아버지가 시인의 칼을 집어 들어 악귀에게 달려든다)
이놈! 독사 같은 놈! 악마 같은 놈!
악귀
네가 감히 나한테 ‘씨발’ 소리를 해?
너는 서자(庶子)가 아니냐!
이놈! 네 어미의 항문에서 나온 것이 너인데
종손이 없어질까 봐 두렵더냐!
(말을 마치자마자 첫째 계모의 머리를 칼로 찍는다)
첫째 계모
(비명을 지르며 피 흘리고 쓰러지며)
이 악랄한 귀신 같으니라고!
아버지
(악귀에게 달려들며)
이놈! 악귀!
내 칼 받아라!
죽은 백골까지 파먹는 놈!
악귀
(힘으로 아버지를 집어던지며)
이 간사한 놈!
(이때 ‘신주’ 등장)
아버지
(위태롭게 일어나며)
악독하기론 네 놈에게 질 줄 아냐!
이놈!
(악귀는 달아난다)
신주(할머니의 영)
오,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네가 홍콩에 있을 때
널 보지도 못하고 죽은 한이
얼마나 큰데…
왜 모두 잊어버리겠니?
우리 모자가 집 개만도 못한 대접을 받은 것,
그걸 어떻게 잊겠느냐!
내가 남의 집 첩으로 들어간 탓이지만…
아버지
(달려가 엎드리며 울고)
어머니!
이 불효자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라가 망할 줄 알고,
모든 것이 허사(虛事)가 된 줄 알던 그 시절에
어머니를 찾으러 다녔습니다.
불효를 속죄하려고 돈을 모으고,
아내를 여섯이나 얻고,
어머니를 수천 리 타향까지 모셔가 제사 지내고
산소 아래서 종신토록 모시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성품이 청렴한 내가
왜 아직도 저 ‘악귀’에게 시달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시인의 어머니)
(나타나며)
여보, 당신 어머니가 당신을 낳을 때
이미 여기(시인)를 약속하고 나온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있었소?
아버지
그 말은…
내가 어머니를 수천 리 타향으로 모셔간 그 해,
바로 그 해 9월에 이 아이가 태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뜻입니까?
어머니
맞소.
(시인을 가리키며)
내 아들아, 잘 들어라.
아버지
그래, 아들아…
내 마음을 알아다오.
나는 나라에도 충성하지 못한 죄인이지만,
어머니에게 철천지한을 남긴 불효자이기도 하다.
사회에 공헌할 인물은
다른 젊은이들 중에서도 있겠지만,
너는 내 아들이다.
원한을 지고 죽은 네 할머니의 손자가 아니냐!
신주(할머니)
아들아, 손자야…
너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아들 노릇, 손자 노릇이다.
어머니
아니오.
문제의 중심은 여기 시인이다.
그 애 아버지는 정력도, 재능도, 통찰력도 있었고,
험한 세상을 뚫고 온 성공자에 불과하지만
이 아이야말로 모든 약속 아래 태어난 존재다.
이 싸움의 중심에 선 장본인이다.
시인
(어머니에게 달려들며)
흉악한 어머니!
정말로 “때의 관절이 모두 어긋난 사람”이 되었다면
저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어머니
그러니까 말이지.
그러니까 살아가는 거다.
네 아버지는 그렇게 살고,
너는 이렇게 사는 것이다.
그게 운명이지.
시인
전… 이 싸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아버지
(깜짝 놀라며)
안 된다! 안 돼!
내 이 늙은 얼굴을 좀 봐라!
주름 패이고,
온갖 고난을 겪어
껍질처럼 된 이 얼굴을!
이 현실의 가시밭길을 걸어온 나를 보란 말이다!
시인
(아버지를 피하며, 어머니에게 달려들며)
전 싫어요!
그 얼굴은 동복동생에게나 보여주세요.
아버지
(하는 수 없이 한숨)
아… 불쌍한 놈.
