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와 희곡

오유권 원작, 농지상한선(農地上恨線) 제2막

바우네 2024. 10. 26.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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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막(5년 후)

윤첨지는 오 년간을 헛돈 한 푼 안 쓰고 굳게 모았다. 결과 농지상한선만 없다면 오 년 전에 잃었던 50정보의 땅을 되찾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농지상한선에 걸려서 땅을 더 살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살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고리채노릇만 해도 지주노릇 하는 이상의 수입과 위엄을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윤첨지 고리채대장을 들여다보면서 알이 굵은 주판을 튕기고 있다. 주판으로 계산을 하는 남편을 할멈은 존경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술을 따른다.

할멈

한잔 드시고 계산 하쇼.

윤첨지(주판을 치우면서)

그럴까…

밖에 인기척이 있다.

뚜범이(소리만)

마님나리 계십네까?

윤첨지(문을 열면서)

어서 오소.

뚜범이

시하 안강하십네까?

뚜범이는 마루 밑에서 굽신거리며 인사를 올린다. 마루로 올라와서도 국궁하고 고개를 조아린다.

윤첨지

그래 면사랑은 잘되고?

뚜범이

예. 마님나리께서 돌려주신 돈으로 농사는 걱정 없게 되었압네다만 또 명년에 쓸 비료값이 없어서 이렇게 왔습네다.

윤첨지

명년에 쓸 비료를 지금부터 구해놀려구?

뚜범이

예. 그렇지 않으면 그때 가서는 너도 나도 사는 통에 구하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값이 비쌉네다.

윤첨지

그래?...

뚜범이

봄의 것도 못 갚고 죄송합네다만 이만 원 한 장만 더 돌려주십시오. 실수 없이 갚으리라.

윤첨지

그건 그렇고, 왔은께 술이나 한잔 하소.

윤첨지는 술을 따라 뚜범이에게 잔을 권한다.

뚜범이

웬이오!

뚜범이는 두 손을 내밀어 잔을 막는 시늉을 한다.

윤첨지

받어, 이 사람아.

뚜범이

빈 손으로 와서 체면이 없는디, 술까지 묵고 가겠습네까.

윤첨지

먹는 음식인디 어쨌단가. 들소. 이 사람아.

뚜범이

비록 잡힐 것은 없지만 제 얼굴 하나 보고 믿으십시오.

윤첨지

자네 같은 사람이야 기십만 원을 줘도 믿겄네. (고리채 대장을 뒤적요 보다가) 봄에 가져간 것이 오만 원이고 작년 것도 아직 이자가 남았네 그랴.

뚜범이

예. 예. 장부가 거짓말하겄습네까. 추수를 하면 이번 것만 놔두고 씨리 갚겄습네다.

윤첨지

믿네, 가져가소.

윤첨지는 금고를 연다. 이만 원을 빌려주고 고리채 대장에 기록한다. 뚜범이 인사하고 퇴장한다. 이어서 안골 소룡이가 등장한다. 역시 굽신거리며 사정한다.

윤첨지(다짐하듯)

사부 이잘세. 알제?

소룡이

염려 마십쇼. 두 달만 쓰고 갚으리라.

윤첨지

쓰는 대로 쓰소.

윤첨지는 소룡이에게 돈을 내 주고 장부에 기록한다.

소룡이

그나저나 영농비 때문에 농사 못 짓겠구만이라우. 물가는 비싸고 돈이 어지간히 헤퍼야지라우.

윤첨지

그럴지 알제, 어째. 농지대는 다 상환했는가?

소룡이

올해로 끝나요. 땅은 내 땅이 되었다고 하지만 오 년간 그놈 밀어넣니라고 똥 탔구만요.

소룡이 돈을 챙겨 퇴장한다.

& 같은 장소

윤첨지 내외는 이야기를 나눈다.

할멈

금부리 사람들이 전답을 내 놓은 답디다.

윤첨지

받을 때는 좋았제. 막상 짓다보니 그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얼만디.

할멈

금메 말이요. 이럴 때 사두면 좋은디.

윤첨지

이런 때 사놓면 뒤에 한몫 볼지도 모른디 사겄는가 어디.

할멈

한 사람이 삼 정보 이상은 가질 수 없다지라우.

윤첨지

그런다네.

