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과 시민
원작: 오유권 소설, 농민과 시민(신동아, 1975. 12)
각색: 공노사노 김병한
등장인물
경천
민태
민태 어머니
이장
안경잡이
양복쟁이
놀러온 강남부인회 회원들
놀러온 젊은 남자와 여자
동네 아이들
동네 청년들: 삼동이, 기수, 인곤이, 병삼이 등
지서 주임과 서원 두명
대화 중에 나오는 인물
주요 등장인물 성격
경천: 두루미마을 토박이 청년. 도시 피서객들의 무모한 행위를 행동으로 거부하면서 갈등이 빚어진다. 친구 민태와 품앗이 물품기를 하면서 가뭄을 이겨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건전한 농촌 청년이다.
민태: 충실하게 농사에 전념하는 청년. 친구 경천이보다 융통성이 많다. 역시 도시민들의 무모한 피서놀이에는 반감이 있지만 내놓고 거부하지는 않는다.
이장: 마을 어른으로 솔선수범하는 모범적인 이장. 그는 경천의 의견을 받아들여 도시민들의 피서가 방만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
때
1960년대 후반 가뭄이 심한 시기로 추정됨
장소
두루미마을, 소남강 백사장, 가운데들
# 제1막
S시에서 서쪽으로 약 십 리쯤 나오면 맑은 소남강이 완만하게 굽이쳐 흐르는 왼편에 백사장이 하얗게 뻗어 있고, 그 백사장을 따라 푸른 노송이 무성한 그늘을 이루고 있다. 이 맑고 얕은 소남강을 가운데 끼고 백사장 맞은편에는 파란 들이 천리같이 틔어 있고 그 동편에 두루미 마을이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 가운데들 / 민태 논 / 두레질
경천과 민태는 품앗이 물대기를 한다. 오늘은 민태 논이다. 가뭄이 심해 논은 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경천과 민태는 두렛줄을 양손에 잡고 물을 품는다. 번갈아 구호를 외치면서 물을 품는다.
경천
어레 구십아홉
민태
어레 오백
경천
담배 한 대 태우세.
민태
천 두레 한하고 품세. 이것 좀 하고 쉬어.
경천과 민태는 두레줄을 놓고 논둑으로 나온다.
경천
세월이 좀먹는가. 천천히 품세. 이 뙤약볕에 천 두레 채우겄는가?
민태
그런 말 마소. 농사가 천하지대본이라네.
경천
농사가 천하지대본이면 농군은 천하지대민이어햐 하는데 농민같이 못 먹고 못 입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두 청년은 ‘파고다’ 담배를 한 개비씩을 태워 문다. 두 사람은 연기를 뿜어 내면서 하늘을 본다. 경천은 소남강 건너편 백사장을 본다. 민태는 소남강 맑고 얕은 물에 노는 물고기를 본다.
경천
치! 시원한 나무 그늘 밑에서 잠이나 한잠 잤으면 좋겄네. 보고도 못 먹는 떡이라더니 우리가 그 쪼 났네.
민태
이 사람아 한가한 소리 마소. 저 나무 그늘 임자는 따로 있네.
경천
나무 그늘 임자가 따로 있다니?
민태
놀러 나오는 피서객들이 임자제 어째.
경천
치!
민태
오늘도 얼마 안 있으면 몇 사람 비치제면.
두 사람 잠시 생각에 잠긴다. 아직 관광지로 개발되지 않아 식당이나 음료수 가게는 없는 곳이다. 놀러오는 사람들이 음식 등을 싸가지고 와서 노는 곳이다.
경천
우리도 언제 그런 세상을 하루나 살어보께.
민태
우리는 백 년을 살아도 그런 세상 하루를 못 살 것이네. 일 년 내 가도 고기 한 근 사먹기가 어려운디 어디가 그러고 살겠는가.
경천
그러고 보면 농민같이 불쌍한 것이 없어. 나라에서 중농정책을 쓴다고 해도 가난한 사람은 평생 가난해이.
민태
그래, 가난은 나라도 못 구제한다고 않던가. 근년에는 해마다 영농자금을 수십억, 수백억씩 뿌려도 한강에 돌 던지기 아니던가.
경천
쉰 김에 막걸리 한잔씩 하세. 이런 된 일을 하면서 맥주, 사이다는 못 먹어도 막걸리까지 굶고 하겄는가.
민태
그러세. 부황 날 꿈꾸지 말고 한 잔씩 하세.