허긴 그 동생은 너보다는 낫지.
꾀도 있고, 잔머리도 있고, 눈치도 있고,
남의 비위를 잘 맞추지.
시인
아들 노릇에도 차별이 있습니까?
어머니
동복동생이 훨씬 낫지.
네 동생이 너보다 낫다.
신주(할머니)
(고개를 저으며)
안 된다. 안 돼.
시인은, 시인이 되기 전에
내 손자이며,
내 아들의 자식 노릇을 해야 한다.
시인
(울음을 터뜨리며)
오오오…
어머니
(좋아하며 깡충깡충 뛰다가)
옳지, 옳아!
내가 간섭 하나 안 해도
저 늙은 유령이 앉아서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구나!
시인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 한다.
이때 뒤에서 Verdi의 Caro Nome이 아주 조용하게 들린다.)
(시인은 놀라 굳어 서 있다가 무릎을 꿇는다)
아… 어머니!
저 소리가 뭐예요?
저 소리가 뭐예요!
어머니
(아버지와 신주가 질색하는 가운데)
(깔깔 웃으며)
드디어 됐구나! 됐어!
이제야 사람이 되었구나, 시인아.
나가서 그 이름을 부를 사람을 찾아라.
시인
(가슴이 터질 듯)
저에게 힘만 주십시오!
힘만 주신다면…
모든 것을 정복하겠습니다!
어머니
(조롱하듯)
그래서?
모든 게 평범하게 끝날 거라고 생각하니?
아니.
그 대신 나가 봐라.
어서.
어서 나가 봐라.
제2막 제1장 — 울창한 숲, 봄, 흐린 햇빛
백의녀
(나오며)
봄… 꾀꼬리… 춤…
시인
(뒤따라 나오며 그녀의 손을 잡으려 한다)
그러니까, 이 손을 잡게 해 주세요.
백의녀
(손을 빼며 피한다)
그만두세요.
이 손에서는 검은 피가 흐를 거예요.
시인
그 피를 제가 마시면 됩니다.
당신 손만 잡게 해 주세요. (붙잡으려 다가간다)
백의녀
(뒤로 물러나며)
안 돼요.
(잠시 돌아보며 미소 짓는다)
날 따라오세요.
(둘이 사라진다)
어머니
(옥빛 옷을 입고 나타나며)
아… 내 아들.
저렇게 굴다가는 병든 자처럼 위태롭구나.
병든 사람에게는 죽음이 최선의 안전이지.
병은 바이러스와도 같아!
신주(할머니)
(의사를 데리고 들어오며)
어서 와서 좀 봐주시오.
우리 손자가 폐병 걸린 여자에게서
전염이라도 된 게 아닌지 걱정이오.
의사
(어머니를 보며)
이 분이 환자입니까?
어머니
(뒷걸음질 치며)
천만에!
병은 볼 줄 알면서
사람은 못 알아본단 말요?
신주
병자를 보는 건 당신 직업 아니오.
의사란 건 청진기 대고 상태 확인하는 거지.
(시인이 거의 죽어가는 백의녀를 등에 업고 등장한다)
신주
(급히 다가가며)
내 손자가 왔다!
하느님, 제발 우리 손자를 살려 주소서!
시인
(백의녀의 머리를 어깨에 기댄 채 울며)
이 흰 옷… 버리세요.
꾀꼬리가 무슨 소용입니까.
붉은 피를 빨게 해 주세요.
타버린 내 가슴,
그 선지 같은 피 속에
날 던져 주세요.
(어머니를 손가락질하며)
저 여자(어머니)가 미워요!
저 년 얼굴 더는 안 보게 해 주세요.
영원히!
백의녀
(숨이 약해지며)
에이… 못된 사람…
나는 3년 전에 죽은 내 동생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기쁘지만,
당신은…
당신 어머니가 계시지 않나요…
(백의녀 절명)
시인
너까지…!
