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유권 원작, 농민과 시민 제2막
오유권 원작, 농민과 시민 제2막
# 제2막
민태와 경천이 논둑에서 쉬고 있다. 강건너 백사장에 대형버스가 들어온다. 하얀 차체에 붉은 선을 띤 관광버스가 굼벵이 기어오듯 노송나무 숲 어귀에 와서 멈춘다.
민태
이제 진짜 비쳤네.
경천
공일도 아닌 디 무슨 버스가 들어오까?
민태
노는 사람들이 공일 따로 있겄는가. 아무 때라도 놀면 놀제.
경천
오늘 또 물 다 품었네.
버스 문이 열리고 울긋불긋 한복을 입은 중년 부인들이 한 떼 쏟아져 내린다. 사오십 명쯤 되어 보이는 부인들이 게(蟹) 망태에서 게 풀려 나오듯이 나온다. 부인들 뒤를 따라 장구를 멘 양복쟁이 네 명이 내린다. S시 강남부인회에서 피서 겸 야유회를 온 것이다. 그들이 노송나무 숲에 자리를 잡는다.
민태
차리고 나온 것이 꽤 있는 것들이시.
경천
저런 여자들은 무슨 복을 타고 나서 한여름에 신선놀음을 할까.
민태
점심 나오면 먹고 품세.
경천
이 가뭄에 한시가 급한디 그래.
민태
저런 것 보고 일손이 잡히겄는가. 천천히 품세.
논둑에 앉아서 담배 한 대씩을 붙이고 나자 민태 어머니가 점심을 가지고 온다. 밥함지를 연다. 밥함지에는 잡곡밥, 호박국, 멸치젓과 게 간장 등이 들어있다. 밥암지를 민태가 받아든다.
민태
왜 이제 나오시오.
민태 어머니
안 늦다. 다른 사람도 다들 이제 안 내오냐.
민태
배고푸구만 그러네.
민태 어머니
물은 그새 얼마나 품었냐?
경천
저렇게들 와서 노는디 일손이 잡히겄소. 조끔밖에 못 품었소.
민태 어머니
대체 공일도 아닌디 무슨 여자들이 저렇게 와서 논단가.
경천
배아지 따뜻한 것들이라 그러제 어째라우.
민태 어머니
한여름에 남은 죽거니 살거니 일하는데 옆에 와서 저러고 싶으까.
경천
그런께 말이요. 다들 썩었어.
민태 어머니
들으매 저렇게 노는 사람들을 경찰에서 말린다고 않든가. 공원이나어디서 시끄럽게 못 놀게 한다고 않든가?
경천
그래도 저렇게들 와서 노는디 어쩔 것이요.
민태 어머니
이런 디는 외따로 떨어진 들이라 그러는 것이네.
경천
들도 마찬가지제. 농민들은 사람 아니라우.
놀러온 사람들도 마침 점심을 먹고 있었다. 불고기며 맥주며 사이다들을 잔뜩 벌여놓고 않아 먹는 것이다.
민태 어머니
썩은 것들! 일하는 사람들 옆에서 저러고 싶으까. 배고픈디 어서 밥들 먹소.
앙상한 잡곡밥에 비린내 나는 것이라곤 고린 멸치젓뿐이었으나 민태와 경천이는 맛있게 먹는다. 한 숟가락씩 떠서 불근불근 씹어 삼킨다.
민태
(미안한 투로) 반찬이 너무 없네.
경천
이도 맛있소.
민태 어머니
저런 사람들 먹는 것 열에 한 가지만 먹고 살아도 될 것인디 언제 그렇게들 살까.
경천
우리는 백 년을 살아도 저렇게 못 살 것이요.
민태 어머니
한방에서 얼어 죽고 데어 죽는다더니 그 쪼 났네.
불덩이 같은 해가 바야흐로 중천을 넘어서자 이글이글 타기 시작한다. 들 이쪽은 나무가 하나도 없다. 불볕을 무릅쓰고 땅에 앉아서들 점심을 먹는다. 땀이 줄줄 턱을 타고 흐른다. 종아리도 순전 물이다. 볕을 타는 것은 농군들만이 아니다. 벼도 바싹바싹 탄다. 물을 품어댄 논이 금시 물이 잦아들고 금이 보인다.
