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와 희곡

모노드라마: 또갑이의 고백

바우네 2024. 12. 14. 02:58
반응형

모노드라마: 또갑이의 고백


무대는 어두운 가운데, 구석에서 짐을 끄는 소의 움직임 소리가 들린다. 점차 소리는 사라지고, 스포트라이트가 또갑이에게 비춘다. 또갑이는 허름한 옷차림으로 무대 중앙에 앉아 있다. 그의 손에는 낡은 채찍이 들려 있다. 그는 관객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또갑이

(혼잣말처럼, 무겁게 시작)
여그, 까치메 김또갑이요. 구르마꾼이요.
구르마라고 아시오? 소에 멍에 씌워서 짐 실어 나르는 것 말이오.
예전에는 마을에서 구르마 없이 살아갈 수가 없었지.
벼를 나르고, 거름을 싣고, 장에 갈 때도 내 소가 끌던 구르마가 제일 먼저였소.
마을 사람들도 나한테 의지했었지. 그게, 얼마 전 일이오.

(한숨을 내쉰다. 잠시 침묵 후 고개를 숙이고 말한다.)
근데, 세상이 변했소.
딸딸딸딸… 그놈의 소리 아시오?
처음엔 무슨 괴물이 나타난 줄 알았지.
경운기라는 거, 그거 말이오.


(고개를 들고 목소리를 높인다.)
경운기를 끌고 나온 놈, 나동환이!
그놈이 우리 마을을 뒤집어놨소.
소가 하루 종일 끌어야 나를 짐도, 그놈은 반나절이면 읍까지 다녀온다니…
값도 싸게 받아. 이천 근을 실으면서도 내 구르마보다 싸게 받는다니까.
누가 내 구르마를 쓰겠소.

(잠시 감정을 가라앉히며 차분히 말한다.)
나도 처음엔, 참으려고 했소.
동환이 놈도 먹고살자고 하는 거 아니겠소?
그렇지만 이게 사람이 참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소.
장마다 나를 짐 얻어 실던 마을 사람들이 다 동환이한테 가버렸소.
나도, 또을이도, 소도… 다 굶어 죽게 생겼소.


(채찍을 손으로 쥐며 관객을 응시한다.)
그래서, 내가 경찰에 갔지요.
순경 나리한테 말했소.
"경운기가 농사지으라고 준 건데, 이게 짐 싣고 돈 벌라는 거요?"
나도 아는 게 있어야지.
근데 순경 나리가 뭐라 했는지 아시오?
"운수 영업은 불법이다. 내가 단속하겠다."
그 말 듣고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

(잠시 웃다가 다시 굳은 표정을 짓는다.)
근데, 그게 아니었소.
동환이 놈이 또 다른 순경한테 술 한 잔 사고 담배 사다 바치고…
"경운기 짐 싣는 거 괜찮다"는 소릴 듣고 왔단 말이오.
그게, 법이 맞소?


(채찍을 내려놓고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걸어간다.)
그래도 난 사람답게 해결해보려고 했소.
또을이, 용학 양반, 중만이… 다 모아서 항의서를 썼지요.
경운기 주인한테 보냈소.
"너는 경운기로 밭이나 갈고, 농로에서만 일하라."
"국도까지 나와서 사람 짐 싣는 짓은 하지 마라."
그런데… 그놈이 듣겠소?
사람들이 뭐라 하든, 그놈은 아랑곳하지 않았소.


(목소리를 높이며 감정을 터뜨린다.)
내가 잘못했소?
내 소가, 내 구르마가, 내 밥그릇이 그렇게 하찮았단 말이오?
동환이 놈한테 물어봤소.
"너는 마을을 위해 경운기 샀단 말 하지 마라. 네 배 불리려고 한 거지."
그랬더니 그놈이 뭐라 했는 줄 아시오?
"마을 사람들이 경운기를 원해서 내가 한 거다."
허참, 그럼 내가 이러고 있는 건 마을을 위해서 안 그런 거요?


(점차 목소리를 낮추며 슬프게 웃는다.)
결국 내가 길을 막았소.
소를 끌고 나와서 경운기 길을 가로막았단 말이오.
사람들이 그랬소. "이제 그만하자. 세상이 변한 걸 어쩌겠냐."
근데 난, 그 말이 더 화가 났소.
내 소를 보니까… 이놈은 무슨 죄가 있겠소.
평생 땀 흘려 일했는데, 이제는 쓸모없어진 몸이 됐단 말이오.
그걸 내가, 내가 지켜볼 수가 없었소.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도끼를 든 손짓을 한다.)
그래서 내가…
그래서 내가 그놈을 죽였소.
미련한 내 소를.
"어이, 소야. 너도 이제 쉴 때가 됐구나."
도끼를 두 번 휘둘렀지요.
눈을 뒤집고 쓰러지던 소를 보면서…
내가 끝났구나 싶었소.
나도, 내 구르마도, 내 세상도.


(조용히 채찍을 내려놓고 관객을 바라본다.)
그때 알았소.
경운기를 막아도, 동환이를 이겨도, 아무 소용이 없단 걸.
세상이 변했단 걸… 이 또갑이 혼자서 어찌 막겠소.


(조명이 점차 어두워지고, 또갑이는 무대 중앙에서 천천히 몸을 숙인다. 마지막으로 속삭이듯 말한다.)
근데 말이오…
그놈의 경운기가… 내 소보다 더 훌륭했단 걸…
아직도 인정할 수가 없소.

(무대가 완전히 어두워진다. 멀리서 소 울음소리가 들린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