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유권 원작, 농지상한선(農地上限線) [전체]
농지상한선(農地上限線)
원작: 오유권 소설, 농지상한선(문학사상, 1982. 01)
각색: 공노사노 김병한
등장인물
텃골양반: 샘안집 텃골 양반
텃골댁
자식들: 태봉, 영순 등(오남매)
윤첨지: 금부리 지주
할멈: 윤첨지 부인
뚜범이: 용수배미 소작 출신
소룡이: 안골 출신
금부리 주민 1, 2, 3
대화 중에 나오는 인물
윤봉: 텃골양반 막둥이
주요 등장인물 성격
텃골양반: 남달리 부지런하여 소작농으로 있을 때도 남보다 더 많은 소작을 붙였던 농부. 남한테 싫은 소리는 않지만 자신의 소작농 신세에 불만이 컸다. 농지개혁으로 자신의 전답을 갖게 된 것에 큰 자부심을 느끼며 막둥이 대학 보낼 계획을 세운다.
텃골댁: 텃골양반을 따라 열심히 사는 시골 아낙. 그는 소작농 생활도 팔자려니 생각하고 큰 불만없이 살았다. 농지개혁으로 자신의 농지가 생김에 큰 희망을 느끼면서 새 농지 제도를 만든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윤첨지: 한때는 53정보의 땅을 소유하고 떵떵거리고 산 시골 지주. 농지개혁으로 3정보만 남기고 나머지는 지가증권을 받게 된다. 받은 지가증권은 운수업에 투자하고 모아놓은 재산으로 돈놀이를 해서 다시 재력을 키운다. 제도가 바뀌자 다시 땅을 사들여 왕년 세도를 꿈꾼다.
때
1950년부터 60년대 후반까지
장소
금부리
# 제1막 / 1950년 봄
1950년 봄, 농지개혁법이 공포됨에 따라서 농지상한제가 실시되고 소작농이 없어지게 되자 금부리 소작인들은 쾌재를 외쳤다. 하나는 경작지가 자기 소유로 되어서 해마다 물던 소작료를 안 물게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주인 상전을 안 받들게 된 점이다. 반농노적인 생활을 하면서 전자는 물질적으로 후자는 정신적으로 무거운 압박을 느껴왔기 때문이었다. 그게 농지개혁으로 두 가지가 다 일시에 해소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고 하였다.
& 텃골양반 댁
텃골양반은 곰방대를 물고 있고, 텃골댁은 풋보리를 말리고 있다. 부엌에서는 토끼탕이 끓는 소리가 들린다. 자신의 땅이 생김에 가족 잔치를 준비한다.
텃골댁
이젠 소작료를 안 물고 우리가 다 먹고 쓰게 됐으께 얼마나 푸지겄소.
텃골양반
대신 영농비 들어갈 것은 안 생각하고.
(사이)
농지상환료도 물어야 하고…
농지상환료란 소작하던 전답의 소유권을 받는 대신 그 대금을 오 년간 나누어 연부로 현물로써 상환해야 한다. 아울러 분배받은 농가는 상환을 완료하기 전에 소유권을 팔거나 저당권을 설정하지 못한다. 만약 이농을 할 경우에는 정부에 반환해야 한다.
텃골댁
그러면 상환액이 일 년에 얼마씩이요?
텃골양반
그것은 계산해서 고지서가 나와봐야 알제 알겄는가.
텃골댁
그러건 저러건 소작료를 안 물어서 쓰겄소. 일 년 내 땀 흘리고 농사지어 가지고 소작료를 물라면 눈깔이 쑥쑥 빠지는 것 같습디다.
텃골양반
도둑맞은 속 같았제.
텃골댁
명절마다 봉물 갖다 바쳐야제…(사이) 마님 생일에는 별식해다 바쳐야제…(사이) 이리저리 마음 놓고 살 수가 있어야제라우.
텃골양반
그건 그래.
텃골댁
누가 만들었는지 참으로 고마운 일이구만요.