할멈

그럼 내 명의로도 사고 자식들 명의로도 사놓시오 그래.

윤첨지

사놓면 누가 그 농사를 지어내게.

할멈

또 뭇갈림 내주제 어째라우.

윤첨지

이젠 소작할라는 사람도 없을 것이네. 농사짓기가 하도 땀나서 원.

& 12년후 / 1967년

농지상한제로 봉건적 유습은 불식되었지만 농업의 현대화를 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1967년 9월 마침내 농지법이 개정된다. 농지소유 상한선이 풀리고 이와함께 부재지주가 인정된다. 그러자 때를 기다린 듯 부자들은 다시 땅을 구입하고 도시 사람들도 땅을 사려고 내려왔다.

윤첨지도 다시 땅을 사들였다. 헛간에 ‘농지매입사무소’라는 간판까지 내걸었다. 다시 땅문서가 쌓이고 이것을 보는 할멈은 걱정을 보탠다.

할멈

돈만 은행에 넣어두면 되지 멀라고 귀찮은 짓을 하시오.

윤첨지

이 여편네야, 모르는 소리 자그마니 따닥거려. 나 알어서 할 텐께.

할멈

밥을 또 얼마나 삶아내게.

윤첨지

그것이 다 사람 구실이고 영화란께.

할멈

세도, 세도하다가 이제 세도에 눌려 죽을 것이요.

윤첨지

아, 저, 방정 보소!

할멈

참, 뚜범이 일은 어떻게 했소.

윤첨지(웃으면서)

뚜범이 그놈이 땅을 나한테 팔고 바로 뒤돌아 가기도 전에 소작을 주락 안 한가.

할멈

그래라우이.

윤첨지

도둑도 빠르제. 그래서 지금 경황이 없다 하고 술을 한잔 줬네.

할멈

그럼, 뚜범이를 밑에 두고 일을 보게 하쇼.

윤첨지

알았어. 내가 다 알아서 할 것인께. 자네는 방정만 떨지 말어.

무대: 어두워진다.

& 같은 장소 / 뚜범이와 윤첨지

윤첨지

자네 방금 한 말이 진담인가?

뚜범이

진담이고 말고라우. 누가 어른한테 빈말하겄습네까.

윤첨지

그래… 소작을 부치면 얼마나 부칠란가?

뚜범이

제가 판 땅, 그만큼만 부칠랍니다. 그 이상은 힘이 부쳐서 못 지어라우. 돈이 아쉬워서 할 수 없이 땅을 팔았지, 소작이건 자작이건 농촌에서 농사 안 짓고 어떻게 살겄습네까. 많으나 적으나 지어야제.

윤첨지

그래…

뚜범이

일손이 부족하네, 영농비가 많이 드네 해도, 그래도 땅벗이가 숱해라우.

윤첨지

그럼 자네가 내 밑에서 일을 좀 봐주소.

뚜범이

좋지라우. 어르신 밑에서 일도 배우고…

윤첨지

또 소작하겠다는 사람이 많던가?

뚜범이

그런 사람이 많습디다. 농사 안 지으면 뭣 가지고 먹고 살겄습네까.

윤첨지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뭇땅을 사 가지고 다시 소작을 주어서 옛날과 같은 세도를 되찾자는 것이다.

윤첨지

그래, 그래, 농지 천하지 본 아닌가.

옆에 펼친 ‘농지매입문서’를 보고 세어본다.

윤첨지

아직도 덜 왔어.

뚜범이

뭐가요.

윤첨지

옛날 일흔두 사람인데, 아직 마흔 밖에 안 왔어.

옛날 소작농 일흔 두명 중에서 마흔 명 밖에 안 왔다는 얘기였다. 윤첨지는 뚜범이에게 부탁한다.

윤첨지

자네가 안 온 사람 집을 한 바퀴 돌아줄란가?

뚜범이

돌죠 뭐.

윤첨지

내가 적어주께 가지고 돌아다님서 빨리들 와서 나한테 팔라고 하소. 웃돈을 붙여 산다고. 또 한 마을 사람인께 더 좋은 일이라고. (사이) 그래야 나중에 소작을 하드라도 더 낫다고 이르소.

무대: 어두워진다.