민태가 밥 바구니를 연다. 앙상한 꽁보리밥이 한 그릇 담겨 있고 옆에 김치보시기와 술잔, 수저가 들어 있다. 반찬은 신 열무김치와 된장에 풋고추 뿐이다. 민태는 막걸리 병을 흔들어 사기잔에 채운다. 두 사람은 막걸리를 마신다.
경천
어, 시원하다.
민태
술 맛 좋다.
경천
한 잔 더 따르세.
민태는 경천에게 술을 따른다. 경천도 민태 잔에 술을 따른다. 두 사람은 막걸리를 마시고 다시 일을 하기 위해 일어선다. 경천은 도랑 오른편에 서고 민태는 왼편에 서서 두렛줄을 잡는다.
민태
앞줄을 좀 늦추소.
경천
이만하면 되겄네.
민태
허리를 쭉 펴.
경천
새로 하나.
민태
새로 둘.
경천
새로 셋.
민태
새로 넷.
두레 장단에 맞춰 두레질이 계속된다. 무대가 어두워진다. (사이) 다시 밝아지면서 이십대 남녀가 백사장에 등장한다. 등산화를 신은 남자와 등산모를 쓰고 기타를 맨 여자가 뒤따른다.
민태
비쳤네.
경천
한낮에 무슨 염병할라고 쌍쌍이들 다닐까.
민태
남 안 보는 데서 뭣 할라고 그러는 것 아닌가.
경천
환장할 일이시.
백사장에서 두 남녀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로 들어간다. 두 남녀 무대에서 사라지고 경천과 민태는 두 남녀가 노는 모습을 흘깃흘깃 보면서 두레질을 한다.
경천
야, 눈꼴사납구나!
민태
이 사람아, 빈 두레질 마소. 물이 반도 안 들어가네.
경천
저것 좀 보소.
민태
어서 두레질이나 해. 아무리 봐도 자네 것 안 될 것이께.
경천
당장 쫒아가서…
민태
쫓아가서 어째?
경천
콱 안…
여자가 개구리헤엄에 이어 송장헤엄을 친다. 남자가 송장헤엄을 치는 위로 겹친다. 그 모습을 보는 경천은 화가 꼭지까지 치민다.(무대에서 보이지는 않는다.)
경천
저 보소, 저!
민태
보면 뭣한단가. 물이나 품으라 마시.
경천
미치네 미쳐!
(사이)
보고만 못 있겠네. 술 한잔 더 하세.
민태
이 사람이 공연히 그래쌌네.
경천
저런 것 보고 일손이 잡히겠는가. 한잔 하세.
경천이가 두렛줄을 놓고 논둑으로 간다. 혼자 술을 따라 꿀떡꿀떡 마신다. 경천은 잔에 술을 따라 민태에게 권한다.
경천
자, 한 잔.
민태
이러다 물 못 품게 생겼네.
경천
못 품으면 말제 어째. 다 같은 청춘인디 어떤 놈은 저러고 놀고 우리는 땡볕에서 물만 품고 있겄는가.
민태
자네도 저런 복을 차고 나제 그랬는가.
경천
그런 말 마소. 저런 놈들 쌀밥 먹여주는 것은 다 우리지. 우리 아니여봐, 저것들이 어디서 쌀밥 먹고 저러고 놀겄는가. 콱 그저…
두 남녀는 물장구를 치고 논다. 이쪽에서 일하는 모습에는 전혀 신경을 안쓰고 껴안았다 풀었다 하면서 눈꼴사납게 논다. 경천은 무시당한다는 생각에 더욱 불쾌하다. 가뭄에 뙤약볕에서 물을 품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저 지랄을 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더 치민다.
경천
쫓아가서 저놈의 새끼들 산통을 깨뜨려줄까.
민태
아서, 뭘라고 남 노는디 그래.
경천
자네는 속에 불덩이 안 치미는가.
민태
나래서 그런 생각 없겄는가만 물 한 두레라도 더 품제, 뭘라고 가서 시비해.
경천은 끝내 분이 치미는 듯 술을 거푸 한 사발 더 들이키고 일어선다.
경천(큰소리로)
이놈들아, 저만큼 나가 놀아라.
경천은 손을 갖다 입에 대고 놀러온 남녀 들으라고 고함을 친다.
경천
상놈의 새끼들아. 저리 가서 놀아야. 일하는 사람 옆에서 개지랄 말고.