농지개혁안이 참으로 고마운 제도라는 것을 공감하는 텃골댁이다. 정부수립 다음해인 1949년 4월 28일 국회를 통과한 농지개혁안은 동년 6월 21일 법률 31호로 공포됐다.
텃골양반
윤첨지는 속이 속이 아닐 것이네.
텃골댁
식구들끼리 잔치나 합시다.
텃골양반
남들처럼 개 돼지는 못잡드라도 토깽이라도 걸판지게 먹어보세.
텃골댁
아그들아~
텃골양반과 텃골댁은 다섯 남매나 되는 자식들을 대학에 하나 못 보내고 중고등학교만 걸치다 말게 한 것이다. 소작료를 내지 않으면 중3에 다니는 막둥이 윤봉이만은 대학에 보낼 것 같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큰 아들 태봉과 큰 딸 영순이가 등장한다. 텃골댁은 상을 차리고 딸 영순이는 토끼탕을 냄비채 들어서 상에 올린다.
텃골양반
먹자들.
텃골댁(텃골양반에게 슬을 따르며)
먼저 술 한 잔 하시오.
텃골양반
치! 생각잖은 술을 묵게 생겼네.
텃골댁
이도 남의 땅을 오래 본 덕 아니요.
텃골양반
덕은 무슨 덕… (사이) 남의 종노릇한 것은 안 생각하고.
(안주 한 점을 집는다.)
너희들도 한 점씩 먹어라. 토끼고기가 뭄에 좋은 것이니라.
태봉
아버님, 드십시오.
태봉이가 텃골양반에게 술을 따른다. 텃골양반은 아들이 따라주는 술을 만족한 얼굴로 마신다.
텃골양반(잔을 건네며)
아나, 너도 이런 때는 한잔 해라.
태봉(잔을 받으며)
죄송합니다.
텃골양반
먹는 음식인디 어쨌다냐. 들어라. 나는 이번 일로, 우선 안 물게 되는 소작료도 소작료지만 너희들에게 소작을 안 물려주게 된 것이 제일 기쁘다. 조상 대대로 남의 종노릇만 해온 것을 생각하면 너무 섧고 분하다.
태봉
글쎄올시다.
텃골양반
너희들은 이제 해방되었다. 상전 눈치를 볼 것도 없고 남에게 얽매여 살 것이 없다. 아니, 그보다도 지금 중학에 다니는 너희 작은 동생, 윤봉이는 대학을 보낼 수 있겄다. 해마다 소작료 물어주는 벼를 팔면 대학을 둘은 가르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태봉(경이스러운 모습)
어!
영순
우리 집에서 대학생이 나오겄네.
태봉
이 많은 형제 중에서 학사도 있어야제.
텃골양반
농사짓는 푼수로는 너희들을 다 대학교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만, 해마다 소작료 주고, 빚 갚고, 뭣하고 나면 그럴 돈이 있었어야제.
텃골양반이 잠시 회상에 잠긴다. 텃골양반은 농지개혁이 농민의 한 많은 숙원을 풀고 생활을 향상 발전시키는 데 보다 큰 목적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텃골양반(술을 들면서)
들자. 오늘은 식구대로 즐겨보자.
(아내에게)
자, 자네도 오늘 같은 날은 한잔 해보소.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이 고기 좀 많이 먹어라. 토끼고기가 몸에 좋은 것이란다.
텃골양반은 냄비의 토끼고기를 아이들에게 한 점씩 집어준다.
태봉
놔두십쇼. 저희가 집어 먹을랍니다.
텃골양반
전에는 이런 고기도 좋은 놈은 마님네한테 갖다 바치느라고 우리는 잘 못 먹었다. 이젠 누구 생각할 놈 있고 무서운 놈 있겄냐. 많이씩 먹어라.
텃골댁
그 뿐이요. 명절에는 새물로 올려 바쳐야 하고 삼복더위에는 개장국 고아다 바치기도 했지라우.
텃골양반
그랬제. 이제는 자식놈 대학까지 보내게 됐으니 누가 만들었는고 농지개혁은 잘 한 일이제. 아암~
무대 어두워진다.