아아아!
(신주가 달려와 시인의 가슴을 치며 정신을 차리게 한다.
의사가 청진기를 대고 확인한 뒤 안심하며 미소 짓는다.)
어머니
(벌떡 일어나며 웃는다)
그래, 그러니까 말이지!
내 아들!
내 아들이 살아났다!
저 여자까지 네 운명에 걸려 있었던 거다!
시인
(칼을 꺼내 어머니에게 달려들지만,
기운이 다해 쓰러진다)
아…!
의사
(신주에게 절하며)
이제 나가시죠.
신주
(기쁜 얼굴로)
아, 조상님들 영이시여!
감사합니다.
(둘이 퇴장)
시인
어머니…
저는…
당신 품속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제발 저를 버리고
영원한 침묵 속으로 사라지게 해 주세요…
어머니
네가 나를 찌를 힘도 없이 벌써 기운이 다했구나?
내가 어떻게 해주겠니?
너 아버지에게 가서 물어보렴.
(시인 움직이지 못한다.
어머니는 시인을 보다가 나뭇가지에 밧줄을 걸어
시인이 목을 매도록 유도한다.)
어머니
네 손으로 결산을 낼 수 있다면…
해보렴.
아버지 등장
아버지
(나오며)
이 늙은 얼굴을 보아라.
주름 패이고,
온갖 고생을 겪은 이 얼굴을!
시인
전 안 속습니다!
안 속아요!
(목을 매려 한다)
아버지
(달려와 붙들며)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너는 눈이 있어도 보는 법을 모르구나!
시인
나이를 먹어도
눈은 점점 어두워집니다.
저를 좀 보게 해 주세요.
(어머니에게 외친다)
튼튼하게, 씩씩하게,
어머니를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울음)
아버지
그러니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아라.
시인
저런 ‘신라 성족의 후예’가 되려면
적어도 칠십 년, 팔십 년은 더 일찍 태어났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선 길과
제가 선 길 사이에는
태평양보다 넓은 간극이 있어요.
어떻게 건너뛰란 말입니까?
아…
그러나 어머니,
저는 뛰다가 죽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뛰지도 못합니다.
애초에 눈앞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요…
어머니
(다가와 손을 얹으며)
내 아들아,
내가 낳고도 가장 미워했던 내 아들아…
시인
(달려들어 목메인 듯 매달린다)
어머니…!
어머니
죽은 네 형들이
널 보며 얼마나 비웃겠니?
그렇지만 너는 너다.
언제까지나 너다.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
죽든지 살든지
네 눈을 떠야 한다.
시인
또 그 말!
(발길로 찰려고 한다)
어머니
(살짝 피하며)
또 이 버릇이구나!
그렇게 저주하면
내가 달아날 줄 아느냐?
시인
(널브러지며 절규)
지옥! 살생! 파멸!
저주다!
어머니
(사라지며 웃는다)
오호호호호…
아버지
(금잔을 내밀며)
자, 이 술을 마셔라.
마음을 가라앉혀라.
밥은 아니지만
너에게 힘을 줄 것이다.
네 아버지가 아니면
누가 이런 걸 너에게 주겠느냐?
시인
(받아 마시며)
아… 아버지…
(굶주린 짐승처럼 마신다)
어머니
(가까이 다가와선 낙담한 듯)
아… 저건!
뭐, 어쩔 수 없지.
그것도 두고 보자.
아들아,
내가 낳았고
내가 가장 미워하는 내 아들아!
(무대가 어두워지며 Caro Nome가 moderato로 들린다)
어머니
나가거라.
저 소리를 따라가거라.
네 눈을 뜨기 위해.
네 눈을 뜨기 위해!
(아버지는 그 음악에 질색하며 움찔한다)
시인
(벌벌 떨며)
오… 어머니…
제2장 — 카페의 작은 방
(조명이 밝았다 어두워지며 흔들리는 분위기)
첫째 친구
사람이란 해면 같은 거야.