(사이)
썅! 쫓아가면 패 죽일란께. 어서 나가.
두 남녀가 물에서 나와 노송 아래서 준비해온 먹을거리를 내놓고 먹는다. 경천과 민태도 다시 일을 하기 위해 두레쪽으로 간다.
경천
이러니 누가 일하고 있을락 하겄는가.
민태
천복으로 알고 살제 어째.
두 친구는 두레질을 다시 시작한다.
민태
이 물을 품어서.
경천
어레 하나.
민태
대풍년이 들면은.
경천
어레 둘.
민태
햇곡식 잡아다.
경천
어레 셋.
민태
조상께 봉양하고.
경천
어레 넷.
민태
부모께 효도하여.
경천
어레 다섯.
민태는 두레질을 하면서 마을 쪽을 보곤 한다. 점심을 기다리는 것이다. 무대는 어두워졌다가 밝아진다.
& 같은 장소 / 점심 때 가까이
경천과 민태는 쉬고 있다. 민태는 배가 고팠다.
민태
나는 샛것을 먹었어도 그새 배가 탁 고푸네.
경천
점심 내올라면 아직도 한참 있어야 쓰겄는디.
민태
그래도 나는 배가 고파. 어째 강 건너 가서 사이다나 한 병 얻어먹을까?
경천
저것들한테 가서 사이다를 얻어먹어?...
경천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민태를 향해 눈을 흘긴다.
민태
어쨌단가.
경천
자네는 쓸개가 있는 사람인가 없는 사람인가.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저런 것들 노는 데 가서 얻어먹어?
민태
있는 놈들 것 좀 얻어먹으면 어쨌단가
경천
이 사람아, 호랑이 열두 번 물어가도 제정신 가지고 사소. 저러고 노는 것도 볼 수 없는 디, 거기 가서 얻어 묵어?
민태
허! 혼자 흥분해가지고 야단이시. 저희 돈 가지고 와서 저희들 노는디 뭘 그래 싼가.
경천
우리는 뙤약볕에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디 날마다 저러고들 와서 노니 보겄는가. 저녁에 돌아가면 이장한테 말해서 저놈의 노송나무를 다 베어버리라고 해야겠네. 우리 마을 노송나무는 다 베어버리게 해야겠어.
무대: 어두워진다.
# 제2막
민태와 경천이 논둑에서 쉬고 있다. 강건너 백사장에 대형버스가 들어온다. 하얀 차체에 붉은 선을 띤 관광버스가 굼벵이 기어오듯 노송나무 숲 어귀에 와서 멈춘다.
민태
이제 진짜 비쳤네.
경천
공일도 아닌 디 무슨 버스가 들어오까?
민태
노는 사람들이 공일 따로 있겄는가. 아무 때라도 놀면 놀제.
경천
오늘 또 물 다 품었네.
버스 문이 열리고 울긋불긋 한복을 입은 중년 부인들이 한 떼 쏟아져 내린다. 사오십 명쯤 되어 보이는 부인들이 게(蟹) 망태에서 게 풀려 나오듯이 나온다. 부인들 뒤를 따라 장구를 멘 양복쟁이 네 명이 내린다. S시 강남부인회에서 피서 겸 야유회를 온 것이다. 그들이 노송나무 숲에 자리를 잡는다.
민태
차리고 나온 것이 꽤 있는 것들이시.
경천
저런 여자들은 무슨 복을 타고 나서 한여름에 신선놀음을 할까.
민태
점심 나오면 먹고 품세.
경천
이 가뭄에 한시가 급한디 그래.
민태
저런 것 보고 일손이 잡히겄는가. 천천히 품세.
논둑에 앉아서 담배 한 대씩을 붙이고 나자 민태 어머니가 점심을 가지고 온다. 밥함지를 연다. 밥함지에는 잡곡밥, 호박국, 멸치젓과 게 간장 등이 들어있다. 밥암지를 민태가 받아든다.
민태
왜 이제 나오시오.
민태 어머니
안 늦다. 다른 사람도 다들 이제 안 내오냐.
민태
배고푸구만 그러네.
민태 어머니
물은 그새 얼마나 품었냐?
경천
저렇게들 와서 노는디 일손이 잡히겄소. 조끔밖에 못 품었소.
민태 어머니
대체 공일도 아닌디 무슨 여자들이 저렇게 와서 논단가.