& 윤첨지 집
윤첨지는 토지대장을 들치고 있다. 할멈은 상심한 표정으로 남편인 윤첨지 토지대장 들추는 모습을 보면서 앉아있다.
윤첨지(혼잣말로)
53정보에서 3정보만 남기고 다 내주다니…
할멈
나라에서 보상은 해준닥 안했소.
윤첨지
오 년에 걸쳐서 나눠준다네. 그것도 현물로 주는 것이 아니고 ‘지가증권’으로 준닥 안한가.
할멈
문턱이 달게 오던 사람들이 농지개혁 뒤로는 개미새끼 하나 얼씬을 안하요.
윤첨지
보자, 이놈들!
할멈
어허! 이렇게 허망한 꼴이 또 있을까.
윤첨지
시변이 그런디 하는 수 있는가. 그래도 우리는 약과인 셈이네. 한 군 땅을 차지한 대지주들은 어쩌겄는가.
할멈
금메 말이오.
윤첨지
세도를 잃어서 그렇지 앞으로도 먹고살 것이야 걱정할 것 뭐 있는가.
윤첨지는 토지대장을 들여다보다가 빙긋이 웃는다. 좋은 꾀가 생각난 것이다.
할멈
그러고 말고라우. 지금 있는 재산만 가지고도 손주 대까지 먹고 살 것이요.
윤첨지
그나저나 세도도 누릴 만큼은 누렸네. 왕조 말부터 대대로 지주를 지냈은께 반백년을 해먹지 안 했는가.
할멈
그런 게 뭐 보잘것 있소. 당신은 언뜻하면 세도, 세도하던디 세도노래 부르지 마시오. 권세 뒤같이 보잘것 없는 것이 없다우. 우리도 보시오. 지주에서 벗어난께 당장 이 모양 아니오.
윤첨지
그래도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드라고, 세도가 좋기는 좋은 것이네. 그 많은 사람들이 우리 앞에 와서 허리를 굽히는 것 보소.
할멈
이제는 다 끝나부렀소.
윤첨지
아니, 다시 고개 숙이고 오게 만들텐게 기다리소. 다들 다시 나를 떠받들 것이네.
윤첨지는 벌써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다. 벌어놓은 재산과 이번에 보상받은 돈으로 고리채를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지가증권을 운수회사에 투자하면 돈이 생길 것이라는 계산이 선 것이다.
할멈
그런 것도 한두 번 아니고 성가셔서 쓰겄습디여. 나오는 것 없는 감투는 안 쓰는 것이 좋아라우. 술상 놓기 귀찮아서 못쓰겄습디다.
윤첨지
그런 것이 귀찮으면 차라리 세상을 맞아(남김없이 모두) 버리소. 사람으로 태어나 그런 것이 다 영화고 귀염이제 뭣이란가.
할멈
그런 귀염 안 봐도 다 잘 삽디다. 땅이건 돈이건 간에 다시는 세도에 욕심 부리지 마시오.
윤첨지
사람이 아직도 세상살이를 모르구만. 재물같이 귀한 것이 없고 세도같이 좋은 것이 없단께.
윤첨지는 농자금 색갈이 형식으로 벌써부터 이자 놀이를 시작한 것이다. 농지는 자경으로 바뀌었지만 영농자금이 부족한 처지라 아무래도 돈을 구해야하는 사람은 윤첨지에게 알게 모르게 다리를 놓고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윤첨지는 입도선매라는 등 옛날 소작인들을 상대로 돈놀이를 하는 데 월 사부 이자로 물 샐 틈 없이 진행했다. 무대: 어두워진다.
# 제2막(5년 후)
윤첨지는 오 년간을 헛돈 한 푼 안 쓰고 굳게 모았다. 결과 농지상한선만 없다면 오 년 전에 잃었던 50정보의 땅을 되찾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농지상한선에 걸려서 땅을 더 살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살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고리채노릇만 해도 지주노릇 하는 이상의 수입과 위엄을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윤첨지 고리채대장을 들여다보면서 알이 굵은 주판을 튕기고 있다. 주판으로 계산을 하는 남편을 할멈은 존경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술을 따른다.