정한 물도 빨아들이고,
더러운 개천물도 빨아들이지 않냐 말야.
둘째 친구
(술을 들이키며)
하하하하!
그러니까 그렇지.
얌전한 그 친구가 그럴 줄 누가 알았겠어.
우리가 하느님도 아닌데 말이야!
셋째 친구
이러다간 정말로 갑자기 죽을지 몰라.
이대로 우리가 못 본 척해서 되나?
동복동생
(비웃으며)
그 친구, 네 죽마고우 아니었어?
셋째 친구
맞지, 그렇지! 죽마고우지.
둘째 친구
됐고 술이나 마시자고.
남의 연애사에 우리가 뭘 상관해.
첫째 친구
(동복동생에게)
이봐, 자네가 먼저 나서야 하는 거 아냐?
동복동생
(교활하게 웃으며)
아니, 자네가 먼저 나서게.
괜히 남한테 떠넘기지 말고.
둘째 친구
그만들 하고, 마시자.
비비(Vivie)
(검소한 1890년대 영국 여성복 차림으로 등장)
여러 신사분들,
시인이 어디 있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
첫째 친구
뭐야? 당신은 어디서 왔소?
둘째 친구
(비비를 훑어보며)
이거 웃기는데?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야?
비비
(동복동생에게)
시인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동복동생
(웃으며)
좋다만, 당신은 여기 와서
무엇을 하려는 건가?
시인을 찾는다고?
그 사람이 내 형이긴 하지만
당신 청을 들어줄 사람은 누구요?
비비
이 친구들은 그냥
자기들 술 마시려고 하는 소리니까
신경 쓸 필요 없소.
당신의 도움이 있어야
내가 시인을 찾을 수 있어요.
나랑 약속하시겠소?
동복동생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비비
(동복동생 손을 꽉 잡아 흔들며)
좋아요! Thank you!
(안쪽 방 문을 두드리고 연다.
안쪽 침대에 시인이 누워 있고,
그 옆에 붉은 드레스를 걸친 비의녀가 키스하고 있다.
간호사복은 옆에 벗어두었다.
조명은 창백한 달빛 분위기.)
비비
(동복동생에게)
자, 들어가요.
동복동생
(들어가 비의녀를 떼어내며)
이 거머리 같은 년!
그만 피 빨고
그 흰 옷이나 다시 입어라!
비의녀
(억지로 옷을 입으며)
이게… 정말 ‘정직’이라고 생각해요?
시인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저으며)
누구야!
누가 뺏는 거야!
동복동생
(시인을 달래며)
저예요. 나야.
시인
왜 왔니?
동복동생
형을 구하러 왔죠.
이 년이—
비의녀
(동복동생의 소매를 잡아채며)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당신이나 날 따라오고,
시인을 구할 사람은 따로 있어요.
동복동생
나는 약한 사람이야… 오오…
(비의녀에게 달라붙으며 쓰러진다)
시인
이게 무슨 짓이야!
(일어나려 한다)
개들! 돼지들!!!
셋째 친구
(안으로 뛰어 들어가 동복동생에게)
이봐, 이제 다 됐잖아.
자, 나가자고!
(비의녀를 시인에게서 떼어내고,
동복동생의 팔을 끌어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시인
(힘겹게 일어나 다시 비의녀가 키스하려 하자
그녀를 강하게 밀쳐낸다.
비의녀는 얼굴을 감싸고 밖으로 달아난다)
시인
어머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어머니 등장
어머니
그러니까 너 아버지가 주던 금잔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지.
시인
(어머니 손을 붙잡고)
하지만…
그 술은요… 그게 제일이잖아요.
그 술 말고
아버지가 제게 줄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렇게 내밀면
제가 어떻게 안 받아먹겠어요?
어머니
그것도 아예 무관한 건 아니다.