경천
배아지 따뜻한 것들이라 그러제 어째라우.
민태 어머니
한여름에 남은 죽거니 살거니 일하는데 옆에 와서 저러고 싶으까.
경천
그런께 말이요. 다들 썩었어.
민태 어머니
들으매 저렇게 노는 사람들을 경찰에서 말린다고 않든가. 공원이나어디서 시끄럽게 못 놀게 한다고 않든가?
경천
그래도 저렇게들 와서 노는디 어쩔 것이요.
민태 어머니
이런 디는 외따로 떨어진 들이라 그러는 것이네.
경천
들도 마찬가지제. 농민들은 사람 아니라우.
놀러온 사람들도 마침 점심을 먹고 있었다. 불고기며 맥주며 사이다들을 잔뜩 벌여놓고 않아 먹는 것이다.
민태 어머니
썩은 것들! 일하는 사람들 옆에서 저러고 싶으까. 배고픈디 어서 밥들 먹소.
앙상한 잡곡밥에 비린내 나는 것이라곤 고린 멸치젓뿐이었으나 민태와 경천이는 맛있게 먹는다. 한 숟가락씩 떠서 불근불근 씹어 삼킨다.
민태
(미안한 투로) 반찬이 너무 없네.
경천
이도 맛있소.
민태 어머니
저런 사람들 먹는 것 열에 한 가지만 먹고 살아도 될 것인디 언제 그렇게들 살까.
경천
우리는 백 년을 살아도 저렇게 못 살 것이요.
민태 어머니
한방에서 얼어 죽고 데어 죽는다더니 그 쪼 났네.
불덩이 같은 해가 바야흐로 중천을 넘어서자 이글이글 타기 시작한다. 들 이쪽은 나무가 하나도 없다. 불볕을 무릅쓰고 땅에 앉아서들 점심을 먹는다. 땀이 줄줄 턱을 타고 흐른다. 종아리도 순전 물이다. 볕을 타는 것은 농군들만이 아니다. 벼도 바싹바싹 탄다. 물을 품어댄 논이 금시 물이 잦아들고 금이 보인다.
민태 어머니
이런 때 비나 한 줄기 쏟아졌으면…
경천
날씨 하는 것이 좀체 비가 안 올 것 같소.
민태 어머니
큰일이시.
경천
양수기도 많이 나온 것 같습디다만 가뭄은 못 당해내라우.
민태 어머니
물도 하늘에서 오는 비라야제. 품은 물은 갈증만 나.
점심을 먹은 두 친구는 담배를 피우고 잠을 청한다. 논둑에 누워서 밀짚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자는 것이다. 거짓잠을 얼른 한 잠씩 붙이고 나자 일을 해야지 땡볕에 계속 일을 하기는 어렵다.
두 친구가 잠을 청하는 사이에 놀러온 사람들은 장구를 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민태 어머니는 밥 함지를 이고 퇴장한다. 똥땅똥땅 똥땅똥땅(음향)
장구가락에 맞춰 노래가 소리만 들리다.
소리만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는 심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만화방창 호시절에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민태와 경천이는 노래소리에 잠을 깬다. 다시 두렛줄을 잡고 발을 도사린 다음 물을 품는다.
경천
해는 중천에 오고.
민태
어레 하나.
경천
물은 밭아가는데.
민태
어레 둘.
경천
어서어서 품어서.
민태
어레 셋.
경천
이 배미 채우고.
민태
어레 넷.
경천
저 매미로 가세.
이들의 두레질 노래와 놀러온 사람들의 ‘노세노세’ 노래가 섞여 들린다. 이에 질세라 경천이 더 큰 목소리로 두레질 가락을 읊는다.
경천
이 물을 품어서.
민태
오백하나라.
경천
풍년이 들며는.
민태
오백둘하고.
경천
쌀 한 가마에.
민태
오백셋하니.
경천
사만 원만 하여라.
민태
오백넷이라.
경천
쌀값은 오르고.
민태
그렇지.
경천
비료값은 내려라.
민태
흥.
경천
농약값도 내리고.
민태
오백일곱에.
경천
포목값도 내리고.
민태
오백여덟이라.
경천
고기값도 내리면.
민태
흥.
경천
그때야말로.
민태
오백열하고.
경천
천하지 대농민일세.
민태
좋구나, 허허.(두레질을 멈추며) 예끼, 이 사람!
경천
왜?