할멈
한잔 드시고 계산 하쇼.
윤첨지(주판을 치우면서)
그럴까…
밖에 인기척이 있다.
뚜범이(소리만)
마님나리 계십네까?
윤첨지(문을 열면서)
어서 오소.
뚜범이
시하 안강하십네까?
뚜범이는 마루 밑에서 굽신거리며 인사를 올린다. 마루로 올라와서도 국궁하고 고개를 조아린다.
윤첨지
그래 면사랑은 잘되고?
뚜범이
예. 마님나리께서 돌려주신 돈으로 농사는 걱정 없게 되었압네다만 또 명년에 쓸 비료값이 없어서 이렇게 왔습네다.
윤첨지
명년에 쓸 비료를 지금부터 구해놀려구?
뚜범이
예. 그렇지 않으면 그때 가서는 너도 나도 사는 통에 구하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값이 비쌉네다.
윤첨지
그래?...
뚜범이
봄의 것도 못 갚고 죄송합네다만 이만 원 한 장만 더 돌려주십시오. 실수 없이 갚으리라.
윤첨지
그건 그렇고, 왔은께 술이나 한잔 하소.
윤첨지는 술을 따라 뚜범이에게 잔을 권한다.
뚜범이
웬이오!
뚜범이는 두 손을 내밀어 잔을 막는 시늉을 한다.
윤첨지
받어, 이 사람아.
뚜범이
빈 손으로 와서 체면이 없는디, 술까지 묵고 가겠습네까.
윤첨지
먹는 음식인디 어쨌단가. 들소. 이 사람아.
뚜범이
비록 잡힐 것은 없지만 제 얼굴 하나 보고 믿으십시오.
윤첨지
자네 같은 사람이야 기십만 원을 줘도 믿겄네. (고리채 대장을 뒤적요 보다가) 봄에 가져간 것이 오만 원이고 작년 것도 아직 이자가 남았네 그랴.
뚜범이
예. 예. 장부가 거짓말하겄습네까. 추수를 하면 이번 것만 놔두고 씨리 갚겄습네다.
윤첨지
믿네, 가져가소.
윤첨지는 금고를 연다. 이만 원을 빌려주고 고리채 대장에 기록한다. 뚜범이 인사하고 퇴장한다. 이어서 안골 소룡이가 등장한다. 역시 굽신거리며 사정한다.
윤첨지(다짐하듯)
사부 이잘세. 알제?
소룡이
염려 마십쇼. 두 달만 쓰고 갚으리라.
윤첨지
쓰는 대로 쓰소.
윤첨지는 소룡이에게 돈을 내 주고 장부에 기록한다.
소룡이
그나저나 영농비 때문에 농사 못 짓겠구만이라우. 물가는 비싸고 돈이 어지간히 헤퍼야지라우.
윤첨지
그럴지 알제, 어째. 농지대는 다 상환했는가?
소룡이
올해로 끝나요. 땅은 내 땅이 되었다고 하지만 오 년간 그놈 밀어넣니라고 똥 탔구만요.
소룡이 돈을 챙겨 퇴장한다.
& 같은 장소
윤첨지 내외는 이야기를 나눈다.
할멈
금부리 사람들이 전답을 내 놓은 답디다.
윤첨지
받을 때는 좋았제. 막상 짓다보니 그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얼만디.
할멈
금메 말이요. 이럴 때 사두면 좋은디.
윤첨지
이런 때 사놓면 뒤에 한몫 볼지도 모른디 사겄는가 어디.
할멈
한 사람이 삼 정보 이상은 가질 수 없다지라우.
윤첨지
그런다네.
할멈
그럼 내 명의로도 사고 자식들 명의로도 사놓시오 그래.
윤첨지
사놓면 누가 그 농사를 지어내게.
할멈
또 뭇갈림 내주제 어째라우.
윤첨지
이젠 소작할라는 사람도 없을 것이네. 농사짓기가 하도 땀나서 원.