밥만큼은 못 해도
힘은 붙여주지.
오호호호호.
시인
(벌떡 일어나 칼을 들어)
이년!!
비비 등장
비비
(달려 들어와 시인을 붙잡으며)
왜 이러는 거예요!
(차분히 달래듯)
내 말 들어요.
착한 사람.
세상이란
널판자 위를 뛰어다니는 것 같아요.
오르거나, 내리거나.
죽거나, 살거나.
살기로 했으면
한번 튼튼하게, 씩씩하게,
햇빛처럼 밝게 살아봐요.
어디 한번!
(비비가 다가오자 어머니는 뒷걸음쳐 물러나며
점점 형체가 사라진다.
멀어지는 웃음소리만 남는다.)
시인
당신은… 어디서 왔소?
비비
나?
당신 어머니 속에서 왔소.
또는 당신 속에서 나왔소.
(시인이 부정하려 하자)
그게 싫으면,
어딘가 늙은 아일랜드인 머릿속에서
나왔다고 해도 되겠죠.
어디서 왔든 그게 뭐 그리 중요하오?
시인
당신하고
저 여자(비의녀)하고
무슨 원수라도 있소?
비비
아니, 그럴 건 없지요.
하지만 그 여자도
내 친한 친구는 됩니다.
옛날엔 원수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친한 사이예요.
시인
그런데 왜
얼음 녹듯 사라지듯
갑자기 도망간 거요?
비비
모르죠.
그 여자가 나보다 나이가 많잖아요.
혹시 또다시
스스로를 해칠까 봐
무서웠던 걸지도 모르죠.
나는 그 여자가 곁에 있어도
형제 같은 친근함은 있어도
신처럼 경외하거나
겁낼 이유는 없어요.
시인
그런데 왜 나한테 왔소?
우리 어머니는
저를 찌르려 하시고,
죽이려 하는데
당신은 왜
내 앞에 나타난 거요?
비비
(방 안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마주 보며)
그 이유를
내가 어떻게 압니까?
난 그냥 젊게 살 뿐이에요.
어디든 가보고 싶으면 가보고,
구경하고 싶으면 구경하고,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말리고 싶으면 말리고…
나는 그냥 돌아다니는 사람이오.
내가 살아가기만 하면
그만 아니겠소?
시인
이기주의군요.
비비
이기주의?
(깔깔 웃음)
그런 말 누가 가르쳐주디?
나는 남을 때릴 줄은 몰라요.
남을 때리지 않으면
사람들은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주더군요.
시인
친절?
온정(溫情)이라는 게
결국 사람을 멸망시키는 거요.
비비
(조금 차분하고 냉정하게)
당신, 시인이라면서요?
그런데 하는 말을 들어보면
시인이 아니라 그냥 명사 하나 알고 있는 사람 같소.
나는 시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당신을 괴롭게 하는 건
운명,
이상,
로맨스,
그리고 ‘의(義)’ 같은 것들이오.
시인
운명을, 이상을, 로맨스를, 의를 잊어버리는 시인은
개천에나 처박혀야죠!
비비
사람이란 원래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존재예요.
중간에 그냥 머물러 있질 못해요.
앞으로 가거나,
뒤로 가거나.
둘 중 하나지.
당신은 지금
금잔 속 술에 취해
정신이 흐려져 있는 거요.
정신을 번쩍 들이게
찬물 한 그릇이라도 마셔봐요.
시인
그럼 내 어머니는 어떻게 하고?
날 낳고서도
제일 미워한다는
그 어머니를요…
비비
어머니는 어머니고,
당신은 당신이죠.
왜 그걸 같이 묶어 생각하오?
문지방에 박힌 못 하나 정도의 관계라고 생각하세요.
크게 의미도, 책임도 없어요.
시인
어떻게요?
비비
이기주의라고 했죠?
온정이라고도 했죠?
이름은 뭐든 상관없어요.
나처럼 생각해요.