민태
우리 욕심만 채워서 쓸 것인가. 쌀 한 가마에 사만 원 가면 살아갈 사람이 없게.
경천
저것들 먹고 노는 것 보소. 오만 원 가도 다 사먹을 것이네.
민태
해도 분수가 있제.
경천
그래야 농민도 기를 펴고 살제, 살겄는가 어디.
경천과 민태가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 마을 애들 넷이서 땀을 흘리고 걸어온다. 경천이가 짐작한 것이 있어 묻는다.
경천
너희들 어디 가냐.
아이들
…
경천
어디들 가.
아이 1
여자들 노는 디 구경 가라우.
경천
네 이놈의 새끼들 가지 마라.
(주먹을 올려 쥐면서) 또 약밥 얻어먹고 콜라병 주워 올라고 그러지야.
아이들
아니라우.
경천
아니기는 뭣이 아니여. 내가 다 안다. 거지새끼들처럼 그러지 말고 들어들 가거라.
아이 1
구경만 한단 말이요.
경천
잔소리 말고 마을로 가.
아이들이 멈칫멈칫 대면서 망설인다.
경천
빨리 가. 이놈의 새끼들아. 어디 가서 거지 노릇할라고 그러냐.
경천이 주먹을 올려 쥐고 아이들을 쫒는다. 아이들 마을로 내뺀다.
민태
자네는 성미도 묘하네. 궁금한 아이들, 가서 고깃점이라도 얻어먹고 병이라도 주워다 엿 바꿔 먹으라고 놔두제, 뭘라고 쫓아버린가.
경천
아무리 없고 못 먹기로서니 저런 디 가서 얻어먹게 해서 되겄는가. 차라리 우리들이 가서 술잔이나 얻어먹으면 얻어먹어도 아이들에게 그런 천한 짓을 하게 해서 쓰겄어.
민태
그럼 있다 가서 술 한잔씩 얻어먹으께?
경천
가세, 자네가 원한 것인께, 가서 한잔 얻어먹세.
놀러온 사람들은 단체놀이가 끝나고 노래자랑을 한다. 노래하는 소리가 들린다. 노래 소리 들리는 확성기 소리에 물을 품을 수가 없다.
소리만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에 새아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경천
에잇, 빌어먹을 것! 홧김에 서방질하더라고, 가서 한잔씩 얻어먹세.
경천과 민태가 백사장 쪽 놀러온 사람들에게 가느라 퇴장한다. 무대는 어두워진다.
& 백사장 / 노송 아래
놀러온 사람들 배경으로 중년 남자 셋이 궤짝을 깔고 앉아 있다. 민태가 그들 곁으로 간다.
민태
물 품다가 더워소 왔소. 술 한잔 주시요.
안경잡이
이 사람들이 노래가 한창인디 그래.
민태
확성기 소리 때문에 일도 잘 안 되요.
안경잡이
(훈게조로) 일하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 가져서는 안 되지.
경천
일하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 가져서는 안 되다니… 뭐가 안 된단 말이요.(시비조로)
안경잡이
이 사람이…
안경잡이가 경천이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안경잡이
물 품는 데 열중하지 않고 노는 데 마음을 주어선 안 되지. 그렇잖아도 날이 가물어서 추수 생산고가 감소될 것이 예상되는ㄷ 여러분이 잘해야지.
경천
그럼 우리는 잘하기 위해서 땡볕에서 물을 품는데 선생님들은 이런데 나와서 노는 것이 잘하는 일이요?
안경잡이
허허, 이 사람 보소!
경천
이 사람이 뭐야. 누구를 가르칠라고 그래.
안경잡이
야, 이봐라… 우리가 우리 돈 가지고 와서 노는데 네놈이 무슨 상관이야.
안경잡이가 남방셔츠를 벗어붙이고 일어선다.
경천
당신들 입으로 들어간 밥은 누가 지어 먹여주는데 그랫.
안경잡이
이 새끼 봐, 사상이 불순하네.
경천
사상이 불순하긴 누가 불순해. 새마을사업이 한창인데 이러고 나와서 노는 당신들 사상이 불순하제 누 사상이 불순해.
말이 커지자 노래 소리가 중단된다. 놀러온 사람들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된다.
안경잡이
이놈 새끼, 너 어디서 사냐.
경천
나 이 마을에서 사는 농민이다. 어쩔래.
안경잡이
뭣이… 어쩔래…?(말꼬리를 잡고 따진다.)