& 12년후 / 1967년
농지상한제로 봉건적 유습은 불식되었지만 농업의 현대화를 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1967년 9월 마침내 농지법이 개정된다. 농지소유 상한선이 풀리고 이와함께 부재지주가 인정된다. 그러자 때를 기다린 듯 부자들은 다시 땅을 구입하고 도시 사람들도 땅을 사려고 내려왔다.
윤첨지도 다시 땅을 사들였다. 헛간에 ‘농지매입사무소’라는 간판까지 내걸었다. 다시 땅문서가 쌓이고 이것을 보는 할멈은 걱정을 보탠다.
할멈
돈만 은행에 넣어두면 되지 멀라고 귀찮은 짓을 하시오.
윤첨지
이 여편네야, 모르는 소리 자그마니 따닥거려. 나 알어서 할 텐께.
할멈
밥을 또 얼마나 삶아내게.
윤첨지
그것이 다 사람 구실이고 영화란께.
할멈
세도, 세도하다가 이제 세도에 눌려 죽을 것이요.
윤첨지
아, 저, 방정 보소!
할멈
참, 뚜범이 일은 어떻게 했소.
윤첨지(웃으면서)
뚜범이 그놈이 땅을 나한테 팔고 바로 뒤돌아 가기도 전에 소작을 주락 안 한가.
할멈
그래라우이.
윤첨지
도둑도 빠르제. 그래서 지금 경황이 없다 하고 술을 한잔 줬네.
할멈
그럼, 뚜범이를 밑에 두고 일을 보게 하쇼.
윤첨지
알았어. 내가 다 알아서 할 것인께. 자네는 방정만 떨지 말어.
무대: 어두워진다.
& 같은 장소 / 뚜범이와 윤첨지
윤첨지
자네 방금 한 말이 진담인가?
뚜범이
진담이고 말고라우. 누가 어른한테 빈말하겄습네까.
윤첨지
그래… 소작을 부치면 얼마나 부칠란가?
뚜범이
제가 판 땅, 그만큼만 부칠랍니다. 그 이상은 힘이 부쳐서 못 지어라우. 돈이 아쉬워서 할 수 없이 땅을 팔았지, 소작이건 자작이건 농촌에서 농사 안 짓고 어떻게 살겄습네까. 많으나 적으나 지어야제.
윤첨지
그래…
뚜범이
일손이 부족하네, 영농비가 많이 드네 해도, 그래도 땅벌이가 숱해라우.
윤첨지
그럼 자네가 내 밑에서 일을 좀 봐주소.
뚜범이
좋지라우. 어르신 밑에서 일도 배우고…
윤첨지
또 소작하겠다는 사람이 많던가?
뚜범이
그런 사람이 많습디다. 농사 안 지으면 뭣 가지고 먹고 살겄습네까.
윤첨지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뭇땅을 사 가지고 다시 소작을 주어서 옛날과 같은 세도를 되찾자는 것이다.
윤첨지
그래, 그래, 농지 천하지 본 아닌가.
옆에 펼친 ‘농지매입문서’를 보고 인원수를 세어본다.
윤첨지
아직도 덜 왔어.
뚜범이
뭐가요.
윤첨지
옛날 일흔두 사람인데, 아직 마흔 밖에 안 왔어.
옛날 소작농 일흔 두명 중에서 마흔 명 밖에 안 왔다는 얘기였다. 윤첨지는 뚜범이에게 부탁한다.
윤첨지
자네가 안 온 사람 집을 한 바퀴 돌아줄란가?
뚜범이
돌죠 뭐.
윤첨지
내가 적어주께 가지고 돌아다님서 빨리들 와서 나한테 팔라고 하소. 웃돈을 붙여 산다고. 또 한 마을 사람인께 더 좋은 일이라고. (사이) 그래야 나중에 소작을 하드라도 더 낫다고 이르소.
무대: 어두워진다.
& 텃골양반 댁
텃골양반은 이 상황에서 고민이 많다. ‘들자니 무겁고, 놓자니 깨질 것 같은 것’이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안 지을 수도 없는 일이다. 돈 쓸 데를 생각하면 남들처럼 당장 땅을 팔고 싶은데 또 농사를 안 지으면 살 수가 없을 것 같다.