어머니는 그냥
어딘가 먼 윈저(Windsor)나
브뤼헤(Bruges)나
브뤼셀(Brussels)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냐고요?
어머니 대신 기숙사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사랑 대신 담배나 위스키로 대체하면
그만 아니겠소?
기숙사 생활이
집보다 특별히 맛있는 것도 아니고
더 쉬운 것도 아니죠.
나도 오너리(O’Norrie) 법률사무소에 취직해도
이렇게 살 거예요.
그냥.
시인
어떻게 산다는 건데요?
비비
외출도
운동이 목적일 때만 하고,
일해서
점수만큼 돈 받아 쓰고,
몸이 피곤하면
소파에 뻗어 누워
담배 피우고
위스키도 조금 마시고,
음악회 대신
재미있는 활동사진(영화)이나 보러 다니고…
그런 식으로 살 거라는 말이오.
시인
당신은 기숙사에서만 자랐으니
그렇게 사는 게 쉽겠지만
난 어떻게 합니까.
비비
그러니까,
나처럼 지금이라도
어머니와 인연을 끊으라는 말이에요.
인연을 끊어버리라고요.
그것만 할 수 있다면
당신에게서 ‘어머니의 영향력’이라는 권리는
더 이상 작용하지 못할 테지요.
당신은 지금
적당히 건너뛰어야 할 시점에 와 있어요.
시인
당신… 제법 똑똑하군요.
비비
똑똑?
난 그런 말 좋아하지 않아요.
난 그저
내 생활에만 집중할 뿐이오.
그것도 미지근하게,
차분하게.
시인
하지만 제게도
그럴 힘이 있을까요?
비비
있죠, 있죠.
손톱 하나 떼어내는 것보다도 쉬워요.
당신, 어머니와의 인연만 끊어버리면 돼요.
시인
해볼게요.
하지만 나는 시인이에요.
보험 통계도 모르고,
양도증서도 쓸 줄 모르고,
과거도 버릴 수 없고,
꿈도 버릴 수 없어요…
비비
그러니까,
손톱 떼듯
그것들도 끊어 버리세요.
당신이 말한 ‘운동의 법칙’과 같죠.
그냥 뛰는 거예요.
멈추지 않고.
시인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비비
자,
날 따라오세요.
(배경에서 Aria “Caro Nome”이 빠른 allegro로 들린다)
시인
(감동에 젖은 듯)
아…
(조명이 어두워지며 장면 종료)
제2막 제3장 — 카페의 작은 방
(조명이 다시 밝아진다.
동복동생이 비의녀와 함께 들어온다.)
비의녀
(성급하게)
빨리 가요!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갑자기 당신을 찾고 있다니까요!
동복동생
나를?
누구야?
비의녀
몰라요!
남자인데…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당신 부르며 달려오던데요.
동복동생
(놀라며)
뭐?
혹시 무슨 일이라도?
비의녀
(손을 잡아 끌며)
가봐요!
빨리!
(동복동생과 비의녀 퇴장)
(잠시 후, 안쪽 문이 열리며
시인과 비비가 손을 맞잡고 밝게 나와 있다.)
비비
자, 이제
점점 밝아지는 것 같죠?
시인
(활기가 돌아)
그렇소!
지금까지 붙잡혀 있던 게
서서히 풀리는 느낌이오!
비비
그러면 됐어요.
이제 한 가지만 기억하면 돼요.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한 존재라는 거.
어머니도
아버지도
형제도
그 누구도 아닌…
시인
(눈을 감고 고개 끄덕이며)
그러니까,
나 자신…
비비
그렇죠!
시인도
연애도
고뇌도
운명도
다 ‘당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문득,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발자국 소리)
시인
저게 무슨 소리요?
비비
몰라도 돼요.
지금 이 순간엔.
저런 소란이 당신 발목을 붙잡게 놔두지 말아요.