민태 어머니
이런 때 비나 한 줄기 쏟아졌으면…
경천
날씨 하는 것이 좀체 비가 안 올 것 같소.
민태 어머니
큰일이시.
경천
양수기도 많이 나온 것 같습디다만 가뭄은 못 당해내라우.
민태 어머니
물도 하늘에서 오는 비라야제. 품은 물은 갈증만 나.
점심을 먹은 두 친구는 담배를 피우고 잠을 청한다. 논둑에 누워서 밀짚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자는 것이다. 거짓잠을 얼른 한 잠씩 붙이고 나자 일을 해야지 땡볕에 계속 일을 하기는 어렵다.
두 친구가 잠을 청하는 사이에 놀러온 사람들은 장구를 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민태 어머니는 밥 함지를 이고 퇴장한다. 똥땅똥땅 똥땅똥땅(음향)
장구가락에 맞춰 노래가 소리만 들리다.
소리만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는 심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만화방창 호시절에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민태와 경천이는 노래소리에 잠을 깬다. 다시 두렛줄을 잡고 발을 도사린 다음 물을 품는다.
경천
해는 중천에 오고.
민태
어레 하나.
경천
물은 밭아가는데.
민태
어레 둘.
경천
어서어서 품어서.
민태
어레 셋.
경천
이 배미 채우고.
민태
어레 넷.
경천
저 매미로 가세.
이들의 두레질 노래와 놀러온 사람들의 ‘노세노세’ 노래가 섞여 들린다. 이에 질세라 경천이 더 큰 목소리로 두레질 가락을 읊는다.
경천
이 물을 품어서.
민태
오백하나라.
경천
풍년이 들며는.
민태
오백둘하고.
경천
쌀 한 가마에.
민태
오백셋하니.
경천
사만 원만 하여라.
민태
오백넷이라.
경천
쌀값은 오르고.
민태
그렇지.
경천
비료값은 내려라.
민태
흥.
경천
농약값도 내리고.
민태
오백일곱에.
경천
포목값도 내리고.
민태
오백여덟이라.
경천
고기값도 내리면.
민태
흥.
경천
그때야말로.
민태
오백열하고.
경천
천하지 대농민일세.
민태
좋구나, 허허.(두레질을 멈추며) 예끼, 이 사람!
경천
왜?
민태
우리 욕심만 채워서 쓸 것인가. 쌀 한 가마에 사만 원 가면 살아갈 사람이 없게.
경천
저것들 먹고 노는 것 보소. 오만 원 가도 다 사먹을 것이네.
민태
해도 분수가 있제.
경천
그래야 농민도 기를 펴고 살제, 살겄는가 어디.
경천과 민태가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 마을 애들 넷이서 땀을 흘리고 걸어온다. 경천이가 짐작한 것이 있어 묻는다.
경천
너희들 어디 가냐.
아이들
…
경천
어디들 가.
아이 1
여자들 노는 디 구경 가라우.
경천
네 이놈의 새끼들 가지 마라.
(주먹을 올려 쥐면서) 또 약밥 얻어먹고 콜라병 주워 올라고 그러지야.
아이들
아니라우.
경천
아니기는 뭣이 아니여. 내가 다 안다. 거지새끼들처럼 그러지 말고 들어들 가거라.
아이 1
구경만 한단 말이요.
경천
잔소리 말고 마을로 가.
아이들이 멈칫멈칫 대면서 망설인다.
경천
빨리 가. 이놈의 새끼들아. 어디 가서 거지 노릇할라고 그러냐.
경천이 주먹을 올려 쥐고 아이들을 쫒는다. 아이들 마을로 내뺀다.
민태
자네는 성미도 묘하네. 궁금한 아이들, 가서 고깃점이라도 얻어먹고 병이라도 주워다 엿 바꿔 먹으라고 놔두제, 뭘라고 쫓아버린가.
