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와 희곡

모노드라마: 농지상한선(農地上限線), 뚜범이 독백

바우네 2024. 12. 24.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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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드라마: 농지상한선(農地上限線), 뚜범이 독백


원작: 오유권 소설 농지상한선 (문학사상, 1982)
각색: 김병한


무대 설정


배경: 허름한 농가의 툇마루. 뒤편에는 논밭과 산이 멀리 보인다.

소품: 삽, 괭이, 멍석, 낡은 모자, 돈 꾸러미가 담긴 헝겊 보자기.

조명: 무대 중앙에 따뜻한 햇빛이 비추다가 점차 어두워진다.


독백


(뚜범이, 툇마루에 앉아 삽을 닦다가 멈춘다. 손으로 땀을 닦으며 하늘을 바라본다.)

뚜범이(독백)


허허… 참말로 세상 참 기가 막히다.

(삽을 내려놓으며)

이 삽자루 잡은 지 벌써 몇 해야? 어릴 때부터 남의 땅에서 농사지으며 살아왔으니, 내 손바닥엔 흙냄새가 배었어. 그래도 그때는 뭐라도 꿈이 있었지.

1950년 봄, 농지개혁법이 나왔을 때는 온 마을이 잔치였어. 나도 그때는 설렜지. 이제는 내 땅에서 일하고, 내 땅에서 거둬먹는다고. 허허, 그게 꿈이었다니.

(쓴웃음)

근데 말이야, 땅이 내 땅이 되었다고 뭐가 달라졌더냐? 해마다 농지상환료 갚는다고 허리띠 졸라매고, 가뭄에, 홍수에, 병충해까지 겹치면 남는 게 없더라. 그래도 그때는 희망이 있었어. 빚만 다 갚으면 편해질 거라고 믿었으니까.

(잠시 침묵)

근데 세상은 그리 쉽게 풀리질 않더라고. 농지상환료 다 갚을 때쯤 되니까 농지법이 또 바뀌었어. 1967년. 농지상한선이 풀리고, 부재지주가 허용된다더라. 그 소식 듣고 마을 사람들 또 술판 벌이더라. 땅 팔고 큰돈 만졌다며 좋아하더라고.

나도 그때는 혹했어. 쌀값 떨어지고 농사는 힘들고, 그 돈이면 자식들 옷 한 벌 사주고, 집이나 고쳐볼까 싶었지.

(머리를 긁적이며)

그래서 팔았어. 땅을 팔고는 윤첨지한테 가서 돈을 빌렸지. 한철 농사 지어 다시 사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나.

(고개를 떨어뜨리며)

윤첨지… 그 양반은 변한 게 없어. 1950년 땅 내놓을 때는 주저앉는 줄 알더니, 이젠 고리대금업으로 사람들 꽉 잡고 있더라. 손톱만큼 남았던 내 자존심도 그 집 마루 밑에서 무릎 꿇으면서 다 버렸어.

(손을 꽉 쥔다.)

그 양반은 웃으면서 술 한잔 주더라. “비료값이 모자라면 더 가져가소.” 그 말이 얼마나 서럽던지… 돈 빌리는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사람이라는 게 빚을 지면 고개를 못 들더라고.

(고개를 들며)

그래도 내가 그때는 믿었어. 돈 갚으면 끝날 줄 알았거든. 근데 그놈의 이자가 또 발목을 잡더라. 농사는 계속 지었지만, 남는 건 윤첨지네 장부에 적힌 숫자뿐이었어.

(주먹을 쥐고 일어나려다 다시 앉는다.)

결국 또 윤첨지 밑으로 들어갔지. 처음엔 자존심이 상했어. 근데 농사꾼은 땅 없으면 죽으라는 거잖아?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또 소작을 붙이더라고.

(고개를 젓는다.)

묶였다, 풀렸다. 풀렸다, 묶였다. 이놈의 농지상한선은 병 주고 약 주는 꼴이야.

(헝겊 보자기를 풀어 돈 꾸러미를 바라본다.)

이 돈? 이거 또 윤첨지한테 빌린 거야. 내년 농사 지을 비료값이라는데, 이자가 얼마 붙을지 벌써 겁난다. 그래도 안 빌리면 농사도 못 짓고, 못 짓으면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니까.

(고개를 숙이고 깊은 한숨을 쉰다.)

이놈의 땅. 있으면 이자가 무겁고, 없으면 발목이 무거워. 땅에 얽혀 사는 게 농사꾼의 팔자라지만, 나는 이 팔자가 참 원망스럽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농지개혁이 해방이라더니, 그 말 믿었던 내가 바보였어. 남의 땅에서 내 땅으로, 내 땅에서 다시 남의 밑으로… 흙 묻은 손으로 평생 고개 숙이고 살아야 하는 게 우리 같은 사람들의 운명이더라.

(삽을 들어 다시 닦기 시작한다.)

그래도… 농사짓는 사람은 흙을 떠날 수 없어. 땅을 잃어도, 희망을 잃어도, 씨를 뿌리고 거두는 건 내 손이니까.

(고개를 들며)

이번 농사는 잘되겠지? 아니, 잘돼야 해. 이 땅이 다시 내 땅이 되는 날까지, 나는 또 삽자루를 놓을 수 없으니까.

(무대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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