당신은 이제
뛰는 사람,
움직이는 사람,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해요.
(동복동생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다. 얼굴이 창백하다.)
동복동생
형!
큰일 났어!
시인
왜 그러냐?
동복동생
아버지가…
아버지가 쓰러졌어!
갑자기 피를 토하시고…
시인
뭐라고?!
동복동생
지금 사람들이 옮기고 있어.
형을 찾으라고 해서…!
빨리 나와 봐!!
시인
(겁에 질리며 비비의 손을 놓는다)
아버지가…?
비비
(조용히 시인의 손을 다시 잡는다)
그런 순간에도
당신 자신을 잊지 말아요.
두려움이 다시
당신을 끌고 갈 수 있어요.
시인
(혼란 속에서 떨리는 목소리)
하지만…
그분은 제 아버지예요…
비비
그럼 가보세요.
다만,
당신 자신을 버리지만은 말아요.
(시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동복동생을 따라 헐레벌떡 나간다.)
(비비는 조용히 웃으며 혼잣말)
비비
그래요…
이제 제대로 시작되는군요.
제2막 제4장 — 바깥길
(시인, 동복동생, 비의녀, 사람들이 아버지를 둘러싸고 있다.
아버지는 들것 위에 누워 힘겹게 숨을 몰아쉰다.)
아버지
(고개를 들어 시인을 찾으며)
내… 아들…
왔느냐…
시인
아버지!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아버지
됐다…
됐다…
내가…
내가 이만하면…
할 만큼…
했다…
동복동생
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아버지
(시인을 바라보며)
아들아…
너는 아직…
멀었다…
멀었어…
네가 가야 할 길은…
길고도 험하다…
그러나…
(숨을 몰아쉬며)
너는… 가야 한다…
네… 길을…
너 자신만의… 길을…
시인
아버지!
저는 아직…
아직 아버지의 뜻도 다 모르겠고…
저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씁쓸한 미소)
그것이…
젊음이다…
모르는 채로…
가라…
알려고 하면…
못 간다…
비의녀
(울먹이며)
선생님… 이제 좀 쉬셔야 해요…
아버지
(숨이 거칠어진다)
나는…
너희들 모두에게…
빚이 있다…
특히…
(시인을 가리킨다)
너에게…
크다…
미워하지 마라…
아들아…
시인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
(아주 작은 목소리)
그러지 마라…
너는…
네가…
되면 된다…
(고개가 툭 떨어진다.
사람들이 웅성댄다.)
동복동생
아버지!!!
(엎어져 통곡한다)
시인
(멍하니 서 있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절규)
아아아아아…!!!
(저 멀리서 비비가 나타나 조용히 시인을 바라본다.)
비비
(속삭이듯)
자…
지금이야말로
당신이 결심해야 할 때예요.
당신은
아버지의 길을 갈 겁니까?
어머니의 길을 갈 겁니까?
아니면—
당신 자신의 길을…?
(시인은 울음 속에서 고개를 들지만, 대답하지 못한다.)
제2막 제5장 — 카페의 작은 방
(시간이 지난 뒤. 시인은 혼자 방 안에 앉아 있다.
등 뒤에는 죽은 아버지의 기척이 어른거리는 듯하다.)
시인
(혼잣말)
아버지…
왜 저를 두고 가셨습니까…
말씀만 해주셨다면
제가 그 길이 어떤 길인지라도
알 수 있었을 텐데…
(고개를 감싸 쥔다)
저는 아직
아버지의 뜻도 모르고
어머니의 뜻도 모르고
저 자신의 뜻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입니까?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비비 등장)
비비
그래요.
그렇게 앉아 있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게 당연하지.
길 위에서만
사람은 비로소 자기 발밑을 보게 돼요.
시인
(떨리는 목소리)
지금…
지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비비
(조용히 다가오며)
우선,
당신을 얽어매던 것들을
하나씩 끊어내는 거예요.