경천
그래 어쩔 테야? 당신들이 신사면 농민들 입장도 생각해봐야지. 추수 생산고가 감소딜 것을 걱정하고 훈계한 사람들이 이러고 놀아서 되겠소. (좌우를 둘러보면서) 이러고들 노니까 농민들은 사람으로 안 보이요?
옆에 있던 양복쟁이가 민태 소매를 끌면서 물어온다.
양복쟁이
저 사람이 왜 저래?
민태가 자초지종을 말한다. 민태는 얘기하고 양복쟁이는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민태
이러니 우리가 뿔이 안 나게 생겼소. 응? 뿔이 안 나게 생겼어?
양복쟁이가 수습이 필요하다고 판단을 하고 화해 제스처를 한다.
양복쟁이
그러고저러고 할 것 없이 여기 와서 술 한잔씩 하제. 더운디 수고하는구만.
민태 / 경천
아니라우.
양복쟁이
와, 이리.
양복쟁이는 경천의 어깨를 잡으면서 술을 권한다.
양복쟁이(경천에게)
자네도 따질 것 없이 이리 와서 같이 한잔 하소.
경천
내가 술 얻어먹어! 술 얻어먹으러 여기 온 지 알아.
양복쟁이
허허! 젊은 사람들이…
경천
신사면 신사답게들 노시오. 돈만 있으면 장땡인지 아요.
경천이와 민태는 획 돌아서서 퇴장한다. 무대는 어두워진다.
# 제3막
해가 서산에 져서야 들에서 돌아온 경천이는 술에 취해 이장댁을 찾아간다. 이장 역시 들에서 물을 품고 들어왔다. 경천이는 이장을 향해 목례를 한다.
이장
자네는 오늘 물 얼마나 품었는가.
경천
민태하고 품앗이한 것이 두 마지기밖에 못 넣어졌는 것이요.
이장
어째 조금밖에 못 품었네.
경천
이장님이 갯머리들에 계셔서 못 봤을 것이요만 오늘도 한 패가 몰려와서 종일 확성기를 매놓고 떠들어라우. 그 바람에 어디 일손이 잡히요.
이장
거, 사고시. 정부에서도 요즘 그런 퇴폐풍조를 단속하고 있는데 아직도 그 모양들이시.
경천
우리 들이 외진데다 유흥지로는 단속 대상이 안된께 그런 것 아니요…
이장
그렇다 치더라도 노는 사람들 스스로가 체면이 있는 법이제. 농민들은 이 가뭄에 비지땀을 흘리고 물을 품는디, 옆에 와서 그러고 놀아서 될 것인가.
경천
앞으로도 물을 얼마나 더 품을지 모른데 어떻게 하실라우?
이장
낸들 도리 있는가?
경천
이장님, 노송나무밭 저것을 쳐버립시다. 나무를 쳐버리면 여름에 백사장만 보고는 그렇게 놀러 안 올 것이요. 우리 마을 소나무밭인께 우리가 쳐버립시다. 눈꼴사나와서 보겄소.
이장
아무리 우리 마을 나무라고 해도 허가 없이 벌목해서는 안 되지.
경천
그러니까 벌목 허가를 내가지고 치지요.
이장
요새 산림 단속이 얼마나 심한디 그래.
경천
그놈을 베어서 새마을사업 자금에 보태 씁시다. 새마을사업은 정부의 시정 목표인데 안 들어줄랍디여. 오백 주가 다 되니께 그놈을 베어 팔면 우리 마을 새마을사업은 뭐든지 하고도 남을 것이요.
이장
그러기야 그렇지. 하지만 새마을사업을 한다고, 새마을사업 목표의 하나인 산림녹화를 해쳐선 안 되지.
경천
그래도 한 번 신청해보십시오.
이장
그러면 피서객도 안 몰려오고 새마을사업 자금도 생기고 좋기는 좋겠네만 그렇겐 안 돼.
경천
그렇게 못하면 딴 방법이라도 써거 기어코 피서객을 못 오게 합시다. 기가 상해서 보겄소.
이장
그런 폐습을 막기는 막아야겠는데…
경천
오늘 물을 품다가 민태랑 오기로 술 한잔을 얻어먹으려 안 갔습디여.
이장
그래 얻어먹었던가?
경천
가서 술을 한잔 달란께, 노래가 한창인디 일하는 사람들이 이런 데 정신을 써선 안 된다고 않소.