텃골양반(아내에게)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쓰겄는가? 돈 쓸 데를 생각하면 땅을 팔면 좋겄고 뒤에 살 일을 생각하면 안 판 것이 좋겄는디. 어쨌으면 쓰겄는가?
텃골댁
지금 팔면 얼마나 받는다우?
텃골양반
우리 것은 상토인께 아무리 못해도 평당 사천 원씩은 받을 것이네. 모다 하면 육백사십만 원일세.
텃골댁
와아! 우리 같은 사람이 이런 때 무더기돈 못 보듬아보면 언제 보듬아보겄소.
텃골양반
금매 마시. 애들 학비야 뭐야 쓸 것은 많고… 꼭 팔았으면 쓰겄는디.
텃골댁
속은 나도 입은 것이 감투요, 어디 한 번이나 나가자 해도 걸칠 것이 없어서 못 나가겄소. 접때도 단풍놀이 가자고 왔는 것을 그래서 못 갔어라우.
텃골양반
자네뿐인가. 나도 늙마에 출입복이 한 벌이나 있으면 쓰겄네만…(사이) 지금은 우리 또래들도 양복 안 입고 다니는 사람이 드물어.
텃골댁
아이들도 옷 사준 지가 아슬하요.
텃골양반
그럼 맘먹고 팔아서, 가던중 돈을 한번 써보께?
텃골댁
금매 쓰기는 좋아도 전답 팔아버리면 뒤에 어떻게 살게라우.
텃골양반
그땐 그때대로 헤쳐 나가제 어째.
텃골댁
그럼 어떻게 할라우? 똑 끊어서 말해보시오.
텃골양반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드라고, 땅을 팔아놓고 보세. 같은 값이면 윤첨지네한테 팔세. 거기가 돈을 많이 준다고 않는가.
& 마을 동각
이런식으로 금부리 주민들에게 몫돈이 쥐어졌다. 우선 돈이 생기니 다시 잔치 분위기다. 상에 술과 안주가 나오고 동네 사람들이 잔을 돌린다.
주민 1
들세들.
주민 2
들세, 농지상한선 덕분에 두 번을 이렇게 오진 꼴을 보구만이. 상한선이 묶일 때 보고, 풀릴 때 보고.
주민 3
돈만 보고 좋아라고 하지 마러. 우리는 상한선하고 반대야. 상한선에 땅이 묶이면 우리는 풀리고 상한선에 땅이 풀리면 우리는 묶인다는 것을 알아야 해.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주민 2
풀리면 묶이다니?
주민 3
아이고 저 맹추! 땅이 풀렸은께 이제 우리가 묶이는가 안 묶이는가 두고 보소. 일 년이 다 못 가서 또 지주한테 묶일 것이네.
주민 1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겄네.
주민 3
그런께 두고 봐.
주민 1
그러건 저러건 술이나 들세. 자.
이러고들 무리무리 얼려서 노는데도 텃골양반은 예전처럼 마을에서 어울리지 못했다. 무턱대고 좋아하 할 성질이 아닌 것이다.
& 텃골양반 댁
동네에서 잡은 쇠고기 서 근을 사다놓고 식구들과 둘러 앉았다.
텃골양반
돈을 받고 술을 먹기는 먹어도 걱정이 태산 같네. (사이) 또 묶일 것을 생각하면…
텃골댁(고기를 입으로 가져가며)
또 묶이다니라우?
텃골양반
논을 팔아버렸으니 또 소작이라도 붙여야 쓸 것 아닌가. 농촌에서 농사 안 짓고 살 것 같는가.
텃골댁
그럼 또 소작료를 물어야 안 쓰겄소.
텃골양반
소작료 뿐인가. 이 사람아. 또 상전한테 매어 살아야 써. 말하자면 또 이리저리 노예 같은 생활을 시작한다 말이야 그런께 이놈의 농지상한선이라는 것이 병 주고 약 주는 세이야.
(사이)
묶었다,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