아버지의 죽음은
당신에게서 무거운 사슬 하나를
떼어낸 거라고도 볼 수 있죠.
시인
아버지를… 사슬이라고 한다면…
그건 불효입니다.
비비
(단호하게)
불효?
충(忠)?
효(孝)?
로맨스?
운명?
그 모든 단어들이
지금까지 당신 목을 조른 족쇄였어요.
당신은 그걸
무조건 옳다고 믿어왔을 뿐이고요.
시인
그렇다면…
그렇다면 저는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비비
당신 자신.
당신 눈.
당신 발걸음.
당신 심장.
그것만 믿으면 돼요.
(비의녀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다)
비의녀
저…
여기…
형님을 위해 음식 좀 가져왔어요…
어머니가 못 챙기니까…
제가…
시인
(조용히 그녀를 바라본다)
당신은… 왜…
왜 나한테 이렇게 하는 거요?
비의녀
저도 몰라요…
그냥…
당신이 너무 불쌍해서…
너무 외로워 보여서…
비비
(한 걸음 나서며)
자, 이쯤에서 정리하죠.
당신은
이 사람에게 기대 살 수 없어요.
그렇다고
이 사람을 버리고 갈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둘 다 끊어내세요.
비의녀
(흐느끼며)
왜 그렇게 잔인한 말을 해요…?
비비
잔인?
아니에요.
이건 시작이에요.
시인
(두 사람 사이에서 흔들리며)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조명이 흔들리고, 멀리서 Caro Nome의 피아노 선율이 희미하게 들린다.)
비비
(미소 지으며)
저 소리 들려요?
그게 바로
당신 속에서 깨어나려는
‘새로운 눈’이에요.
(음악 Caro Nome의 잔향이 사라지고, 묵직한 침묵)
시인
저 소리는…
저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겁니까?
비비
당신이 만들어야 할 길로요.
누가 대신 정해주는 길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가야 할 곳.
시인
하지만…
저는 아직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비비
그래서
눈을 뜨라고 하는 거예요.
두렵다고
피하지 말고요.
당신 안에서 튀어나오려는
빛을
당신이 직접 꺼버리지 마세요.
비의녀
(망설이며 조용히)
시인님…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시인
당신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줬소.
피도, 마음도, 눈물도…
하지만 이제…
나를 위해서라도
당신을 의지할 수는 없소.
비의녀
그럼…
전 어떻게 하죠…?
비비
(냉정하지만 차분하게)
각자 살면 되는 거예요.
당신도 당신 삶이 있고,
이 사람도 그의 길이 있어요.
비의녀
그 길에…
제가 없다는 말인가요?
비비
없어요.
왜냐하면
그건 이 사람의 “출발선”이니까.
다른 사람의 손을 잡으면
뛰기 전에 넘어진다.
시인
(고개를 떨구며)
저는…
이제 혼자가 되어야 합니까?
비비
혼자라서 외로운 게 아니에요.
길을 못 보니까 외로운 거죠.
길이 보이면,
심지어 혼자라도 힘이 생겨요.
(잠시 정적)
시인
그렇다면…
저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비비
(문을 가리켜)
나가요.
막아서는 것이 있으면
부딪히고,
없으면 걸어가고.
당신 발로
당신 길을
만들어 가요.
(시인은 문을 바라보지만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비의녀
(한 걸음 다가오며)
가세요…
저도…
당신이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부디…
살아만 있어 주세요…
시인
(두 사람을 바라보다)
살아라…
살아서…
길을 만들어라…
(스스로 되뇌듯)
그래…
가보겠다…
비비
(미소)
좋아요.
그게 첫 걸음이에요.
(문이 열리고 밝은 빛이 들어온다.
시인은 천천히 그 빛 속으로 걸어 나간다.)
비비
(혼잣말처럼)
이제… 시작이야.
(비의녀는 조용히 눈물을 닦는다.)
-----
뒷 부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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