이장
그래?...
경천
그렇잖아도 날이 가물어서 추수 생산고가 감소될 것이 예상되는데 우리들이 잘해야 한다고 하지 않소.
이장
그자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도 무식한 사람이지, 추수 생산고가 감소될 것을 걱정하는 사람이 이 가뭄에 그러고 와서 놀 것인가. 그런 돈 있으면 양수기라도 한 대 사서 기증할 일이지.
경천
우리 돈 가지고 와서 우리 노는데 네놈이 무슨 상관이냐고 않소.
이장
도의를 모르는 사람이시.
경천
요놈의 새끼들이 농민을 제 놈들 종만큼도 못 알아본다 말이요. 기어코 못 와서 놀게 합시다.
이장
그럼 자네들은 어떤 방법으로 제지했으면 쓰겄는가?
경천
저 소나무밭을 쳐버리자 말이요.
이장
그건 안 되네. 면이나 지서에 가서 일단 의논해볼라네만 어려울 것이네.
경천
벌목 허가를 안 내주면 지서에서 피서객들을 강력히 단속하라고 하시오. 이래 가지곤 농민들 사기를 높일 수가 없고 새마을사업도 추진하기가 어렵겠다고 하시오.
이장
그건 그렇게 건의할라네.
경천
만일 지서에서 단속을 못하면 우리가 직접 나서서 피서객들을 몰아낼라우.
이장
알겠네. 내일이라도 틈나는 대로 한 번 나갔다 옴세.
경천
실은 여름철만이 아니어라우. 가을에는 또 단풍이 좋다고 이웃 산으로들 얼마나 놀러 옵디여. 추수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싸대는데 단풍놀이들을 와서 어떻게 놉디여.
이장
그도 못 볼 일이제.
경천
그러니 일할 맛이 나겄소. 그들이 와서 추수를 거들어준다 해도 시원찮을 것인데, 농촌에서는 한 사람을 두 사람으로 쪼개 쓸라는 판에 술처먹고 장구 치고 놀아서 될 것이요. 농사를 지어놓으면 쌀밥은 제 놈들이 다 먹으면서… (사이) 도회지에 가까운 풍치림은 전국 도처에서 그럴 것이요.
이장
그도 역시 시정되어야 하네.
경천
생각햐면 못 먹고 못 입고 농민같이 불쌍한 사람들이 없어라우.
이장
그런께 근래 중농정책에 치중하고 안 있는가. 젊은 자네들이 잘하소.
경천
아무튼 이장님,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피서객을 꼭 좀 못 오게 해주십시오. 공일이 내일모레인데 이번 공일에는 한 사람도 못 비치게 해주십시오.
이장
알겄네.
경천
이장님도 고달프실 텐데 들에서 돌아오시자마자 떠들어서 죄송하요. 나 그럼 가는 길에 동네 청년들 좀 만나고 갈라우.
이장
어이 다녀가소.
경천은 이장 집을 나온다. 경천은 회관을 거쳐 삼동이네 집으로 향한다. 무대는 어두워진다.
& 삼동이네 마루
동네 청년들이 삼동이네 마루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경천
웬 술인가?
청년 1
물 품고 고단해서 추렴했네. 앉소.
경천
나한테는 알리지도 않고…
청년 2
앉아.
경천은 오늘 있었던 일을 동네 청년들에게 얘기한다. 청년들 고개를 끄덕이면서 경천의 얘기를 듣고 같이 분개한다.
경천
만일 오는 공일날도 그렇게들 와서 놀면 우리들이 직접 나서서 몰아내세. 그렇게 노는 것 보고 일하겄던가.
청년 1
그러세 쫓아가서 산통을 깨버리세. 정말 눈 뜨고 못 보겄네.
경천(청년들을 둘러보며)
꼭들 그렇게 하세.
무대: 어두워지다.
# 제4막
경천이는 이장과 동네 청년들과 다짐을 했어도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백사장에 노송나무가 서 있는 한 피서객이 떠나지 않을 것 같은 것이다. 벌목 허가를 맡건 못 맡건 몇 나무만이라도 쳐버리리라 마음을 먹는다. 경천은 하현달이 뜨기를 기다려 톰을 들고 집을 나선다.
& 가운데 들 / 이틀 후
경천이와 민태는 오늘도 품앗이 물을 품는다.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다. 가뭄을 이기기 위해 모두 나선 것이다. 양수기는 양수기대로 통통거리고 사방에서 두레질을 한다. 아낙네 어린이들은 양철동이와 세숫대야로 물을 나르기도 한다.