& 텃골양반 댁

텃골양반은 이 상황에서 고민이 많다. ‘들자니 무겁고, 놓자니 깨질 것 같은 것’이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안 지을 수도 없는 일이다. 돈 쓸 데를 생각하면 남들처럼 당장 땅을 팔고 싶은데 또 농사를 안 지으면 살 수가 없을 것 같다.

텃골양반(아내에게)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쓰겄는가? 돈 쓸 데를 생각하면 땅을 팔면 좋겄고 뒤에 살 일을 생각하면 안 판 것이 좋겄는디. 어쨌으면 쓰겄는가?

텃골댁

지금 팔면 얼마나 받는다우?

텃골양반

우리 것은 상토인께 아무리 못해도 평당 사천 원씩은 받을 것이네. 모다 하면 육백사십만 원일세.

텃골댁

와아! 우리 같은 사람이 이런 때 무더기돈 못 보듬아보면 언제 보듬아보겄소.

텃골양반

금매 마시. 애들 학비야 뭐야 쓸 것은 많고… 꼭 팔았으면 쓰겄는디.

텃골댁

속은 나도 입은 것이 감투요, 어디 한 번이나 나가자 해도 걸칠 것이 없어서 못 나가겄소. 접때도 단풍놀이 가자고 왔는 것을 그래서 못 갔어라우.

텃골양반

자네뿐인가. 나도 늙마에 출입복이 한 벌이나 있으면 쓰겄네만…(사이) 지금은 우리 또래들도 양복 안 입고 다니는 사람이 드물어.

텃골댁

아이들도 옷 사준 지가 아슬하요.

텃골양반

그럼 맘먹고 팔아서, 가던중 돈을 한번 써보께?

텃골댁

금매 쓰기는 좋아도 전답 팔아버리면 뒤에 어떻게 살게라우.

텃골양반

그땐 그때대로 헤쳐 나가제 어째.

텃골댁

그럼 어떻게 할라우? 똑 끊어서 말해보시오.

텃골양반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드라고, 땅을 팔아놓고 보세. 같은 값이면 윤첨지네한테 팔세. 거기가 돈을 많이 준다고 않는가.

& 마을 동각

이런식으로 금부리 주민들에게 몫돈이 쥐어졌다. 우선 돈이 생기니 다시 잔치 분위기다. 상에 술과 안주가 나오고 동네 사람들이 잔을 돌린다.

주민 1

들세들.

주민 2

들세, 농지상한선 덕분에 두 번을 이렇게 오진 꼴을 보구만이. 상한선이 묶일 때 보고, 풀릴 때 보고.

주민 3

돈만 보고 좋아라고 하지 마러. 우리는 상한선하고 반대야. 상한선에 땅이 묶이면 우리는 풀리고 상한선에 땅이 풀리면 우리는 묶인다는 것을 알아야 해.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주민 2

풀리면 묶이다니?

주민 3

아이고 저 맹추! 땅이 풀렸은께 이제 우리가 묶이는가 안 묶이는가 두고 보소. 일 년이 다 못 가서 또 지주한테 묶일 것이네.

주민 1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겄네.

주민 3

그런께 두고 봐.

주민 1

그러건 저러건 술이나 들세. 자.

이러고들 무리무리 얼려서 노는데도 텃골양반은 예전처럼 마을에서 어울리지 못했다. 무턱대고 좋아하 할 성질이 아닌 것이다.

& 텃골양반 댁

동네에서 잡은 쇠고기 서 근을 사다놓고 식구들과 둘러 앉았다.

텃골양반

돈을 받고 술을 먹기는 먹어도 걱정이 태산 같네. (사이) 또 묶일 것을 생각하면…

텃골댁(고기를 입으로 가져가며)

또 묶이다니라우?

텃골양반

논을 팔아버렸으니 또 소작이라도 붙여야 쓸 것 아닌가. 농촌에서 농사 안 짓고 살 것 같는가.

텃골댁

그럼 또 소작료를 물어야 안 쓰겄소.

텃골양반

소작료 뿐인가. 이 사람아. 또 상전한테 매어 살아야 써. 말하자면 또 이리저리 노예 같은 생활을 시작한다 말이야 그런께 이놈의 농지상한선이라는 것이 병 주고 약 주는 세이야.
(사이)
묶었다, 풀었다.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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