경천
아무리 없고 못 먹기로서니 저런 디 가서 얻어먹게 해서 되겄는가. 차라리 우리들이 가서 술잔이나 얻어먹으면 얻어먹어도 아이들에게 그런 천한 짓을 하게 해서 쓰겄어.
민태
그럼 있다 가서 술 한잔씩 얻어먹으께?
경천
가세, 자네가 원한 것인께, 가서 한잔 얻어먹세.
놀러온 사람들은 단체놀이가 끝나고 노래자랑을 한다. 노래하는 소리가 들린다. 노래 소리 들리는 확성기 소리에 물을 품을 수가 없다.
소리만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에 새아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경천
에잇, 빌어먹을 것! 홧김에 서방질하더라고, 가서 한잔씩 얻어먹세.
경천과 민태가 백사장 쪽 놀러온 사람들에게 가느라 퇴장한다. 무대는 어두워진다.
& 백사장 / 노송 아래
놀러온 사람들 배경으로 중년 남자 셋이 궤짝을 깔고 앉아 있다. 민태가 그들 곁으로 간다.
민태
물 품다가 더워소 왔소. 술 한잔 주시요.
안경잡이
이 사람들이 노래가 한창인디 그래.
민태
확성기 소리 때문에 일도 잘 안 되요.
안경잡이
(훈게조로) 일하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 가져서는 안 되지.
경천
일하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 가져서는 안 되다니… 뭐가 안 된단 말이요.(시비조로)
안경잡이
이 사람이…
안경잡이가 경천이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안경잡이
물 품는 데 열중하지 않고 노는 데 마음을 주어선 안 되지. 그렇잖아도 날이 가물어서 추수 생산고가 감소될 것이 예상되는ㄷ 여러분이 잘해야지.
경천
그럼 우리는 잘하기 위해서 땡볕에서 물을 품는데 선생님들은 이런데 나와서 노는 것이 잘하는 일이요?
안경잡이
허허, 이 사람 보소!
경천
이 사람이 뭐야. 누구를 가르칠라고 그래.
안경잡이
야, 이봐라… 우리가 우리 돈 가지고 와서 노는데 네놈이 무슨 상관이야.
안경잡이가 남방셔츠를 벗어붙이고 일어선다.
경천
당신들 입으로 들어간 밥은 누가 지어 먹여주는데 그랫.
안경잡이
이 새끼 봐, 사상이 불순하네.
경천
사상이 불순하긴 누가 불순해. 새마을사업이 한창인데 이러고 나와서 노는 당신들 사상이 불순하제 누 사상이 불순해.
말이 커지자 노래 소리가 중단된다. 놀러온 사람들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된다.
안경잡이
이놈 새끼, 너 어디서 사냐.
경천
나 이 마을에서 사는 농민이다. 어쩔래.
안경잡이
뭣이… 어쩔래…?(말꼬리를 잡고 따진다.)
경천
그래 어쩔 테야? 당신들이 신사면 농민들 입장도 생각해봐야지. 추수 생산고가 감소딜 것을 걱정하고 훈계한 사람들이 이러고 놀아서 되겠소. (좌우를 둘러보면서) 이러고들 노니까 농민들은 사람으로 안 보이요?
옆에 있던 양복쟁이가 민태 소매를 끌면서 물어온다.
양복쟁이
저 사람이 왜 저래?
민태가 자초지종을 말한다. 민태는 얘기하고 양복쟁이는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민태
이러니 우리가 뿔이 안 나게 생겼소. 응? 뿔이 안 나게 생겼어?
양복쟁이가 수습이 필요하다고 판단을 하고 화해 제스처를 한다.
양복쟁이
그러고저러고 할 것 없이 여기 와서 술 한잔씩 하제. 더운디 수고하는구만.
민태 / 경천
아니라우.
양복쟁이
와, 이리.
양복쟁이는 경천의 어깨를 잡으면서 술을 권한다.
양복쟁이(경천에게)
자네도 따질 것 없이 이리 와서 같이 한잔 하소.
경천
내가 술 얻어먹어! 술 얻어먹으러 여기 온 지 알아.
양복쟁이
허허! 젊은 사람들이…
경천
신사면 신사답게들 노시오. 돈만 있으면 장땡인지 아요.