민태
또 시작해보세.
경천과 민태는 두레줄을 잡고 자리한다.
경천
어레 하나라.
민태
어레 둘이라.
경천
어레 셋하고.
민태
어레 넷하니.
경천
어레 다섯이라.
경천이는 두레질을 하면서 들에 나온 청년들을 세어본다. 삼동이, 기수, 인곤이, 병삼이 등이 보인다. 그 외에도 멀리서 일하는 청년들을 합하면 합해 여덟명은 되리라 짐작된다. 사세가 불리하면 그리그리 연락해서 다 모이기로 한 것이다. 피서객이 오늘도 몰려오면 기어코 청년들이 나서서 몰아내자고 한 것이었다.
무대 어두워졌다 밝아진다. 시간이 지났다.
민태
이백다섯.
경천
이백여섯.
민태
이백일곱.
경천
이백여덟.
두레를 잠시 쉬던 민태가 경천에게 작은 소리로 묻는다.
민태
저 소나무 자네가 베었제?
경천
…(눈만 쨍긋해 보인다.)
민태
서에서 알면 어쩔라고 그랬는가?
경천
소나무가 없어야 피서객들이 안 온다 마시. 팔아서 새마을 자금에 보태 쓰제 어째.
민태
저것 좀 베었다고 올 사람들이 안 오겄는가.
경천
하나의 경고시.
민태
그나저나 저 나무들을 처치해야 할 것인디…
경천
이장이 처치하겄제.
피서객들이 백사장에 들어선다. 오늘은 세 패가 밀어닥친다. 그들은 노송나무 그늘을 비롯해서 백사장, 강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들어찬다. 발가벗고 모래찜을 하는 사람, 헤엄치는 사람, 장구를 치고 춤을 추는 사람, 확성기를 달아놓고 노래자랑을 하는 사람 등 가지가지이다.
민태
야! 장관이군.
경천
다들 오라고 하소. 몰아내세.
민태는 동료를 부르러 가고 경천은 백사장을 향한다. 이장도 백사장 쪽으로 이동한다.
& 백사장
이장이 노래자랑하는 곳으로 가서 주최측에 양해를 구한다. 이장이 마이크를 잡는다.
이장
이곳에 놀러 오신 피서객 여러분께 알립니다. 피서객 여러분께 알립니다. (사이) 이 사람은 이 마을 이장이올시다. 아뢰올 말씀은 다름이 아닙니다. 지금 이 지역은 심한 가뭄으로 물 품기 작전에 총동원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노시는 것은 좋지만 농민들의 노고와 사기를 생각해서 조용히 질서 있게 놀아주시기 바랍니다. 부탁합니다.
경천(혼잣말)
말씀 잘 하시네.
피서객들은 이장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여전히 그대로 놀고 있다. 이장은 다시 마이크를 쥔다.
이장
피석개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안내드립니다. 농촌에서 열심히 일하는 농민들 사기를 생각해서 질서 있게 노시기 바랍니다. 너무 시끄럽지 않게 놀아주시기 바랍니다.
두루미마을 청년들이 모여든다.
경천
이 썅! 몰아내세들…
청년들은 백사장 피서객 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고함을 치면서 피서객들의 퇴장을 종용한다. 이어서 피서객들과 동네 청년들이 다툼이 시작된다.
피서객 1
네놈들이 뭐야!
피서객들과 동네 청년들의 패싸움이 시작된다.
청년들과 피서객
저놈 잡아라!
이놈 쳐라!
지서 주임과 서원 두 명이 자전거로 달려온다.
지서 주임
웬일들이야?
이장
피서객들에게 사전에 마이크로 질서 있게 놀아달라고 당부했는데 듣지 않아, 결국 이렇게 됐네요.
지서 주임
지금이 어느 시국인데 이러고들 놀아. 정신을 못 차린 사람들이구만.
(사이)
(서원들에게) 각 단체 대표들 불러와.
지서 주임은 백사장을 둘러보다 베어진 노송나무를 본다.
지서 주임
저 나무들은 누가 베었어?
경천
여기 와서 못 놀게 할라고 제가 베었습니다.
지서 주임
자네도 정신이 비었군.
지서 주임은 서원이 불러 모은 각 단체 대표와 경천을 연행해 간다. 무대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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